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년 전인 1888년 조선의 고종과 프랑스의 사디 카르디 대통령은 ‘도자기 외교’를 펼쳤다. 두 정상이 주고받은 도자기가 바로 카르디 대통령(재임 1876~1894년)이 보낸 프랑스산 백자꽃병과 고종(재위 1863~1907)이 답례로 선물한 청자대접과 반화(盤花)이었다. 

1888년 사디 카르노 프랑스 대통령이 조선·프랑스 수교 2주년을 맞아 고종에게 선물한 살라미나 백자꽃병.|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과 프랑스는 1886년(고종 23년) 수호조약을 맺었다. 프랑스는 조선의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빅토르 콜랑 드 플랑시(1863~1922)를 초대 주조선공사로 임명했다. 이것이 양국정상간 도자기 외교의 계기가 됐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은 중국 도자기에 열광했던 때였다. 그러나 도자기에 조예가 깊은 플랑시는 입국하자마자 조선의 도자기를 시대별·주제별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영향력있는 외교관이 관심을 보이자 프랑스 세브르 미술관은 물론이고, 골동품 중개인과 여행객 사이에서 조선도자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카르디 대통령은 급기야 조선·프랑스 수교 2주년을 맞이한 1888년 조선의 고종에게 프랑스산 도자기를 선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받은 프랑스산 도자기가 바로 ‘살라미나(살라민) 병’이다. 

이 특별한 프랑스산 도자기가 국립고궁박물관이 29일부터 10월4일 개최하는 특별전(‘신 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에 출품된다. 

‘홍색 오얏꽃무늬 유리 등갓’. 1887년(고종 24년)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에서 국내 최초의 전등이 불을 밝힌다. 이 등갓은 전기 도입후 궁중에 설치된 것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김동영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개항전후 조선왕실의 도자기 변화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특별전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특별전에는 살라미나 병 외에도 1818년 설립된 프랑스 도자기의 명가로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이는 ‘필뤼비트(필리뷔·Pillvuyt)’의 양식기 한 벌과 ‘백자색회 고사인물무늬 화병’ 등 근대 서양식 도자기 180여점이 공개된다. 

곽희원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를 포함해서 프랑스·영국·독일·일본·중국 등에서 제작된 서양식 도자기가 총 310건 400점이 한자리에서 선보인다”면서 “이중 40여점은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유물”이라고 전했다. 

이 가운데 카르디 프랑스 대통령이 고종에게 보낸 ‘살라미나 병’은 백자 꽃병이다. 프랑스 국립 세브르 도자기 제작소의 1878년 작품이며, 입지름이 53.2㎝, 높이가 62.1㎝의 대형 도자기이다. 

1888년(고종 25년) 5월 열린 대대적인 봉헌식에서 고종은 “프랑스의 예술작품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것은 처음 보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냥 받고만 있을 수 없었던 고종이 1888년 11월 플랑시 공사를 통해 보낸 답례품이 바로 고려청자 대접 두 점과 ‘반화(盤花)’ 한 쌍이었다. 플랑시는 “청자대접은 12세기 후반~13세기 전반에 제작됐으며, 앵무새문양과 모란당초문이 시문 장식된 최상품”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식기. 조선왕실이 만찬을 위해 구매한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 필리뷔트(Pillivuyt)의 식기 세트.백자에 금색 선을 두르고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무늬(李花文)를 장식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두 점의 청자대접은 플랑시 공사의 권고에 따라 세브르 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반화’는 금속제 화분에 금칠한 나무를 세우고, 각종 보석으로 만든 꽃과 잎을 달아놓은 장식품이다. 고종이 선물한 ‘반화’는 너비 24㎝, 폭 16㎝의 타원형 수반(水盤·물을 담아 꽃을 꽂거나 괴석 따위를 넣어 두는 그릇)이다. 반화에는 금가루로 뒤덮인 고목이 꽂혔고, 뻗어 나간 가지에는 얇은 나무판을 오려 초록빛으로 물들인 잎들이 달렸다. 이 반화는 카르디 대통령의 아들이 1954년 기메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개항 이후 서양식 도자기가 왕실에 유입된 배경을 조선의 대내외적 변화로 살펴본다. 이중 ‘오얏꽃무늬 유리 전등갓’ 등 150여점의 유리 등갓이 눈에 띈다. 조선에 전깃불이 도입된 것은 1887년(고종 24년) 1~3월 어느 날이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안쪽 가장 깊숙한 건청궁이 환한 빛을 밝힌 것이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해로부터 불과 7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특별전에 출품된 도자기.|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때의 궁궐 내 점등이 베이징의 자금성은 물론, 일본의 궁성보다 약 2년 앞지른 선구적인 사업이었다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그렇다면 고종이 ‘동양 최초로’ 전등을 도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은 “임금은 임오군란(1882년) 및 갑신정변(1884년) 이래…미리 피란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밤에 소요가 발생하므로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다. 말하자면 황현은 “고종이 야밤에 일어나는 변란이 두려워 전전긍긍했으며, 그 때문에 훤하게 불을 밝히려 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사실 전깃불의 마력을 소개한 이들은 4년 전인 1883년(고종 20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 일행이었다. 민영익(1860~1914)을 전권대신으로 한 보빙사 일행은 뉴욕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던 전등불에 홀리고 말았다.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이 전등을 발명한 지 불과 4년만에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발명품, 그것도 대중화·실용화한 신문물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보빙사의 일원이었던 유길준(1856~1914)은 “처음엔 악마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 사용방법을 알게 됐다”면서 “이 전기를 조선에 들여오고 싶다”는 열망을 피력했다. 

이번에 출품되는 다양한 전등갓은 이런 과정을 거쳐 동양에서 가장 먼저 전깃불을 켠 ‘얼리어댑터’의 증거물이다. 

‘백자 색회 고사인물무늬 화병’.  일본 규슈(九州) 아리타(有田)의 고린샤(香蘭社)에서 제작한 화병이다. 가운데 창을 낸 뒤 중국의 죽림칠현을 표현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특별전에서는 이밖에 창덕궁 희정당 권역에 남아 있는 서양식 주방을 그대로 옮긴 구조에 ‘철제 제과틀’과 ‘사모바르(Samovar·러시아식 주전자)’ 등 각종 조리용 유물을 전시해놓는다. 100년 전 창덕궁 주방 속으로 관람객을 안내하는 공간이다. 조선의 왕실문양인 ‘오얏꽃 문양(李花文)’이 찍혀있는 필리뷔트 양식기는 바로 조선왕실이 주문 제작한 도자기다.  

특별전에서는 일본 아리타(有田)·교토(京都)·나고야(名古屋)에서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유행한 수출용 화병들도 대거 선보인다. 이들 화병은 고란샤(香蘭社)·긴코잔(錦光山)과 같은 공장제 도자기 제작회사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새와 꽃, 용, 고사인물 등 다양한 소재와 화려한 황금 채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 페라나칸(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등지에 살던 중국 상인)을 위해 중국 징더전(景德鎭)의 민간 가마에서 제작한 화병도 선보인다. 봉황과 모란, 옅은 녹색과 분홍색을 주조로 하는 색감이 페라나칸 자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김현정 학예연구관은 “특별히 프랑스·중국·일본산 대형화병 13점은 3차원 입체물 촬영기법을 적용하여 가상현실 온라인 전시관에서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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