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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금동대향로에 숨겨진 백제 멸망의 비화

 1993년 10월 26일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색다른 행사가 열렸다.
 일본 규슈지방의 미야자키현 난가손(南鄕村) 사람들이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를 모셔와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일본인들이 왜 백제왕의 신체를 모셔온 것일까. 사연은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3년 뒤 백제 부흥군과 왜 연합군이 나·당연합군과 백강(금강)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1000척에 분승한 2만7000여 백제 부흥군·왜 연합군은 4차례 접전 끝에 완패하고 만다. 백제부흥군은 완전히 멸망한다.
 이 전투 후 백제왕·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 나라를 거쳐 규슈로 망명한다. 이 망명 대열에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서(庶) 왕자 41명 가운데 한사람인 정가왕 일족이 포함돼 있었다. 정가왕 일가가 바로 규슈 남쪽 산골지방인 난고손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이 난가손 마을 사람들이 망명한 백제왕자인 정가왕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을 찾은 것이다.
  실로 1,330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이었다. 난가손 마을 사람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신체는 세습신관과 그 아들 외에는 절대 열어볼 수 없었다. 협의를 통해 이 신성한 신체는 김포공항 검색대 마저 통과하지 않는 특전을 누렸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 날, 그 곁에서 또 다른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993년 물구덩이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660년 백제멸망 때 스님들이 급히 목제수조에 향로를 은닉해놓고 몸을 피한 것 같다.

   ■깨어난 백제왕자의 혼
 그런데 ‘망국의 한’을 담은 백제왕자의 혼이 깨어난 것일까.
 고유제와 개토제가 동시에 열린 지 17일 만인 12월12일, 1,300년 이상 잠자고 있던 백제의 정신이 홀연히 기지개를 켤 줄이야.
 사실 이 발굴은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원래 이 이름 없는 절터의 발굴은 92년 12월 당시 충남대 박물관(관장 윤무병)의 시굴조사 때 유구·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시작됐다.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과 부여나성(夫餘羅城·사적 58호)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 계단식 논이었다.
 인근에는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모형이 전시돼 있었다. 부여군은 이 절터 부근에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주변이 문화재 지역이었기에 공사에 앞서 유구·유물 확인을 위한 사전시굴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별다른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자칫했으면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으니 공사를 강행한다”며 중장비로 밀어버린 뒤 공사를 강행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발굴단의 입장에서 묘했다. 뭔가 유구와 유물이 보일 예감이 있는데,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그렇다고 양심상 “아무 것도 없으니 그냥 공사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지체하는 사이, 10개월이 흘렀다. 급기야 1993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본격발굴이 시작됐지만, 현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발굴 구덩이가 여름을 지나면서 물구덩이로 변했기 때문이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인 데다 습기가 질척질척댄 데다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굴단은 추위와 싸우면서, 발굴 구덩이에 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으로 물이 흐르도록 임시방편으로 고랑을 마련하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래도 조사지역은 여전히 물로 질퍽거려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12월 12일 오후 4시30분.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사)은 발굴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월척’을 낚는다. 

백제금속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

 

 ■물구덩이에서 낚은 ‘유물 월척’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상한 뚜껑 같은 것이었다. 그게 향로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엔 광배 편 같은 유물인 줄 알았다.
 꽃삽으로 천천히 노출시켜 나가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유물임이 분명하다는 것만 느꼈다.
 발굴단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느낌상 아무래도 뭔가 안전장치를 해놓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부들이 보았으니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밤사이에 도굴 등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야간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뭔지도 밝혀지지 않은 유물에 대한 입소문이라도 나면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인부들은 일절 참여 못하게 귀가 조치시켰어요. 학예연구직들만 모두 모여 오후 5시쯤 작업에 들어가 전등을 밝혀 놓고 8시 30분쯤에 완벽하게 향로를 발굴했지요.“
 한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펀지로 적셔내면서 120㎝ 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 같은 흙을 걷어냈다. 추운 날씨에 손이 틀 듯 시리고 아팠지만 그야말로 미친 듯 땅을 팠다.
 그 때였다. “아!”
 발굴단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감동의 물결이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아마도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유물이 현현한 것이다.
 발굴단을 지휘했던 당시 신광섭 부여박물관장의 말.
 “향로를 들어낸 뒤에도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엄청난 물건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뿌듯한 자부심.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임을 알았다.
 향로는 칠기에 넣어서 묻었던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넋이 나간 상태에서 발굴한 것인지….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석조사리감. 백제 위덕왕의 누이동생이 공양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찬란한 백제유물의 백미
 수습을 끝내고 사진촬영 등 연장 작업을 마무리한 발굴단은 이 유물을 곱게 싸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그제서야 유물의 올바른 모습이 드러났다. 발굴단의 탄성이 터졌다.
 미지근한 물에 담근 ‘면봉(귀이개)’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냈다. 그들은 하나하나 그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의 참 얼굴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신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상이 있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있는 등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모습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당나라 때의 현악기로 비파의 일종), 동고(銅鼓·꽹과리), 종적(縱笛·관악기), 소(簫·피리의 일종)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뚜껑 전체는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였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 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 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해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 뿐 아니라 현실 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의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물구덩이 속에 숨긴 이유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왜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는 나무물통에 은닉된 채 발견됐을까.
 발굴을 총지휘했던 당시 신광섭 부여박물관장의 추측을 토대로 660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660년 무렵 백제 최후의 순간, 나·당 연합군의 약탈·유린이 시작된다. 그러자 스님들은 창졸간에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춘다.
 그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국 백제의 사직은 그것으로 종막을 고한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임금들의 제사를 지낸 절을 철저히 유린한다.
 절이 전소되고 공방터 지붕도 무너진다.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그대로 감춰진채 깊이 잠든다.
 그럴듯한 추론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근거가 있을까.
 물론이다. 향로가 발견된 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 목탑지 밑에서 또 하나의 깜짝 놀랄 유물이 발견된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이다. ‘창(昌)’은 누구인가.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의 본명이다.
 명문을 풀면 ‘위덕왕 13년(정해년·567년)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명문 중 ‘형공주(兄公主)’는 맏공주를 의미하는 ‘상공주(上公主)’ 혹은 ‘장공주(長公主)’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의 맏딸, 즉 위덕왕의 맏누이동생이 사리를 공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은 한성백제 몰락과 공주 시대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멸망한 백제 의자왕의 왕자인 정가왕이 일본 규슈 난고손 마을까지 망명,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정가왕과 정가왕의 아들인 복지왕의 신주를 모시고 살명서 해마다 만남의 의식을 벌인다.  

 

 

 ■창졸간에 멸망당한 백제
 성왕은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뒤를 이은 위덕왕은 그처럼 비명에 간 아버지를 기리며 국가적 추복불사(追福佛事)의 일환으로 이 목탑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기단만 남아있는 이 목탑지를 발굴하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됐다. 목탑의 심주(心柱)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
 이는 절을 유린한 적군들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 마구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스님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그만큼 백제가 강대국이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8월에는 유능한 윤충(允忠)장군이 신라 낙동강 전선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던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신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오죽했으면 651년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그만 괴롭히고) 빼앗은 신라의 성을 마땅히 돌려주라”고 의자왕에게 국서를 내렸을까. 당 고종은 국서에서 “만약 백제가 빼앗은 성을 신라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법민(法敏·훗날 신라 문무왕)의 요청대로 왕(의자왕)과 결전을 벌일 것이며 고구려와 약속하여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의자왕은 이듬해(652년) 당에 조공을 보낸 것을 빼고는 그 뒤부터 사실상 당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 상태로 운명의 660년을 맞이한 것이다.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일컬어질 만큼 지극한 효자였던 의자왕. 그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등 강국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어느덧 자만심과 타성에 젖어 독재자로 변질됐으며 요녀로 악명 높았던 군대부인(君大夫人)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충신들을 쫓아냈다. 충신인 성충(成忠)이 옥사하고 흥수(興首)가 귀양 갔으며, 그 빈자리를 신라의 간첩망에 포섭된 좌평 임자(任子) 같은 인물로 채웠다.
 무엇보다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해 나당연합군 결성을 수수방관한 점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결국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한 것이다.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바로 그 비운의 왕국 백제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