방명록을 남겨주세요!

  1. 박지순 2017.04.17 09:45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이기환 기자님, 저는 박지순이라고 합니다.

    2011년 초까지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현 문화유산채널) 문화재 전문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가톨릭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해

    문화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자 '경주 노서리 215번지 귀고리' 기사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국보를 제외하고 보물이나 지방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노서리 215번지

    귀고리 사례처럼 행정상의 실수가 발생한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의문을 갖는 부분은 노서리 215번지 귀고리가 행정상의 실수로

    보물 지정을 받지 못했다면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노서리 215번지

    귀고리의 문화재적 가치를 평가해서 그에 알맞는 문화재(국보일 수도

    있고 보물이나 지방문화재일 수도 있겠지요.) 지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행정상의 실수(행정상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는 좀 더 규명이 필요합니다.)

    가 있었다고 귀중한 문화유산을 공개도 하지 않은 채 흑백사진으로만 남겨

    놓고 어두운 수장고에서 꺼내지 않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2. 신춘섭 2017.04.07 23:24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기자님 경남정보대 방송영상과 학생 신춘섭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가 이번에 조선통신사관련 공모전에 나가게되었습니다.
    http://leekihwan.khan.kr/entry/18%EC%84%B8%EA%B8%B0-%ED%95%9C%EB%A5%98-%EC%A1%B0%EC%84%A0%ED%86%B5%EC%8B%A0%EC%82%AC%EC%9D%98-%EC%98%81%EC%9A%95
    기자님의 이 기사를 저희 작품에 나타내고 싶어 이렇게 허락을 여쭙습니다.
    조선통신사에 대해 알리고 젊은 청년들에게 재능기부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신메일:tlscnstjq3@naver.com
    전화번호:010-7122-9482

  3. 박민석 2017.03.31 19:11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조선판 히딩크에 대하여 재미있게 읽어보았습니다.
    관련 내용으로 자료를 보내고자 하므로 메일 주소를 알고 싶습니다.
    전남 해안가에 이분과 비슷한 분의 묘와 관련 족보가 있습니다.
    회신메일: 119safe@naver.com
    전화번호: 010-8377-1472

  4. 서산문화원 2017.03.23 09:46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서산문화원 강현숙 주임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선생님 고견이 담긴 책자들을 보고 원고의뢰 건으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저는 서산문화원에서 매달 발간되는 서산문화원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혹시 책자에 선생님의 고품격 원고를 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주로 역사와 문화 관련된 내용을 많이 실으며 매달 1800부가 발간되어 발송되고 있습니다
    고료가 적어서 선생님이 수락해 주실지가 관건이네요 ㅜㅜ
    분량은 원고지 15매 내외이며 고료는 원고지 매당 오천원입니다
    혹시 원고청탁이 가능하시다면 답변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회신 : seosan5050@kccf.or.kr
    문의 : 041-669-5050

    서산문화원 강현숙 올림

  5. 정기영 2017.01.26 13:43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0.008cm의 백운모 장식품을 보고 놀랐습니다. 백제시대에 백운모를 이용하여 저런 장식품을 만들 생각을 했다니. 운모에는 백운모와 흑운모 두 종류가 있는데, 색조로 보아선 흑운모로 보이는데,,, 감정은 뭐 잘되었겠죠. 그리고 0.0008cm 두께의 백운모판을 얻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마치 송판이 결따라 잘 쪼개지듯이 백운모도 벽개(cleavage)를 따라 얇게 잘 쪼개지는 성질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뭔가 공구를 써서 가공한 것이 아니라 얇은 판으로 쪼개서 뜯어낸 것이지요..
    광물 연구자

  6. 김진희 2016.12.09 19:30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오사라바! 살아서 다시 봐!… 일본 난고손 1300여년 이어온 백제왕의 전설을 만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1402192127515&code=900306#replyArea#csidx3ce2570c5015b9a8a4b766bcdefdcc3

    기사를 보고 방명록을 남겨요.~ 저는 2017년 1월19일~22일 있을 스와스마츠리 축제탐방을 가려고 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저희 교수님 탕방팀이 미야자키현에서 난고손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축제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궁금해서 여쭤보고싶어요~ ^_^

    • Favicon of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기자 2016.12.12 10:16 신고  수정/삭제

      제가 갈 때 행사에 관심을 갖고 답사를 주도하신 분은 도서출판 주류성의 대표이자 강남문화원장인 최병식 사장입니다. 그분께 여쭤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02-3481-1024가 주류성 출판사 번호입니다.

  7. Favicon of http://pt10202003.tistory.com pt10202003 2016.11.27 14:33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고려양의 시초네 뭐네 하는 주장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7]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8] 게다가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9]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기황후가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자기가 불리하거나 필요할 때 권력자에게 또 다른 공녀를 뇌물로 갖다바치고,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저절로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사실를 왜곡하는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고려양 또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가서 저절로 퍼진 것이고 기황후는 그 공녀의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8. Favicon of http://pt10202003.tistory.com pt10202003 2016.09.23 23:01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제발 매국노 애국자 만드는 역사왜곡 하지 마세요!
    선생님 기황후 글 중에
    "기황후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떻든 훗날 공녀제도를 폐지했고 고려를 원나라의 지방성(省)으로 삼으려는 정책을 반대하기도 했다."
    "기황후는 몽골에 고려판 한류를 심은 공신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기황후가 퍼뜨린「고려판 한류」인 셈이다."
    모두 새빨간 거짓입니다!
    이 글을 보세요. 같은 경향신문 기사도 있네요.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소리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04/2014030404668.html를 보면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뿐만 아니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292016531&code=960801를 보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http://www.encykorea.com/enc/ency_012375.html에는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라고 나온다.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역사왜곡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고려양 또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가서 저절로 퍼진 것이고 기황후는 그 공녀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 여자가 한류의 원조네 뭐네 할 수 없다.

  9. 황태하 2016.09.20 02:07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 황금보검" 글 2편,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많은 문헌과 자료로 아주 쉽게, 흥미진진하게 쓰신 글 감사합니다. 특히 흉노족 관련 대목은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만, 말씀하신 주장을 학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요? 많이 궁금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10. 이예슬 2016.09.20 01:03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제가 며칠 전 북한산성에 금괴가 숨겨져 있다는 기사를 이곳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기사에서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로 임명된 이지용에게 매장된 지도를 주었다고 하는데 찾아보니까 이지용은 고종의 사촌이고, 이완용과 함께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며, 현재 친일파로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기사에 나와있는 이지용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동명이인이었는지 아니면 지금 현재 친일파로 알려진 이지용인지 궁금해서 이렇게 방명록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