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1888년 흑단령에 갓쓴 조선외교관들…워싱턴 정가 발칵 뒤집어놓았다.

얼마 전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의 서거 95주기(3월29일)를 맞아 색다른 자료가 공개됐는데요.
선생이 한성감옥에 투옥(1902년)된 뒤 감옥 도서실의 대출내역을 정리한 장부(<한성감옥 도서대출대장>)입니다. 선생의 가문이 올 초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자료인데요. 대출대장에는 선생 뿐 아니라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약할 이승만(1875~1965), 정순만(1873~1928), 박용만(1881~1928), 이준(1859~1907), 이종일(1858~1925), 이동녕(1869~1940) 선생 등의 이름도 보인답니다. 

1883년 9월 18일 워싱턴을 방문한 보빙사가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재임 1881~1885)에게 큰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왼쪽 사진). 1888년 1월17일 워싱턴 상주를 위해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재임 1885~1889, 1893~1897)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려고 백악관을 찾은 초대주미공사 일행의 모습(오른쪽 사진).

■“저 여인들은 기생들이냐.”
이상재 선생 자료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5)을 모시고 워싱턴 외교무대를 개척한 분입니다. 조선의 초창기 대미외교를 상징해주는 몇가지 에피스도가 있죠.
첫번째는 1883년 조미 수교 1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1860~1914) 등 보빙사(조선 사절단)가 당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재임 1881~1885)에게 큰 절을 올리는 장면이구요. 두번째부터 이상재 선생과 관련이 있는 에피소드죠. 
바로 서구열강 중 처음 개설된 주미공사관원들의 워싱턴 데뷔기(1888년 1월)입니다. 초대 공사는 박정양이구요. 이상재 선생(서기관)은 참찬관 이완용(1859~1926), 서기관 이하영(1858~1919), 번역관 이채연(1861~1900), 미국인 의사 출신인 참찬관 호러스 알렌(1858~1932) 등과 함께 파견되었습니다. 

1888년 1월 17일 박정양 공사 일행이 미국의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재임 1885~1889, 1893~1897)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데요. 이 때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일행은 관복인 흑단령을 입고 백악관 접견길에서 대통령을 기다립니다. 잠시 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집무실을 나와 신임장을 받으려고 접견실 중앙에 섰는데요. 공사 일행은 멀뚱멀뚱 서있었습니다. 
그럴만도 했습니다. 일행은 조선 국왕의 곤룡포 같은 특별한 관복을 입었을 대통령을 기다린 거죠. 대통령이 다른 관리들처럼 양복을 입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양복을 입은 이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일행이 황급히 큰 절을 올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측에서 “그럴 필요 없다”고 정중히 만류합니다. 5년 전 보빙사의 해프닝을 미국측에서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박정양 등 조선 외교관들은 워싱턴 정가의 파티장에 모인 여성들을 보고 “저 여인들은 기생들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호러스 알렌은 “저 여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부인들이자 딸들”이라고 손사래쳤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업무를 시작한 초대 공사일행은 워싱턴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답니다.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내는 풍성한 도포자락과 말총으로 만든 모자(갓)을 쓴 조선외교관들의 모습’(<하퍼스위클리> 1888년 1월28일자)이 화제를 뿌렸습니다. 
워싱턴 사교계 데뷔기도 흥밋거리입니다. 박정양 공사가 파티에 모인 여인들을 보고 “저 여인들은 기생들이냐”고 물었답니다. 수행한 알렌이 큰일날 소리라는 듯 “저 여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부인들이자 딸들”이라고 손사래쳤다는군요. 그런 낯선 환경 속에서도 공사 일행은 우아하고 평온한 미소와 함께 사뿐사뿐 걸었답니다.(<하퍼스 위클리>)
그러나 박정양 공사는 1888년 2월 7일 열린 미국 법무부장관의 연회를 두고 ‘아찔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술과 안주가 낭자하고…. 남녀가 서로 껴안고 춤추고 심지어 저고리를 벗어 맨살을 드러내고…속적삼을 뚫고 머리를 산발하고 가발을 뒤로 늘어뜨리고…. 어지럽고 아찔하다.”(<미행일기>)

1882년 맺은 서구열강 가운데 처음으로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는 ‘제3국이 한쪽 정부에게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이른바 ’거중조정’ 조항이다. 고종은 ‘미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대인배의 나라’라고 호감을 표하고 미국의 중재자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청나라의 허락 속에 미 대통령을 만나야 했지만…
그러나 이런 애로는 양념에 불과했습니다. 이상재 선생 가문이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를 볼까요. 
선생이 10개월동안(1888년1~11월) 주미공사관 서기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작성한 업무편람(<미국공사왕복수록(隨錄)>)과,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모음집(<미국서간>) 등입니다. 
이 문건 등을 보면 초대 주미공사관의 첫번째 임무는 바로 ‘영약삼단’(령約三端)’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영약삼단’은 ‘별도의 약속’을 뜻하는 ‘영약’(령約)과 ‘세가지 조건’(三端)을 합한 말입니다. 그 세가지 조건을 볼까요.
“첫째 조선 사절이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중국공사관으로 가서 보고한다. 둘째 모든 행사에는 늘 중국 사신의 뒤를 따른다. 셋째 중요 교섭 내용은 먼저 은밀하게 중국 공관의 지침을 받는다.”

고종은 미국에 상주 공관을 두기로 결정하자 청나라는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니 사절을 파견하려면 종주국의 인준을 받아아 한다”고 고집했다가 미국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청나라가 마지못해 내건 허락의 조건이’ 영약삼단(령約三端)’이었다. ‘영약삼단’은 1)조선 공사가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중국공관에 보고하고, 2)모든 행가에는 늘 중국 사신의 뒤를 따를 것이며, 3)주요 현안은 먼저 중국 공관의 지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입니까. 해외 주재 조선 외교관이 청국 공사의 허락을 받아야 외교활동을 벌일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주권국의 외교관에게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조건이 붙었단 말입니까.
기막힌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은 서구열강 가운데 가장 먼저 외교관계를 맺은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로 여겼답니다. 1882년 체결한 조·미 통상조약의 제1조를 볼까요. 
“제3국이 한쪽 정부에게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
‘거중조정’ 조항이라 하는데요. 고종은 그런 미국의 중재자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워싱턴에 해외상주공사관을 두겠다고 한 겁니다.(1887년) 그러나 곧 난관에 봉착합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1823~1901)이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1859~1916)를 통해 반대 입장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청국의 속방인 조선이 각국에 사절을 파견하려면 먼저 (종주국인) 중국의 인준 받아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런 조건을 받아들였겠습니까. 공관 설립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었죠. 
그때 청나라가 마지못해 내건 허락의 조건이 바로 ‘영약삼단’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1888년 1월 워싱턴에 도착한 박정양·이상재 등 초대 주미공사 일행은 처음부터 이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문건 중에 ‘송미국외부조회(送美國外部照會)’(1888년 1월10일)가 주목을 끕니다.
즉 초대 주미공사관이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청국공사 장음환(張蔭桓·1837~1900)을 찾아보지 않은채 “토마스 베이야드(1828~1898) 미국 국무장관을 방문하겠다”고 국무부에 보낸 문서입니다. 이때 실무교섭을 담당한 알렌은 미국측과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얼토당토 않은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군요. 

■‘주권국의 자존심을 지키다’
박정양 공사 일행은 마침내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통령 면담일정을 조율한 뒤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접견하고 신임장을 제출(17일)한 겁니다. 박정양 공사는 고종에게 전보를 보내 “불가피하게 영약삼단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청국공사 장음환은 “영약삼단을 왜 지키지 않았느냐”고 앙앙불락합니다.
이때 박정양 공사는 “급히 출발하느라 청나라가 보낸 전보를 전달받지 못했다”면서 “우리 정부의 정식 공문을 받지 못했는데 어찌하느냐”고 둘러댔습니다. 정식공문을 받지못했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이상재 선생의 편지에는 초대 주미조선공사 직원들이 박봉에다 워싱턴의 높은 물가까지 이중고에 시달린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청나라 측은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미공사일행은 워싱턴의 일명 ‘피셔옥(皮瑞屋·Fisher House)’을 임대하여 공사관으로 썼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공관 건물 맨꼭대기 층의 전면에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다”(<별건곤> 1926년)고 회고했습니다. 워싱턴에 태극기를 꽂은 첫번째 기록입니다. 그러나 조선 외교관들의 행보는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청나라가 끈질기게 ‘영약삼단’ 문제를 거론하면서 주미공사관을 물론 본국 정부까지 괴롭혔습니다. 이상재 선생이 주고받은 편지(38통)에 조선 외교관들의 분투가 녹아있습니다.

“중국공사가 예절(영약삼단) 문제로 매번 트집을 잡아 정말 소위 진퇴유곡의 처지이다.”(1888년 2월12일) 
“중국 공사가 양보하지 않고 고집부리는(相持) 것이 가장 참기 어렵다. 그러나 서로 부딪치면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곤란을 당할까 두렵다. 그렇다고 명령을 들으면 외양의 기품을 면하기 어렵다. 중도를 취하기 어렵다.”(1888년 3월 2일)
“중국 공사는 매번 우리나라 공사의 위에 서고자 하고, 우리 공사 역시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한다…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공사(30여 개국)은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다. 그러나 각국 공사와 서로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다.”(1888년 5월 23일) 

미국 회사의 경인선 철도부설 계획 초안을 두고 호러스 알렌은 “이 약정에 따르면 조선정부는 돈 한푼 내지 않고도 서울을 선진국 도시처럼 번화하게 될 것”이라고 긍정평가했다. 그러나 박정양 공사는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준다 해서 미국이 조선을 보호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보고하면서 무산된다.

■‘구악 청나라와 신악 미국’
낯선 환경과 부족한 예산도 걸림돌이었습니다. “우리 돈 10이 100금인즉 연봉 1000원으로는 역부족인데 어떻게 지내야 할 지 모르겠다”(1888년 1월20일)고 했고, “아침·저녁을 쌀과 고기를 사서 관내에서 밥을 지어먹는데 물가가 너무 높다”(1888년 2월12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외교관들은 조선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이상재 선생의 소장 문건 중에 1888년 11월13일 미국인 ‘딸능돈(달링턴 혹은 탈링턴)’ 등이 설립한 회사가 ‘철도(경인선) 설치’를 제안한 문건과 계약서 초안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경성~제물포 노선 철도’를 건설하는 계약기간은 15년이며, 15년 후 재약정 여부를 가린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호러스 알렌은 “이 규약의 초안은 매우 좋다. 정부는 돈 한푼 내지 않지만 이 약정에 따라 시행하면 서울은 선진국 도시처럼 번화해질 것”이라고 긍정평가했는데요. 그러나 박정양 공사는 “철도부설권을 미국에 준다 해서 미국이 조선을 보호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보고하면서 무산되고 맙니다.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은 미국은 막상 조선에서 얻어 갈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83년 초대 주한공사로 파견된 루시우스 푸트는 “조선에서 수출가능한 물품은 소가죽과 쌀, 사람 머리털, 전복껍데기 뿐”이라는 보고서를 본국에 제출한다.

박정양 공사는 청나라의 끈질긴 경질압력 때문에 부임 10개월 남짓만에 경질되고 맙니다. “병환 중인 박정양이 귀국하므로 서기관 이하영을 대리공사로 임명한다”고 미국 정부에 통보한 문건(1888년 11월 16일)이 보입니다. 
박정양 공사와 이상재 선생 등이 귀국하게 되죠.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말도 통하지 않은 외교무대에서 그래도 기죽지 않고 고개를 세우려 했던 조선 외교관의 분투를 엿볼 수 있었죠. ‘영약삼단’이라는 해괴한 조건을 내세워 괴롭힌 청나라의 방해를 뚫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미국은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미’(美)자 미국이었을까요.  
서구열강 중 첫번째로 국교를 수립했고, 서구열강 중 처음으로 주재공사관을 두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수호조약 1조의 조항에서 약속했듯이 미국의 거중조정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훗날 밝혀지죠.
미국은 그저 조선을 문호개방을 통해 이익만 챙겨가면 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호조약를 맺고보니 ‘조선에서 수출가능한 물품은 소가죽과 쌀, 사람 머리털, 전복껍데기 뿐”(루시어스 푸트 초대 주한 미국공사의 보고서)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결국 1905년 7월 조선의 일본 지배권과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미국-일본간 맺게 되죠. 미국은 을사늑약 후(1905년 11월17일)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가가 됐습니다. 특사 자격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밝힌 고종의 친서를 들고 미국을 방문한 호머 헐버트(1863~1949)라는 분 있죠. 그러나 미국정부로부터 홀대만 받았죠. 
헐버트는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라고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얼토당토 않은 영약삼단의 조건을 내건 청나라나, 을사늑약 후 가장 먼저 배신한 미국이나…. 
외교란 자국의 이익만 챙기면 그 뿐이었죠. 청나라가 ‘구악’이었다면 미국은 그저 ‘신악’이었을 뿐입니다. 국제정세는 예나 지금이나 냉혹할 뿐이죠. 철도부설권의 양도를 두고 “미국이 조선을 보호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박정양 공사의 한마디가 떠오르네요. “가장 약소국이지만 그러나 각국 공사와 서로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을 욕보이는 것”이라 파이팅을 외친 이상재 선생의 다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이 기사를 위해 독립기념관의 진주완·고다현 선생이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또 2019년 한철호 동국대 교수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외교자료 소개-월남 이상재 선생 소장자료> 등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또 유춘동 강원대 교수의 논문(‘한성감옥서의 옥중도서대출부(獄中圖書貸出簿)’, <서지학보> 40호, 한국서지학회, 2012)도 도움이 됐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