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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장성택, 주공 단, 여불위 … '후견인의 운명'

 역사상 ‘후견인’의 전범은 역시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주공(周公) 단(旦)’이라 할 수 있다.
 주공 단이 누구인가.
 그는 상나라를 무찌르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동생이었다.(기원전 1046년)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창업에 성공한 무왕은 불과 2년 만에 중병에 시달린다. 여전히 상나라 유민들의 반발이 거셌던 시점이어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 때 무왕의 첫째 동생인 주공이 목욕재계하고 제단에 올랐다. 

진시황릉 근처 병마용에서 확인된 청동마차. 진시황은 이런 마차를 타고 현장지도를 벌이다 객사하고 말았다.

■후견인의 전범
 “천지신명이시어! 형(무왕)의 병을 제가 대신 가져가겠나이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주공은 “형님 대신 저를 죽여달라”고 기도한 축문을 ‘금색 실로 묶은 나무궤짝’에 감춰두었다.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이것을 ‘금등지사(金등之祠)’, 혹은 ‘금등서(金등書)’라 한다.
 그러나 잠깐 병세가 호전되던 무왕은 결국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자 강보에 싸인 어린 왕이 후사를 이으니 그 사람이 바로 성왕(기원전 1042~1021년)이다.
 창업한 지 불과 3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갓난아이가 왕위에 오른다? 자연 섭정을 맡게 된 주공의 발걸음에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주공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수근거렸다.
 “형님(주공)이 결국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다.”
 결국 두 동생은 상나라 유민들을 규합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주공은 2년 간의 토벌작전 끝에 반란을 종식시킨다. 어지러웠던 천하가 주공 덕분에 진정됐다.
 어린 성왕은 감히 삼촌 주공을 훈계하지 못했고, 신하로도 여기지 않았다. 주공이 섭정에 임할 때는 늘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하고 앉았다.(천자는 남쪽을 향해 앉았다.) 또 주공의 뒤에는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끼가 그려진 병풍이 있었다. 이 모두 ‘천자’의 상징이었다.

 

 ■‘저를 대신 죽여주시옵소서.’
 그렇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았다. 주공은 “천하가 왕실을 모반할까봐 이처럼 오해를 받으면서도 섭정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언젠가 어린 성왕이 병에 걸리자 주공은 곧바로 자신의 손톱을 잘라 황하에 가라앉히고 빌었다.
 “왕이 어리시어 식견이 없사옵니다. 신의 명령을 어지럽힌 자는 바로 저 단(旦)이옵니다.”
 주공은 그런 다음 기도문을 문서보관소에 보관했다. 그러자 성왕의 병이 완쾌됐다. 그럼에도 주공을 비난하는 참소가 빗발쳤다.
 어린 성왕도 잠깐 의심을 품었을 때도 있었다. 견디다 못한 주공은 초나라로 망명하기도 했다. 성왕은 문서보관소에서 주공의 기도문을 확인한 다음 눈물을 흘려 반성하면서 귀국시켰다.  
 주공은 섭정한 지 7년이 지나자 미련없이 정권을 조카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곤 ‘북면(北面)’, 즉 북쪽(천자)를 향해 앉았다.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주공이 죽은 뒤 성왕은 주공이 예전에 “절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금등서’를 꺼내 보았다. 그리곤 “형(무왕)을 위해 대신 죽겠다”는 내용을 담은 축문을 확인했다. 성왕은 닭똥같은 눈물을 흘렸다.
 “삼촌(주공)은 이렇게 왕조를 위해 애쓰셨는데…. 내가 어려서 미처 알지 못했소.”
 주공은 청업한 나라의 수성(守成)을 위해 천고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우선 봉건제를 채택해서, 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에게 그들이 다스릴 땅을 내줬다. 심지어는 상나라 후예들에게까지 분봉했다. 또 관직과 행정의 순서를 정한 <주관(周官)>을 지었다.
 예악과 법제가 개혁된 것이다. 백성들은 비로소 화목해졌다. 고복격양가가 중원에 퍼졌다. 그는 특히 어린 조카를 훈계하려고 <다사(多士)>와 <무일(毋逸)>을 지었다.
 “부모가 일궈놓은 창업을 자식이 교만하고 사치를 부리면 집안과 나라를 망친다.(<다사>) 문왕(성왕의 할아버지)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밥먹을 겨를도 없었다네.(<무일>)” 
 이런 주공을 두고 후학들은 ‘성인’이라 추앙했다. 유교라는 것이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의 도를 대성한 공자의 교학(敎學)’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말년에 “주공이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탄까지 했다.
 “내가 너무 늙었구나. 오래됐구나. 내가 다시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것이….(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논어> ‘술이·述而’) 

중국 시안에 조성된 진시황릉. 70만명을 동원해 지었다고 한다.  

■후견인 여불위의 도박
 또 다른 후견인의 예로 여불위를 들 수 있겠다.
 여불위가 누구인가. 그는 원래 대상인, 즉 지금으로 치면 재벌이었다. 재산은 1000금이었다고 한다. 각 나라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던 그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는 진나라 태자(안국군)의 둘째 아들 자초를 보고 무릎을 쳤다.
 “이 사람은 기화(奇貨·진귀한 보물)다.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
 여불위는 전재산(1000금)을 털어 자초가 왕위에 오르게 하는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자신의 애첩(조희)까지 바쳤다. 여불위의 애첩에서 자초의 부인이 된 조희는 곧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정(政), 즉 훗날의 진시황이다. <사기> ‘여불위열전’은 “여불위가 이미 임신중이었던 애첩을 자초에게 주었으며, 애첩이 낳은 아이가 바로 정(진시황)”이라 기록했다. 그러니까 전시황이 사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점을 기록한 것이다. 어떻든 여불위의 도박은 대성공했다. 태자 안국군(효문왕)이 즉위 1년 만에 죽고, 후사를 이은 자초(장양왕)마저 3년만에 사망하자, 정(政)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기원전 259년)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여불위를 매우 존중해서 상국(相國·총리)으로 삼았고, ‘중부(仲父·숙부)’라 부르며 높였다. 여불위의 꿈은 이뤄진 것이다. 임금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여불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여불위는 선비 3000여 명을 초청해 빈객으로 삼았고, 이들을 활용해 <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다. 그러나 그는 분수를 지키지 못했다.
 옛날의 애첩이자 임금의 어머니인 조희와 여전히 밀회를 나눴다. 여불위는 조희와의 노골적인 애정행각이 발각될까 두려워졌다. 그는 다른 남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여불위는 음경이 큰 노애라는 자를 태후(조희)에게 소개시켰다. 노애의 음경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달아 걷게 함으로써 태후를 혹하게 했다.”(<사기> ‘여불위열전)
 여불위는 거짓 거세로 노애를 내시로 만든 뒤 태후전에 들였다. 결국 노애와 사랑에 빠진 태후는 아들을 둘이나 낳게 됐다.  

발굴된 병마용에서 출토된 도용들.

■분수를 지키지 못한 죄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결국 탄로가 났다. 진시황(9년·기원전 250년)은 노애의 삼족을 멸했고, 노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진시황은 노애사건에 연루된 여불위마저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선왕을 받는 공로가 인정되는 바람에’ 가까스로 처단을 면했다. 진시황은 잠시 여불위를 파면했다가 곧바로 하남 땅에 영지를 주어 복위시켜 주었다. 여불위는 이때 몸을 납작 엎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다른 나라 빈객들과 사절들이 여불위를 만나려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다른 나라에서는 여전히 여불위를 진나라의 실세로 여겼던 것이다.
 성장한 진시황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도전이었으리라. 진시황은 “혹 여불위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 여불위에게 편지 한 통을 띄었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는 그대에게 하남 땅을 봉했는가. 10만호의 식읍은 왜 내렸는가.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가 있기에 중부라 불리는가.”
 편지를 본 여불위는 때가 왔음을 느꼈으리라. 자신을 옥죄는 진시황의 협박…. 그는 결국 참수당할까 두려워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사마천은 이 대목에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명성만 있고 실속은 없는 자가 바로 여불위였던가’라고….”
 역사는 돌고 도는 것. 이 대목에서 29살의 ‘젊은’ 나이에 ‘등극한’ 북한의 김정은 체제를 생각해본다. ‘젊은 김정은’의 후견인이라 일컬어졌던 장성택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니….
 그러고보면 이른바 후견인이니, 2인자니 하는 사람들의 처신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천하의 주공 단이 온갖 구설수에 올랐고, 어린 조카마저 의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진시황의 친아버지일 수도 있던 여불위마저 끝내는 “당신이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가 있었느냐”는 사나운 말을 들으며 자살했으니….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