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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 황제 그림 확보하고, 사진속 사진서 광화문 문배도 찾고…국외소재 유물추적자들의 분투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해외에 있는 문화재들을 추적해서 기증 혹은 구입 환수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최근 정조 연간에 오랑캐 황제의 사냥모습을 그린 호렵도’를 구입 환수했고, 설날 연휴에 광화문에 내건 황금갑옷을 입은 장군 그림을 그린 문배도역시 끈질긴 추적 끝에 복원된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끈질긴 추적으로 찾아내거나 복원한 문화유산들이다. 

‘호렵도’의 주인공이다.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옷차림으로 보아 청나라 황제로 짐작된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오랑캐 황제의 사냥그림 

‘호렵도(胡獵圖)’라는 그림이 있다. 문자 그대로 오랑캐(胡)가 사냥(獵)하는 그림이다. 여기서 오랑캐라 함은 청나라(1616~1912)를 뜻하므로, 호렵도는 청나라 황제의 사냥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알다시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대륙을 차지하면서 조선에서는 ‘소중화’의 의식이 팽배해져서 겉으로는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었지만 속으로는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호렵도’ 그림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오랑캐의 사냥’이라는 명칭이 웅변해주듯 이 그림에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인의 증오와 열망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다. 청나라를 ‘되놈’, 즉 오랑캐로 폄훼해왔지만 17~18세기, 즉 강희제(1661~1722)·옹정제(1722~1735)·건륭제(1736~1796)를 거치는 동안 선진문물을 향유하며 융성해가던 청나라를 배우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청나라를 미워하면서도 그런 청나라를 배울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의식이 퍼졌다.

미국에서 구입환수한 ‘호렵도 8폭병풍’. 오랑캐, 즉 청나라 황제의 사냥모습을 그린 정조 시대 그림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북학파’로 꼽히는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중국을 배우자”는 뜻의 ‘학중국(學中國)’ 표현을 20번 이상 반복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즉위한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소중화 타령만 해서는 절대 국운이 융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정조 역시 ‘중국을 배울 수밖에 없다’는 북학파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다.
그 무렵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호렵도’에 바로 청나라를 미워했지만, 그런 청나라를 배울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의식이 숨어있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해 9월 미국 경매를 통해 구입·환수한 ‘호렵도 8폭병풍’을 2월 18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이 호렵도는 비단 바탕의 8폭으로 이루어진 연결병풍(전체 길이 392㎝, 높이 154.7㎝)이다.

자문을 맡은 정병모 경주대 초빙교수는 “산수의 표현과 화면 구성이 탁월하며 인물과 동물의 묘사가 생동감 있고 매우 정교하여 호렵도 중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호렵도’는 본래 청나라 황제가 무란웨이창(목란위장·木蘭圍場)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무란웨이창은 허베이성(하북성·河北省) 청더(승덕·乘德)에 있는 청나라 황제의 사냥터이다.

‘호렵도’ 중 사냥 장면. 활과 당파(창날이 세 갈래로 갈라진 창의 일종) 등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 병풍은 폭포를 시작으로 스산한 가을 분위기의 산수를 숙달된 화원 화가의 필치로 묘사한 제1~2폭과,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을 그린 제3폭,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복식 차림의 청 황제와 다양한 자세의 기마인물들이 등장하는 제4~6폭, 그리고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세갈래 창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냥꾼들이 역동적으로 묘사된 제7~8폭 등으로 구성돼있다.
정병모 교수는 “특히 제5폭 인물의 옷을 확대해보면 곤룡포처럼 가슴과 어깨에 용이 그려져 있는 청색 가죽옷을 입은 모습에서 청나라 황제임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수레(車)를 타고 가는 황제의 여인 행렬이 눈에 띄며, 서양식 입체적인 표현으로 그린 황제 일행도 눈에 띈다. 나발과 동각을 부는 사람들을 비롯해 사냥꾼들의 다양한 모습도 그려져 있다. 마치 풍속화 같다.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을 그린 ‘호렵도’의 제3폭.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렇다면 이번에 구입환수된 ‘호렵도’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청나라 황제는 누구일까. 보도자료에는 특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병모 교수는 “건륭제일 가능성이 짙다”고 추측한다. 근거는 무엇일까. 1780년(정조 14년) 여름 정조는 열하(청더·乘德)에서 열린 건륭제의 칠순잔치(만수절)에 전격적으로 축하 사절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호전된다. 이때 사절단 일원이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이 건륭제의 조카 예왕(豫王) 일행의 사냥 장면을 목격한다. 사절단은 또 강희제의 사냥 장면을 그린 그림이 민간에서 매매되는 것을 보았다. 정병모 교수는 “이번에 구입환수한 ‘호렵도’를 그린 화가는 아마도 당대 청나라 황제(건륭제)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구입환수된 ‘호렵도’는 궁중화원이 김홍도 화풍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물과 옷선의 표현이 김홍도 그림과 약간 다르다.정병모 교수 제공

정조와 건륭제의 연결고리는 또 있다. 정조가 건륭제의 ‘다보격’에 착안해서 ‘책가도’ 병풍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다보격(多寶格)’은 건륭제가 자신의 서재(수방재)에 다양한 고동서화를 진열하고 감상한 여러칸의 진열 공간을 의미한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년) 군왕의 분신이자 상징이라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책가도’ 병풍을 제작·설치했다. ‘책가도’는 책장에 서책을 중심으로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는 ‘책가도’ 병풍을 내걸면서 “앞으로 책과 학문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천명했다. 정병모 교수는 “정조가 북학 정책으로 ‘문(文·책가도)과 무(武·호렵도)’의 측면에서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또 ‘호렵도’를 처음 그린 화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는 김홍도(1745-1806?)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홍도의 작품은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호렵도 병풍은 민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번에 돌아온 호렵도는 웅장한 산수 표현과 정교한 인물표현 등에서 수준 높은 궁중화풍, 즉 김홍도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인물 옷선의 표현이 김홍도 그림과는 약간 다르다. 얼굴과 꼬리는 표범인데, 몸은 호랑이로 표현한 민화의 요소도 담겨있다. 정병모 교수는 “구입환수된 ‘호렵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 가운데 가장 예술적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호렵도’는 2월 18일부터 박물관 내 궁중서화실에서 공개됐다.

 

■사진 속 사진의 비밀

“황금 갑옷의 두 장군의 길이가 한 길이 넘는데, 하나는 도끼를 들었고, 하나는 절을 들었다. 그것을 궁문의 양쪽에 붙인다. 이것을 문배(門排)라고 한다.”(<경도잡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또 1881~82년(고종 18~19년) 무렵 경복궁 대문인 광화문에 붙였던 ‘황금 갑옷 장군(금갑장군) 문배도’를 찍은 사진을 미국에서 발굴했다. 140년 전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내부를 찍은 사진 속 사진을 단서로 끈질기에 추적한 결과 찾아낸 것이다. 이 문배도는 설날 공휴일인 2월 11일부터 14일까지 경복궁 광화문에 ‘금갑장군’을 그린 문배도를 붙였다. 정병모 경주대교수에 따르면 문배(門排)는 정월 초하루 궁궐 정문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의미로 그림을 붙이는 풍속을 말한다. 처용, 호랑이, 용, 닭과 함께 금갑장군 등이 문배도의 주제였다. 도화서에서 제작된 문배도 그리는 풍속은 조선 후기 이후 민간으로도 퍼져나갔다.

미국 헌팅턴 도서관이 소장한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사진(1893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측은 이 사진을 토대로 대한제국공사관을 복원한 뒤 그 사진 속에서 보인 ‘광화문 사진’을 추적한 결과 ‘금갑장군 문배도’를 찾았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이 문배 관련 기록은 조선 시대 문헌 자료인 <열양세시기>, <동국세시기>와, 조선 후기 행정법규와 관례 등을 정리한 <육전조례>에도 수록돼 있다.
<열양세시기>는 “도화서에서 그린 세화(歲畵) 중 금갑신장(金甲神將)을 그린 것은 궁전 대문에 붙인다”고 했다. <동국세시기>는 “도화서가…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바치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는다.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또 한 장군은 절을 들었는데, 이 그림을 모두 대궐문 양쪽에도 붙인다”고 설명했다. <육전조례> ‘예조 도화서조’와 ‘진상조’는 “문배(門排)와 양재(禳災)는 장무관과 실관 30명을 돌아가며 임명하여 각 전·궁의 진상 및 각 문에 받칠 문배는 모든 화원(화가)에게 분배하여 12월 그믐에 봉진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해놓았다. 하지만 그 도상의 실체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893년 당시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실내를 찍은 사진 중 1층에 걸려있던 ‘광화문’ 사진의 원본 사진을 찾았고, 1년여만에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문제의 원본사진을 결국 찾았다. 광화문 사진을 확대하자 문배도가 어렴풋 보였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그 단서를 찾게 된다. 즉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3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미국 워싱턴 D.C. 소재) 복원·재현 사업을 벌인다. 그 때 미국 캘리포니아 산 마리노의 헌팅턴도서관이 소장한 ‘1893년판 공사관 사진’을 참고하게 된다.
그런데 평소 광화문에 관심이 많았던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활용부장은 ‘공사관 1층 사무실 문 옆에 걸어둔 태극기 위의 광화문 사진’을 주목했다. 강임산 부장은 1년여 간 그 광화문 사진의 원본 사진을 찾아 다녔다. 워낙 해상도가 좋은 사진이어서 140년 전의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강 부장은 마침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원본 사진을 찾아냈고, 워낙 해상도가 좋은 원본 사진을 확대해본 결과 ‘문배도’를 찾아냈다. 하지만 완전한 복원·재현에는 무리가 있었다. ‘문배도’의 일부 도상만 확인가능했다. 강임산 부장은 “이후 자문회의를 거쳐 도상과 의장기물의 표현에서 왕실과의 연계성이 보이며 유일하게 완형이 남아 있는 안동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 본가 소장 유물을 바탕으로 복원했다”고 밝혔다. 복원한 문배도는 길이 3m에 달한다.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인 2월14일 서울 경복궁 광화문에 걸린 ‘문배도’(門排圖)에 그려진 황금빛 갑옷을 입은 ‘금갑장군’이 코로나19를 내쫓고 있는 듯한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다. 정월 초하루에 나뿐 기운을 몰아내고 복을 기원하며 궁궐 정문에 붙였던 그림 문배도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찾아낸 1882년경 촬영된 광화문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됐다.이준헌기자

김윤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문배도의 형상을 유추할 수 있는 그림으로 ‘담와평생도’(전 김홍도작·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평안감사환영도’(작자미상·미국 피바디엑세스박물관 소장)가 있다”며 “그러나 두 그림 모두 본격적인 기록화로 보기에는 부족하여 참고자료로만 이용돼 왔다”고 전했다. 김윤정 학예연구관은 “따라서 이번 발굴로 사진 및 참고자료로만 전하던 문배그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자료의 상태가 좋아 도상, 크기, 붙인 모습까지 유추가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이번 광화문 ‘문배도’ 부착은 연초 액과 나쁜 기운을 쫓는다는 조선시대 세시풍속에서 착안해 코로나19로 지친 시민을 위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래 문배도는 종이로 제작하여 문에 직접 붙여야 한다. 박하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사무관은 “그러나 직접 부탁한 뒤 제거할 때 광화문 훼손이 우려되므로 탈·부착이 편리한 현수막 형태로 부착했다"고 설명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