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을 남겨주세요!

  1. 김진희 2016.12.09 19:30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오사라바! 살아서 다시 봐!… 일본 난고손 1300여년 이어온 백제왕의 전설을 만나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1402192127515&code=900306#replyArea#csidx3ce2570c5015b9a8a4b766bcdefdcc3

    기사를 보고 방명록을 남겨요.~ 저는 2017년 1월19일~22일 있을 스와스마츠리 축제탐방을 가려고 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저희 교수님 탕방팀이 미야자키현에서 난고손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축제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궁금해서 여쭤보고싶어요~ ^_^

    • Favicon of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기자 2016.12.12 10:16 신고  수정/삭제

      제가 갈 때 행사에 관심을 갖고 답사를 주도하신 분은 도서출판 주류성의 대표이자 강남문화원장인 최병식 사장입니다. 그분께 여쭤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02-3481-1024가 주류성 출판사 번호입니다.

  2. Favicon of http://pt10202003.tistory.com pt10202003 2016.11.27 14:33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고려양의 시초네 뭐네 하는 주장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7] 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8] 게다가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9]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기황후가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자기가 불리하거나 필요할 때 권력자에게 또 다른 공녀를 뇌물로 갖다바치고,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저절로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사실를 왜곡하는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고려양 또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가서 저절로 퍼진 것이고 기황후는 그 공녀의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3. Favicon of http://pt10202003.tistory.com pt10202003 2016.09.23 23:01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제발 매국노 애국자 만드는 역사왜곡 하지 마세요!
    선생님 기황후 글 중에
    "기황후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떻든 훗날 공녀제도를 폐지했고 고려를 원나라의 지방성(省)으로 삼으려는 정책을 반대하기도 했다."
    "기황후는 몽골에 고려판 한류를 심은 공신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기황후가 퍼뜨린「고려판 한류」인 셈이다."
    모두 새빨간 거짓입니다!
    이 글을 보세요. 같은 경향신문 기사도 있네요.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소리들이 존재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먼저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04/2014030404668.html를 보면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뿐만 아니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292016531&code=960801를 보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정책실장으로 재직중인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숙인 교수는 “고려 때 기황후를 모델로 해 공녀가 더 늘었다”며 “기황후가 당시 권력 기반을 위해 더 많은 고려 사람들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결과 원나라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고려 공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http://www.encykorea.com/enc/ency_012375.html에는 "1343년(충혜왕 복위 4) 역시 원나라에서 이운(李芸)·조익청(曹益淸)·기철(奇轍) 등이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다."라고 나온다. 동생이 입성론을 일으키는데도 이를 막으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이곡이 순제에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불화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그녀가 황후로 있던 시기 말기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러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를 왜곡해서 해석하여 위와 같은 역사왜곡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고려양 또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가서 저절로 퍼진 것이고 기황후는 그 공녀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 여자가 한류의 원조네 뭐네 할 수 없다.

  4. 황태하 2016.09.20 02:07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 황금보검" 글 2편,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많은 문헌과 자료로 아주 쉽게, 흥미진진하게 쓰신 글 감사합니다. 특히 흉노족 관련 대목은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만, 말씀하신 주장을 학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요? 많이 궁금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5. 이예슬 2016.09.20 01:03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제가 며칠 전 북한산성에 금괴가 숨겨져 있다는 기사를 이곳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기사에서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로 임명된 이지용에게 매장된 지도를 주었다고 하는데 찾아보니까 이지용은 고종의 사촌이고, 이완용과 함께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며, 현재 친일파로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기사에 나와있는 이지용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동명이인이었는지 아니면 지금 현재 친일파로 알려진 이지용인지 궁금해서 이렇게 방명록을 남깁니다.

  6. 지나가다 2016.09.19 23:52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
    이기환 기자님의 쿠쉬나메 관련 기사를 읽고 거기에 댓글을 몇자 휘갈겨 남겼는데.. 역사학자들이 쿠쉬나메를
    우습게(?)보는것에 대해 반박할 자료가 될겁니다.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7. 김상용피겨코치님 2016.07.13 16:34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상용님컴퓨터본다김상용님휴대폰본다

  8. 김상용피겨코치님 2016.07.13 16:34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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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김상용피겨코치님 2016.07.13 16:34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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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이춘영 2016.06.08 20:16 신고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최근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알게되어 팟캐스트로 재미있게 잘 듣고 있습니다.
    듣는 중에 "35회 낙타를 굶어 죽인 태조 왕건의 숨은 뜻"에서
    발해가 멸망한 것도 오래전이고 굳이 거란과 갈등을 빚어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는 이기환님의
    생각에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되는 바가 있어 몇자 적어 봅니다.
    당시 고려는 한반도를 통일한지 몇년 되지 않았고(936) 거란은 후진으로부터 연운 16주를 얻은지(937)
    얼마 안되는 시점(942)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란이 고려에 사신과 낙타를 보낸 것은 염탐의 성격이 짙다고 생각합니다.
    즉 고려가 낙타를 받든 안 받든 거란의 입장에서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려가 힘이 약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침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란의 주요 상대는 중원의 송나라였기 때문에 고려의 군사력과 입장등을 확인해 본 것 뿐인 것입니다.
    반면 고려의 입장에서는 순순히 낙타를 받기 보다는 신생강국인 거란을 송나라와 함께 견제하는 것이
    긴 안목에서는 나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여러차례 거란과 전쟁을 벌이지만 고려가 방심하지 않고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협상에 따라서는 강동 6주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고려판 등거리외교)
    한편으로는 송나라로부터는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협력관계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송나라는 서긍을 사신으로 보내는 등 어떻게든 고려로부터 협력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의 가설은
    태조 왕건이 본래 중국 회하강 출신(중국학자 주장)이기 때문에 중원을 위협하는 거란에 대해
    천성적으로 거부반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암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가지 가정과 망상을 해 보았습니다..^^
    역사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Favicon of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기자 2016.06.09 09:48 신고  수정/삭제

      좋은 지적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역사란 정답이 없어서 어떻게 공부해서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