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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무즙파 vs 창칼파, '엿먹인 '중학입시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찹쌀 1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이 밥을 물 3ℓ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4.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5.짜 낸 국물을 조린다.
 (문제 18)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디아스타제 ②무우즙 3)4)…. 

1964년 12월7일 치른 서울시내 전기 중학교 입시 자연 18번 문제. 엿을 만들 때 엿기름대신 넣어도 되는 것을 묻고 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지만 무즙도 맞는 것으로 처리돼 이른바 무즙파동이 일었다.|경향신문 자료

■무즙이냐 디아스타제냐
 1964년 12월7일 치른 서울시 전기중학 공동출제 입시문제 가운데 ‘자연 18번’이다. 이 문제는 요컨대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이 문항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이야. 문제의 원래 정답은 ①디아스타제였다. 디아스타제는 녹말을 분해해서 포도당으로 바꾸는 이른바 당화효소다. 동물체의 간과 침 등에도 포함돼있다.
 그런데 논란이 일어났다. ②무즙(무우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에도 디아스타제가 함유돼있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었다. 중요한 것은 국민학교 ‘자연교과서 6-2’에 “침이나 무즙에도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정말 논란이 일으킬 수 있는 문제였다. 사실 엿을 만드는데 어느 누가 무즙을 넣겠는가. 문제의 의도는 만약 엿기름이 없을 때는 시중에 판매되는 상품인 ‘디아스타제’ 추출물을 구입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코흘리개 국민학생들이 시판 디아스타제 추출물을 알기나 했을까.
 그러니 엿기름 대용으로 엿기름 속 효소인 디아스타제를 고른 학생도, 디아스타제 성분을 함유한 무즙을 선택한 학생도 맞았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엿먹어봐라!”
 경기·서울·경복중 등 세칭 일류중학교를 중심으로 한 일선학교와 문교부 등 교육당국이 갈팡질팡했다.
 문교부가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발표하자, 이른바 ‘무즙파’ 학부모들이 아우성 쳤다. 일류중 진학을 일류고-일류대 진학의 첩경으로 여겼던 학부모들은 사생결단했다,
 ‘무즙파’ 학부모들은 “수험생의 70%가 무즙을 정답으로 써서 1점을 잃게 됨으로써 불합격했다”며 서울시교육위원회로 달려가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특히 ‘무즙’으로 만든 엿을 솥에 담아와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무汁 엿 먹어보라’는 신문의 제목(동아일보 64년 12월22일)으로 ‘엿먹으라’는 우스갯소리가 새삼 회자되기도 했다.
 이 논란은 ‘무즙파’ 학부모들 일부가 ‘입학시험 합격자 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이른바 희대의 ‘무즙재판’이 벌여지게 됐다. 재판도 코미디였다.
 서울 고법특별부는 원고들이 내놓은 ‘무즙으로 만든 엿’, 즉 무즙엿이 실제로 가능한 지 학술원 등 전문기관에 실험을 의뢰했다. 그 결과 ‘무즙으로는 엿을 고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교과서에 수록된 ‘엿’의 정의가 모호하고 일부 수련장 등에도 ‘무즙’으로 혼동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무즙파’ 학부모들도 ‘무즙엿’을 국회의장 집에까지 들고가 시위를 벌이는 등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1965년 3월30일, 서울고법은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한다’며 원고승소판결을 내림으로써 ‘무즙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법은 판결문에서 “18번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때 엿을 만드는 당화작용에 대한 문제로 해석된다”며 “따라서 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즉 교사용 교과내용으로 보면 엿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1)엿기름, 2)상품화된 디아스타제, 3)산(酸)으로 만들어 중화시키는 방법 등인데, 2)디아스타제가 포함된 ‘무즙’도 당연히 정답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로 승소한 38명의 ‘무즙파’ 학생들에게 구제의 길이 열렸다. 승소한 학생 가운데 경기중에 30명, 서울중에 4명, 경복중에 3명, 경기여중에 1명 등이 추가입학하게 됐다.   

무즙으로 만들었다는 엿을 담은 솥단지를 서울시교위로 들고와 시위를 버리고 있는 ‘무즙파’ 학부모들.

■실명과 이니셜 줄줄이
 그런데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핵폭탄이 터졌다. ‘무즙파’ 학생들이 ‘사고처리’의 형식으로 전입학하는 어수선한 과정을 틈타 경기중 6명, 경복중 15명 등 모두 21명의 특권층 자녀들이 ‘덤’으로 부정입학 해버린 것이다. 무슨 내막인가. 경향신문 1965년 5월27일자를 보자.  
 “이번 뒷문 입학의 근원은…지난 봄 새학년이 시작되자 일류중에 못들어간 학부형들이 아우성치자 문교당국이 이들을 조금이라도 구제해주기 위해서인지(?) 교육법 시행령을 뜯어고쳐 학급당 60명 정원을 64명으로 늘릴 수 있는 법적 조치를 취한 것…. 그러나 경복·경기 등 몇 개 학교는 일부러 64명 모두를 채우지 않고 있다가….”
 그러니까 새학기부터 늘어난 정원을 일부러 채우지 않고 있다가 ‘무즙파’의 구제라는 어수선한 상황을 틈타 일부 특권층의 뒷문입학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성난 여론의 파도가 일었다. 특히 ‘덤입학’ ‘뒷문입학’한 특권층 가운데 청와대 비서관과 국회관계자, 재벌, 또는 국영기업체 임원의 자제들이 포함돼 있어 공분을 샀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몇몇 특권층의 실명과 이니셜이 줄줄이 나온다. 특히 이 와중에서 경기고에서도 부유층 자제 3명이 부정입학한 것이 추가로 드러남으로써 사태가 더욱 확산됐다.
 이 사건으로 당시 김원규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해 한상봉 문교차관을 비롯해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공보비서관 등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이 사건은 ’무즙파동’, ’덤입학’ ‘교육망국’ 등의 신조어를 줄줄이 낳았을 정도로 파란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고관감투 벗긴 끈덕진 무즙’이었던 것이다. 당시 64년 당시 국민학생 6학년을 보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슴 아픈 사연이다.   

1965년 또한번 논란을 일으킨 중학교 입시 국어문제. 국어학자들도 풀기애매한 문제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번 풀어보시기 바란다. |경향신문 자료

■‘늘어놓기’와 ‘이히’ 논란
 12살 어린 학생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시험의 추억’은 끊이지 않았다.
 무즙 파동의 기억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 1965년 12월, 경기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학부모 30여 명이 다시 시교위 사무실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국어 (1) ‘늘어놓기’ 문제와 (5)의 ‘이히’ 문제였다.       
 (문제 1) 느낌이 약한 것부터 늘어놓여진 것은 어느 것인가.
 ①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②파랗다-퍼렇다-시파랗다-시퍼렇다 ③파랗다-새파랗다-퍼렇다-시퍼렇다 ④)퍼렇다-시퍼렇다-파랗다-새파랗다
 (문제 5)‘즐겁다’는 ‘즐거이’, ‘간단하다’는 ‘간단히’로 소리난다. ‘이’나 ‘히’를 붙일 때 앞의 말에 ‘ㅂ’을 붙일 수 있으면 ‘이’를, 앞의 말에 ‘하다’를 붙여보아서 말이 어울리면 ‘히’로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래 여러 말 중 위의 설명에 들어맞지 않은 말은 몇가지나 되는가. (솔직이, 간간이, 굉장이, 열심히, 헛되이, 가까이, 반듯이)
 ①3가지, ②4가지 ③5가지 ④7가지
 (문제 1)의 정답은 처음에는 ②번이었다. 그러나 당시 경기중 이창갑 교장이 ②③을 모두 맞는 것으로 복수정답 처리를 했다. 이 교장은 또 ②로 채점했던 (문제 5)의 정답을 ①로 변경했다.
 그러자 정답변경으로 손해를 봤다는 학부모들이 또 다시 머리띠를 두른 것이다. 이창갑 교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문제 1)의 경우 ‘가장 알맞는’이라는 조건이 없다면 한 개와 정답 외에도 차선의 답도 맞는다고 봐야한다”며 “②와③을 복수정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문제 5)의 경우도 “국정교과서와 국문학자의 학설이 뒤집히지 않는 한 정답은 ①일 수밖에 없다”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불합격자 110여 명은 1년 전처럼 또 다시 ‘불합격취소’ 행정소송을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결국 학부모들의 패소로 끝났다. 1966년 3월31일, 서울 고법특별부는 “(1번)과 (5번) 문제를 둘러싼 학자들의 의견이 구구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기준이 없다”며 “따라서 재판에 의해 좌우될 문제가 아니며 학교당국의 주관에 따라 정답이 결정될 문제”라고 판시했다. 학교장의 재량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두 문제가 과연 12살짜리 국민학생이 풀 수 있는 수준이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당시 일선교사들은 “권위있는 학자들에게나 물어봐야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를 12살짜리 아동에게 냈다”며 “건전하지 못한 질나쁜 문제였다”고 꼬집었다.(<경향신문> 65년 12월28일) 

1967년 중학교 입시에서 말썽을 일으킨 미술문제들. 조각할 때 창칼을 바로 쓰는 법과 조형작품을 만들 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을 묻고 있다.

■동백림사건과 창칼파동
 1967년 12월 6일의 신문 헤드라인은 우중충했다.
 동베를린공작단(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정하룡·조영수·윤이상·최경희·최정길’ 등 6명에게 사형이 구형되는 등 충격적이고 우울한 분위기가 감돈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 신문 사회면 한편에 ‘이틀째 농성’이라는 제목의, 전혀 분위기에도 맞지 않는 기막힌 기사가 등장한다. 바로 4일 전(12월 2일) 치러진 중학교 입시의 미술문제가 잘못됐으니 시정하라는 농성이었다. 논란이 된 미술문제의 13번과 19번은 다음과 같다.
 “(문제 13) 목판화를 새길 때 다음 중 창 칼 쓰는 법이 바른 것은?
 (문제 19) 우리가 조형작품을 만드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④협동제작
 원래 문제은행 출제방식에 의한 출제자인 서울시교육위운회가 제시한 정답표에는 (문제13)의 경우 ‘②앞으로 당기기’, (문제 19)의 경우 ‘③스케치’였다.
 그러나 시험이 끝난 뒤 채점이 한창 진행되던 2일 밤 11시쯤, 경기중학교 교장이 두 문제의 정답이 애매하다면서 복수정답을 제시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즉 (문제 13)의 경우 정답은 ②앞으로 당기기 뿐 아니라 ③뒤로 당기기도 정답이며, 문제 19의 경우 ①꾸미기 ②만들기 ③스케치 등 3답이 모두 맞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시교위의 정답표대로 답을 적어낸 수험생의 학부형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경기중 강당을 점령, 철야농성을 벌였다. 당시 성낙준 시교위 증등교육과장은 시찰차 학교에 들렀다가 학부모들에게 붙잡혀 30시간 동안 인질노릇을 하다가 겨우 빠져나오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시험당일인 2일 오후에 10여 대의 지프가 학교를 방문한 뒤에 정답이 바뀌었다”면서 ‘특권층의 압력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들은 두 문제에서 정답이 한 개씩으로 채점이 되면 160점 만점에 156.7점 이상이면 합격되는데, 2~3개의 복수정답을 인정하면 커트라인이 158.6으로 높아진다는 것. 그럴 경우 300여 명의 순위가 뒤바뀐다는 것이었다. 별의별 소문이 다 퍼졌다. 집권 공화당 의원의 자제가 끼어있다는 둥, 농성부대 학부모 중 국회의원의 사모가 있다는 둥…. 어쨌든 이 사건 역시 행정소송으로 비화됐고, 서울고법은 “특히 (문제 19)는 위법이 아니지만, (문제 13)은 도안으로 된 답을 선택하는 것인데 복수정답을 채택한 것은 교장의 재량권 남용”이라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13번)만 인정해준 것이다. 이 판결로 158.4점이던 경기중의 합격선은 158점으로 낮아졌고, 19명의 낙방생이 구제되는 길을 열었다. 법정은 승소한 학부형들의 환호성과 패소한 학부모들의 울음소리로 쌍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68년 10월28일 대법원은 경기중학교 교장의 정답 복수처리는 교장의 재량권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환호성을 올렸던 17명의 동심에는 다시 멍이 들고 말았다.    

1960~70년대를 유행한 다양한 각성제들. 중고생들은 물론 일류중학 입시에 몰린 국민학생들까지 카페나, 타이밍, 나이트스루 스타리, 잠안와정 등을 상습복용해서 사회문제가 됐다.(동아일보 67년 11월22일자)

■아나뽕, 타이밍, 카페나, 잠안와정…
 “‘꼭 1류 중학에 넣겠다’는 자모들의 허영심은 피곤해 죽을지경인 어린이들을 못살게 한다. J국민교 6학년 박모군은 각성제인 ‘카페나’를 복용한다.…노이로제 증세 보여…. 하루 5시간 수면하고….”(경향신문 1964년 11월6일)
 “(중학교 입시 전후) 가출한 국민학생들이 10명이나 된다. 서울 서교동 조모양(13·S국 6학년) C여중 불합격에 음독, 충정로 이모양(13·M국 6학년)은 J여중 불합격에 음독….”(경향신문 66년 12월17일)
 중학입시에 시달려야 했던 1950~60년대 국민(초등)학교 아동들의 삶은 비참했다. 한창 뛰어 놀아야 할 어린 학생들은 중학입시, 그것도 일류중학 진학을 위한 하루하루의 전쟁에 코피를 쏟아야 했다.
 아이들은 “만약 일류중에 떨어지는 날에는 쫓아내겠다”는 부모의 협박 속에 시달렸다. 엄마의 얼굴만 보면 덜덜 떤다는 아이들의 하소연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밤 10시 넘어서까지 공부한다. 졸면서…. 할 수 없이 가정교사가 묘안을 생각해냈다. 아이의 책상 앞 벽에 못을 박고 심군의 목을 걸치도록 했다. 심군의 목에 노끈이 걸려 목을 졸라 잠이 깬다는 얘기였다. 이 광경을 보는 그의 부모나 가정교사는 ‘자기의 목을 졸라매는 기분’이라고 전했다.”(경향신문 66년 12월17일)
 기막힌 얘기다. 그러다 목이 졸려 숨이 끊기면 어쩌려고…. 이 기사의 말미는 이렇게 끝난다.
 “국민학교 6학년 담임선생들도 몹시 괴롭다. 학교교육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가 없다. ‘배치고사’라는 것을 매일 치러야 한다. 학생들은 공부는 안하고 시험만 치르는 셈이다. 자녀의 능력은 아랑곳 없이 ‘꼭 일류중학’에 넣어달라고 떼를 쓰는 자모를 만나면 몇시간이고 시달린다.”
 심지어는 일류중학 합격률이 좋다는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 방금 젖 떨어진 꼬마에게 입시준비를 시키는 유치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교육의 질은 ‘암기위주’였다. “윌슨의 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윌슨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몇째 대통령이냐”가 관심거리였다. 또 가장 긴 강은 미시시피였고, 지구~달까지의 거리가 38만4400㎞라는 것을 달달 외웠다. 또 국민학생들까지 ‘아나뽕’이나 ‘나이트스루’, ‘카페나’, ‘타이밍’, ‘스타리’, ‘잠안와정’ 등 각성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서울시내 국민학생 62만명 가운데 절반인 30만명이 과외수업을 받고 있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1965년 문교부와 일본 문부성이 함께 조사한 한·일 13세 어린이들의 체격을 비교했을 때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즉 일본 아동들의 평균신장(151㎝)과 체중(41㎏)보다 한국 어린이들의 신장(147㎝)과 체중(37㎏)이 4㎝와 4㎏이나 작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10살을 갓 넘긴 국민학생들을 짓누르는 입시지옥의 폐해가 바로 ‘무즙 파동(1964년)’과 ‘이히 및 늘어놓기 파동(65년)’, ‘창칼파동(67년)’으로 표출된 것이다.     

무즙재판에서 승소한 학부형들이 서울시교위를 찾아가 승소학생들을 빨리 입학시켜달라고 삿대질하며 항의하고 있다. 이들 학부모들은 치맛바람의 상징으로 치부됐다.

■끝나지 않은 지옥의 레이스
 급기야 1968년 7월15일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가 발표됐다.
 문교부는 각종 파동의 ‘악의 축’으로 지목된 경기·서울·경복·경기여·이화·경동·용산·서울사대부중·창덕여·수도여·중앙·보성·숙명·진명 등 14개 중학교를 단계적으로 없앴다고 발표했다.
 ‘7·15교육혁명’으로 일컬어질만큼 전격적인 정책이었다. 이를 두고 대통령 아들의 진학을 염두에 둔 정책이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있었고, 준비없이 급조된 정책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학교간 평준화와 효과적인 학군 조정, 아동 간의 지능차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무시험제’를 밀어붙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입시지옥 및 과열 과외수업 등으로 상징되는 비정상적인 초등교육의 폐해가 너무나 크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무시험제도가 발표된 7월15일,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국민학생들의 천진난만한 사진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이번 방학에는 마음껏 놀고 싶어요.”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옛날 신문을 들춰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당시 국민학생들이 겪었던 ‘입시지옥’과 지금 초등학교생들의 어깨에 짊어진 ‘학업부담’….
 곱씹어보면 중고교 입시만 사라졌을 뿐이지 일류학교를 향해 질주하는 그 지옥의 레이스는 무섭도록 비슷하지 않은가. 단기레이스의 반복이냐, 장기레이스냐는 차이만 있을뿐….
 아니, 요즘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아이의 장래가 결정된다는 말이 나돈다던가. 40년 여 년 전 악령의 출몰이다. 한가지 묻고 싶다.
 만약 2013년판 ‘무즙파동’이 일어난다면, 수험생을 둔 부모라면 가만 있겠는가. 분연히 일어나 ‘무즙파’ 조직원이 될 것인즉….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