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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세종시대 장애인 시위사건의 전말

지금 대한민국 한복판 광화문 광장 지하도에 가면 4년 넘게 이어진 농성장이 있습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등의 철폐를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농성입니다. 장애인들은 온갖 참지못할 야유를 들어가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그래서 제가 역사서를 들춰봤습니다. 왕조시대 조정의 장애인 정책은 어땠는지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2000년 전부터 장애인은 물론 환과고독이라 해서 홀아비와 홀어미, 독거노인, 고아 등 취약계층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신라 유리왕 때였다니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유리왕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의 모든 책임이 바로 임금에게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임금들도 한결같았습니다.그렇다면 조선의 장애인 정책은 어땠을까요. 역시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합니다. 세종 때 벌어진 장애인 시위사건에 대처하는 임금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7회는 '세종시대 장애인 시위사건의 전말'입니다.

“전하, 배고파 도저히 살 수가 없사옵나이다.”
1419년(세종 1년), 사냥을 참관한 뒤 발길을 돌린 임금의 어가가 개성의 영빈관에 이르렀다.

그 틈에 소동이 일어났다. 시각장애인(맹인·盲人) 114명이 어가 앞을 막아선 것이다. <세종실록>은 “맹인들이 어가 앞에서 궁핍함을 호소했다(告窮乏于駕前)”고 기록했다. 감히 국왕의 행차를 막아서다니….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대통령의 전용차를 막고 불법으로 집단행동을 벌인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다. <실록>의 표현은 담담하기만 하다.

“상(임금)은 그들의 호소를 듣고 유후사에 명하여 쌀 40석을 주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린아이의 안내를 받아 길을 가고 있다. 시각장애인용 장죽을 잡았다.  (김준근의 <풍속도>에서) |숭실대박물관

■어가를 막아선 장애인들
이들은 ‘특별 케이스’였을까. 아니었다. 3년 뒤인 1422년 11월, 서울에 사는 시각장애 여자 26명이 집단으로 북을 치며 호소한다.

“우리가 일찍이 환상(還上·관청에서 곡식을 빌린 뒤 가을에 갚는 제도)을 받았사옵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해서 현물(곡식)로 갚을 수 없으니 저화(楮貨)로 대신 갚으려 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저화는 여말선초 때 발행된 지폐였다. 하지만 실질가치를 중요시하는 시중에서 신뢰를 받지 못해 저화의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시각장애 여성들은 도저히 현물(곡식)로는 갚을 수 없으니 관청조차 받기 싫어하는 저화로나마 갚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그러자 세종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쿨’하게 명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순행 중 맹인 20여 명이 어가 앞에서 궁핍함을 호소하자 쌀을 각각 1섬씩 하사한 일이 있었다.(1415년)

■신라 유리이사금의 복지정책
사실 장애인을 비롯,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복지정책의 뿌리는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28년 11월, 신라의 3대왕인 유리 이사금 때의 일이다. 임금은 거리에서 굶주림에 지친 한 할머니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백성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곧 나의 죄다.”
유리 이사금은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먹을거리를 준 뒤 추상같은 영을 내렸다.

“환(鰥·홀아비), 과(寡·홀어미), 고(孤·고아), 독(獨·홀몸노인) 등과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부양하게 하라.”(<삼국사기> ‘신라본기·유리이사금조’)

유리 이사금의 복지정책에 감화된 이웃나라 백성들까지 신라로 몰려왔다. 덕분에 신라의 풍속은 즐겁고 편안했으며, 가악(歌樂)의 시초인 ‘도솔가(兜率歌)’가 퍼졌다. ‘도솔가’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가히 요순 시대의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를 연상시켰으리라.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가 국왕의 복지정책의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그것도 2000년 전에….
이같은 정책은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시스템으로 진화한다. 

■“장애인을 먼저 돌보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린다.”
“환과고독과 잔질(殘疾·장애인)은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에게 환곡(식량을 빌려줌)을 우선 베풀고, 거처할 집을 잃게 해서는 안된다.”(세종 즉위년·1418년)

세종대왕은 즉위하자 마자 중앙과 지방의 신료들에게 추상같은 엄명을 내렸다.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421년 2월, 잇단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장애인과 병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라”는 명을 내린 뒤 으름장을 놓는다. ‘확인 감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과인이 장차 감찰관을 파견해서 반드시 확인할 것이다. 만약 여염 가운데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면 해당 수령들을 중죄로 처단할 것이다.”

1528년(중종 23년)에는 서울·경기 지역의 80세 이상된 노인들을 모두 초청하는 대대적인 노인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80세 이상의 맹인들만 초청해서 예조의 안뜰에서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중종 임금은 “맹인들은 그 자제들이 부축하고 다른 노인들도 모두 오라해서 대궐의 뜰에서 대접하라”는 명을 내렸다. 맹인잔치가 노인잔치로 확대된 것이었다.  

조선시대 시각장애인들은 주로 점복을 주업으로 삼았다. 신령을 위한 제삿상 앞에서 시각장애인 판수(判數)가 오른손으로 북을 두드리고 왼손으로 바닥에 잇는 꽹과리를 쳐 가면서 경(經)을 읊고 있다.|숭실대 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무한돌봄 서비스’
조선의 장애인 정책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우선 시각장애인들을 구휼하기 위한 국가기관인 ‘명통시(明通寺)’를 설립했다.

시각장애인들의 먹고 살 길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마련해준 것이다. 명통시 소속 시각장애인들은 독경이나 점복으로 살았고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제를 관장하기도 했다.

조정은 정기적으로 쌀과 콩을 하사했으며, 때때로 노비는 물론 건물까지 내려주는 특전을 베풀었다.

시각장애인들 뿐 아니라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관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457년 세조임금은 각종 장애인 대책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한다.

“잔질(장애인)과 독질(난치병 환자)로서 의지할 곳 없는 자와 맹인들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를 설립했지 않은가. 농아(聾啞)와 건벽(지체장애인)들은 한성부(서울시)가 돌봐줄 ‘도우미(保授)’를 널리 찾고, 동서 활인원이 맡아 후하게 구휼해야 한다. 또한 계절마다 부양한 결과를 계문(보고)해야 한다.”

분기마다 농아와 지체장애인들의 구휼 결과를 보고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철두철미한 ‘무한돌봄 서비스’인가.

■척추장애인 정승 
<실록> 등을 읽어보면 별다른 편견없이 출세한 장애인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조선초기의 명재상인 문경공 허조(1369~1439년)가 대표적이다. 허조는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肩背구루)’ 척추장애인이었다.(서거정의 <필원잡기> ‘대동야승 1’)

태조 이성계는 조선개국과 함께 허조를 등용, 조선의 예법을 만들고 석전의식을 개정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이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런 일화가 있다.

태종은 이조정랑 자리가 비었지만 좀체 적임자를 찾지못했다. 이조정랑은 이조에 속한 ‘정5품’ 관직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핵심적인 자리였기에 재량권이 막강했다.

그랬으니 아무에게나 이 자리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관원의 명부를 들춰보며 고심하던 태종의 눈이 번쩍 띄었다. ‘허조’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태종은 이 때 “사람을 얻었다(得人矣)”면서 무릎을 탁 쳤다.

태종은 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특별히 허조를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손으로 어깨를 짚고 세종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상. 이 사람이 나의 주석(柱石)이요.”

‘주석’은 ‘주석지신(柱石之臣)’의 준말로, ‘나라를 받치는 중추적인 신하’를 뜻한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허조의 졸기(卒記·부음기사)를 보면 허조의 ‘대쪽성품과 공평무사’ 등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1439년 12월28일) 허조의 장애를 염두에 둔 내용은 단 한줄도 없다. 그를 기용했던 임금들이나 동료들이 모두 편견없이 그의 능력과 성품 만을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79번 사의표명 끝에 겨우 사퇴한 일각정승 
지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우의정 윤지완(1635~1718년)의 일화도 유명하다.

<숙종실록>은 “윤지완이 정승이 된지 오래되지 않아 이상한 병을 얻어 한쪽다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기록했다. 세인들은 그를 두고 ‘다리가 하나 뿐인 정승’이라 해서 ‘일각상(一脚相)’이라 했다.

<실록>을 뜯어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윤지완은 ‘칭병’하면서 끈질기게 사직을 청하고, 숙종 역시 끈질기게 사표를 반려하는 일이 반복된다.

“다리의 병이 이미 심해서 대궐의 섬돌을 오르내리며 출입하기 어렵사옵니다. 강등시켜 면직시켜 주소서.”(윤지완)

“출입 때 부축을 받아도 좋다고 허락했거늘 어찌 사양하는가?”(숙종)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분부를 받잡겠사옵니다.”(윤지완)

“부축을 받고 출입하는 것은 이미 고사(故事)에도 있다. 경은 내일 아침에 나오도록 하라.”(숙종)

그러나 윤지완은 이후 무려 79차례나 사의를 표명했고, 임금은 할 수 없이 면직을 허락했다.(<숙종실록>) ‘사의표명-반려’의 과정이 무려 79차례라니….

당시 <실록>은 ‘24차례 인퇴 요청’, ‘67차례 인책 요청’ 등의 제목으로 윤지완의 사직상소와 숙종임금의 반려소식을 생중계하고 있다.

또 면직 이듬해인 1695년 <실록>을 보면 숙종은 도승지를 보내 다시 한 번 “복직하라”고 청했다. 그러나 윤지완은 역시 병을 칭하며 ‘거절’했다. 참으로 대단한 군신관계가 아닐 수 없다. 

다리 한쪽을 잃은 윤지완의 편지. 아내와 맏며느리 등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은 뒤 장례식에 조문온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스스로 여러해 동안 폐질(장애)을 앓았음을 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각장애인을 외교특사로?
영조 때 도승지인 이덕수(1673~1744년)는 1734년 7월 “중청(重廳·귀가 어두워 들리지 않은 증세) 때문에 사직한다”는 청을 올렸지만 거절당했다.

영조 임금은 옆 사람을 시켜 큰 소리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그 모습이 연출될 때마다 사람들은 목소(目笑), 즉 눈웃음을 지었다고 한다.(<영조실록>)

그럼에도 영조 임금의 신임은 두터웠다. 1738년, 영조는 청나라로 파견할 외교특사(동지정사)로 이덕수를 선임했다. 그러자 사헌부는 반대의 뜻을 임금에게 전했다.

“물론 이덕수의 문학과 지조는 당대 최고입니다. 하나, 외교사절은 좀…. 적임이 아닐 듯 합니다. 돌발적인 발언이 튀어나오면 어쩝니까. 염려스러우니 바꾸심이….”

그러자 영조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중국어에 관해서는 모두 귀머거리 아닌가. 어찌 이것이 병폐가 될 것인가? 다만 사헌부가 반대의 뜻을 밝혔다면 이덕수 또한 고사할 테니 아뢴대로 하라.”

중국어에 관한 한 누구나 까막눈일텐데 이덕수의 귀가 어둡기로서니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다. 물론 대간들의 상소에 따라 이덕수의 특사파견은 취소됐다. 그러나 청각장애에 어떤 선입견도 없었다는 것을 이 일화는 전하고 있다.

■“세상에 버릴 사람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록>에서 장애인 관료들의 신체결함과 업무능력을 언급하는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보아도 선진적인 사고로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을 바라본 이들이 많다.

“시각장애인은 남을 가르칠 수 있다. 눈동자로 보는 것은 막혔지만 신기(神氣)로 보는 것이 있어서 빛깔을 밝게 듣는다. 남의 언어를 잘 들어 생각함이 상당히 넓고 사물의 형체로 상상한다.”(<인정(人政)> 제8권 ‘교인문’)

조선 후기 철학자 최한기(1803~1877년)의 말이다. 그는 한술 더떠 “(시각장애인은) 때론 눈은 있지만 마음이 어두운 사람보다 더 나은 경우가 있다”고 주장했다.

1431년, 조선의 궁중음악을 정비한 박연(1378~1458년)이 세종대왕에게 간한다. “당시 관습도감(궁중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에 시각장애인들을 발탁해야 한다”며 시각장애인들의 장점을 주장한 것이다.

“그들은 눈이 없어도 소리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以其無目而審於音 且以天下無棄人也)”

지금 광화문 지하도에 가보면 4년 넘게 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애인들을 볼 수 있다. ‘장애인등급제와 의무부양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국왕의 어가를 가로막고 당당하게 할 말을 하고, 그 말을 또 ‘쿨’하게 들어준 조선시대보다 못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참고자료:정창권의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2011년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