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재유행 탓에 다시 문을 닫았지만 국립고궁박물관이 10월4일까지 열고 있는 ‘신 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특별전엔 아주 화려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특별전의 압권은 물론 132년 전인 1888년 프랑스의 사디 카르디 대통령(재임 1876~1894년)이 보낸 프랑스산 ‘살라미나 백자 꽃병’이다. 프랑스 국립 세브르 도자기 제작소의 1878년 작품이다. 입지름이 53.2㎝, 높이가 62.1㎝의 대형 도자기라서 관람객들은 입을 쫙 벌리게 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필자는 전시장 입구에 진열해놓은 홍색 오얏꽃무늬 유리 등갓 등 150여 점의 다양한 전등갓에 더 시선이 갔다. 왜냐 이 전등갓들은 동양 3국에서 가장 먼저 불을 밝힌 ‘얼리어댑터’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자금성, 일본의 궁성 등에 견줘 2년이나 앞섰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홍색 오얏꽃무늬 유리 등갓’. 1887년(고종 24년)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에서 국내 최초의 전등이 불을 밝힌다. 이 등갓은 전기 도입후 궁중에 설치된 것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얼리어댑터의 흔적

어떻게 ‘은자의 나라’로 일컬어졌던 조선이 중국·일본보다 앞서 전깃불을 도입했을까. 그것도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지 불과 7년5개월만이었다니 놀랄만 하지 않은가.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879년 10월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1847~1931)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백열전구를 세상에 내놓는다. 에디슨은 탄소 필라멘트를 사용, 시간도 길고 밝기도 적당한 전구를 만든 것이다. 에디슨은 당시 전류를 통과시켜 빛을 발생시키는 필라멘트의 소재를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마존에서 일본의 숲까지, 백금에서 사람의 머리카락과 수염에 이르기까지, 무려 6000여 가지의 재료를 검토하며 1200번의 실패를 맛봤다고 한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뤄진다’는 에디슨의 명언은 여기서 탄생했다.


■'악마의 불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디슨이 천신만고 끝에 전등을 발견한지 4년 남짓 지난 1883년(고종 23년) 9월 조선의 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가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도착한다. 

조·미 수교(1882년) 1주년을 맞아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이때 민영익(1860~1914)을 단장(전권대신)으로 한 사절단 보빙사 일행은 뉴욕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던 전등불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당시 뉴욕에서 전등회사를 설립한 에디슨은 뉴욕 시내 펄 가에 8만 피트의 지중배전선을 설치하고 인근 주택에 역사상 처음으로 전등을 점화했다. 그 때가 1882년 9월4일이었다. 조선의 보빙사가 미국에 도착하기 불과 1년 전의 일이었다. 

조선의 보빙사 일행은 바로 이 전등설비를 보게 된 것이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지 불과 4년 만에 따끈따끈한 신문물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 

게다가 보빙사 일행은 해군함정인 트렌트호를 타고 발전소도 시찰했고, 에퀴타블 빌딩의 발전기에서 발전되어 전등에 전기불이 켜지는 모습도 보았다. 보빙사의 일원이었던 유길준(1856~1914)의 회고담이 의미심장하다.

“우린 거리의 전등불은 악마의 힘으로 켜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전기로부터 전깃불이 켜지는 과정을 지켜보고는) 안전하게 조작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유길준은 그러면서 “이 전기를 조선에 들여오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피력한다. 유길준은 “미국은 전기가 가스나 석유등보다 값싸고 훨씬 편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서 “우리는 더 이상 실험해볼 필요도 없다”고 흥분했다. 귀국한 보빙사 일행의 보고를 들은 고종 역시 전등 도입에 적극 나섰다.

1887년 경복궁 건청궁 내에서 열린 점등식을 그린 그림. 이 도깨비불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한전 전기박물관 제공

■밤이 무서워 전등 도입했나

결국 조선 조정은 에디슨 전등회사와 전등 및 전화 설비 독점권을 주었다. 그 결과 경복궁에 가설할 전등설비가 에디슨에게 발주됐다.(1884년 9월4일) 이 계획은 3개월 후인 12월4일 발발한 갑신정변 때문에 연기된다. 그러나 민심이 점차 안정됐다는 판단을 한 조선정부는 1885년부터 전등설치사업을 재개했다.

1886년 12월 전등설비와 운영을 맡을 전등교사로 윌리엄 매케이(조선명 맥계·麥溪)를 파견하면서 경복궁 설비는 급진전을 이룬다. 고종이 전등 도입을 서두른 이유를 두고 흥미로운 시사점이 있다.

구한말 우국지사인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을 보라.

“임오군란(1882년) 및 갑신정변(1884년) 이래 병란 발발을 두려워한 임금은 미리 피란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가마꾼 20명을 배불리 먹여 궁성 북문에 대기시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또 밤을 이용해 소요가 많이 발생하므로 궁궐 내에 전등을 많이 켜서 새벽까지 훤하게 밝히도록 명했다.”

하기야 “전등 한 개를 하룻밤 밝히는데 천민(千緡·엽전 1000꿰미)의 비용이 든다”(<매천야록>)고 했으니 당대의 우국지사는 곱지않은 시선으로 고종을 바라본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리석은 임금이라고 해도 ‘밤이 무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등불을 도입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본다.  

최근 발굴된 경복궁내 전기발상지인 전기등소터. 128년만에 정확한 위치가 알려졌다. 당시 발전규모는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설비였다고 한다.|문화재청 제공

■건달불, 괴화, 증어망국

어쨌거나 1887년(고종 24년) 1~3월 사이 어느 날 밤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였던 경복궁 건청궁이 환힌 빛을 밝혔다. 당시 이 초유의 구경거리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하기야 그럴만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경복궁의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에서는 밀초(꿀벌집으로 만든 초)나 쇠기름으로 만든 초를 써서 불을 밝혔다. 그러나 밝기도 약했고 그을음과 냄새가 심했다.

그런데 세상이 개벽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파란 눈의 서양인이 건청궁 연못 앞에 설치된 괴상한 쇳덩이를 조작하자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나고, 곧바로 궁궐 처마 밑에서 도깨비불보다 더 환한 불이 켜졌다. 당시 이 모습을 숨어서 지켜봤다는 안상궁의 회고담(1936년)을 풀어보자.

“서양인 손으로 기계가 움직였는데 연못의 물을 빨아올려 물이 끓는 소리와 우뢰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궁전 내 가지 모양의 유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됐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상궁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어서 그저 불가사의한 것이라 여기곤 공포감마저 들었다”면서 “바깥 궁에서도 온갖 구실을 붙여 이 신기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고 회고했다. 안상군의 회고대로 ‘듣도보도 못한’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복궁을 대낮처럼 밝힌 이날의 사건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여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때 설치된 발전기가 증기동력이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의 냉각용수가 열탕이 되었다. 때문에 경복궁 향원정의 연못에 뜨거운 증기수가 역류됐다. 연못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때문에 ‘증어망국(烝魚亡國)’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던 것이다. 전등을 두고 별의별 별명이 붙었다. 

물을 이용해서 불을 켠다고 해서 ‘물불’, 전기불이 묘하고 괴이하다 해서 ‘묘화(妙火)’ 혹은 ‘괴화(怪火)’, 심지어는 불등이 건들거리면서 자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해서 ‘건달불(乾達火)’이라고까지 했다.

여기에 전기의 운영과 설비·관리를 책임지는 미국인 매케이의 어이없는 죽음이 파국을 불렀다.

에디슨 회사의 총지배인인 프란시스 업튼이 에디슨에게 보낸 조선 전기에 관한 보고서 내용. 경복궁의 전등시설은 동양에서 에디슨 제품의 판촉을 위한 모델 프렌트로 제공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전기박물관 제공


■오발사고로 중단된 전깃불

1887년 3월8일 매케이의 조선인 조수인 백모가 매케이의 권총을 만지다가 오발사고를 낸 것이다. 재수없게 총탄을 맞은 당시 23살에 불과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전기기술자는 끝내 사망한다. 매케이는 조선에 아내와 어린 자녀까지 데리고 와서 살고 있었다. 매케이는 숨을 거두기 직전 “조선인 기수는 고의적으로 쏜 것이 아니니 처벌 받아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오발사고를 낸 조선인은 심한 태형을 맞고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매케이의 유언과 매케이 부인까지 적극 나선 사면 노력 덕분에 사면됐다. 매케이 부부의 사연을 듣고는 깊은 감명을 받은 고종은 장례비용과 함께 500달러의 위로금을 매케이 부인에게 하사했다. 이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자 경복궁 전등소의 운영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경복궁의 첫 전등’은 단명으로 끝났다. 다시 불이 켜진 것은 매케이가 사망한 지 6개월 뒤인 9월1일이었다. 조선 정부가 새로운 전등교사로 영국인 퍼비가와 포사이스를 초청함으로써 재개됐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전등 역사는 매우 상징적이다. 우국지사 황현의 비판처럼 고종이 밤에 일어나는 변란이 무서워 전등불을 도입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깃불이 처음 켜진 바로 그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변을 당했다. 또 만약 고종이 꺼져가는 왕국을 되살리려고 궁궐의 불은 훤히 밝혔다 치자. 그러나 동양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지 불과 23년 만에 조선의 불이 꺼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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