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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황희 스캔들'에 얽힌 내막

 “사람들이 우러러 ‘어진 재상(賢宰相)’이라 했다. 관후하고 침중했으며, 집을 다스림에도 검소하고….”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서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다.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랐다.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어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頗有보궤之초)는 비난을 받았다.”
 둘 다 1452년(문종 2년) 2월 8일 <문종실록>에 등장하는 황희 정승의 졸기(卒記·부음기사)이다.
 완전히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보통의 부음기사(obituary)를 보면 그 사람의 생애를 잔뜩 상찬해놓고는 말미에 ‘그러나’라는 토를 달아 아쉬운 행적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졸기와는 경우가 다르다.  

황희 정승의 초상화. 황희는 어진 재상이라는 찬사와 함께 몇가지 흠결을 함께 지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희는 태종과 세종 시대의 명재상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희는 제가(齊家)에 소홀했다
 주인공이 다름아닌 청백리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아니신가. 졸기를 보면 “황희의 홍안백발을 보면 마치 신선 같았다”며 한없는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다음의 기사가 마음에 걸린다.
 “처형들인 양수와 양치가 불법행위로 적발되자 황희는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는 변명의 글을 올렸다. 또 황중생이라는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 집안에 드나들게 하다가, 황중생이 죽을 죄를 짓자 ‘자기 아들이 아니다’라 하고 성(姓)까지 조(趙)라 했다. 이를 두고 애석해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또 있었다. 부음기사는 ‘황희가 몰수 당한 아들(황치신·황보신)의 과전을 자신의 과전으로 바꾸게 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린 사실’도 문제삼고 있다. 무슨 말이냐. 1441년(세종 27년) 황희의 둘째아들인 황보신이 죄를 지어 과전(科田·국가가 지급한 전토)을 몰수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 때 장남인 황치신이 나서 물수당할 동생(황보신)의 비옥한 밭과 자신의 척박한 밭(과전)을 맞바꿨다. 이 때 사헌부와 사간원이 벌떼처럼 나서 황씨 형제를 탄핵했다. 그런데 아버지인 황희가 나서 “그렇다면 저(황희)의 과전과 (몰수 당한) 자식의 과전을 맞바꿔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황희의 상소는 가납됐다.
 그러자 대간들은 “죄지은 아들에게 몰수한 땅을 그 아버지에게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앙앙불락했다. 물론 세종은 황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황희의 졸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황희가 제가(齊家)에 소홀했다는 혹독한 인물평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황희 졸기의 인물평은 그저 양념거리에 불과하다.
 조선 최고의 청백리 정승으로 알려진 황희를 둘러싼 엄청난 논란은 세종~단종 때까지 3대에 걸쳐 이어졌다. 황희 정승을 둘러싼 논란의 허실과, 그것이 주는 함의를 함께 이야기해보자.

 

 ■황희는 ‘황금대사헌’이었다
 ‘응 이게 뭐지?’
 황희 정승이 죽은 뒤 5개월이 지난 1452년(단종 즉위년) 7월 4일이었다.
 <세종실록>을 편찬하려고 세종 시대에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를 들춰보던 지춘추관사 정인지의 시선이 멈췄다.
 세종 때의 사관 이호문이 ‘황희 정승’을 주제로 쓴 사초였다. 사초를 읽어본 정인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야.’      
 정인지는 영관사(춘추관장)인 황보인과 감관사(부관장)인 김종서 등 실록 편찬책임자 및 실무자들을 긴급소집했다.
 “이건 아니에요. 이호문의 사초는 감정에 치우치고 근거가 없는 것 같아요.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이들은 이호문의 사초를 조목조목 분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초 내용 중 맞는 부분도 있었다.
 “황희가 아버지(황군서)의 얼자(孼子·첩의 아들)라는 내용은 맞아요. 황희 또한 ‘난 정실의 아들이 아니다’라 했으니까. 그렇지만 나머지는 듣도 보도 못한 내용들입니다.”
 그랬다. 이호문의 사초를 살펴보면 ‘어진 정승’이라는 황희 정승의 명성이 무색하다. 무시무시한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황희는 대사헌이 되어 승려 설우에게서 황금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황금대사헌’이라 했다.”
 대사헌이 어떤 자리인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시 적발하고 추상같은 처벌을 내리며, 임금의 잘잘못을 두고도 엄정한 시비를 가리는 사정기관(사헌부)의 수장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황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황금대사헌’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니….

 

 ■고구마 줄기처럼 나오는 황희의 비리
 그 뿐이 아니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참수당한) 난신 박포의 아내가 죽산현에 살면서 종과 간통했다. 간통 사실이 우두머리 종에게 발각되자 박포의 아내는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다. 한참 후 부패된 시체가 떠오르자 수사가 시작됐다. 박포의 아내는 발각될까 두려와 한양에 올라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살았다. 이 때 황희가 박씨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박포의 아내는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무슨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닌 황희 정승이 궁지에 몰린 역적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뿐인가.
 “~황희는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을 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다. ~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며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했다.”
 이호문의 사초 내용 가운데는 움직일 수 없는 ‘팩트’가 있었다. 예컨대 당시 파주 동파역의 역리인 박용은 이른바 원악리(元惡吏·악질적인 지방 하급관리)였다. 그런데 이 악질 하급관리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와 싸움이 붙었을 때 “내가 서울의 재상들을 얼마나 많이 아는 줄 아느냐”고 위세를 떨었다.
 결국 경기감사는 이 무도한 박용을 구속시켰다. 이 사건은 결국 뇌물 스캔들로 번졌다. 조사결과 당시 좌의정 황희와 대제학 오승, 도총제 권희달, 도총제 이순몽 등이 연루됐다. 1428년(세종 10년)의 실록을 보라.
 “박용의 아들 박천기를 잡아 문초했다. 박천기는 ‘황희에게 말(馬) 1필을 뇌물로 주었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오승·권희달에게 말 1 필, 이순몽에게 소 1두를 주었다.’고 진술했다. 황희는 말 1필과 술대접을 받고 뇌물을 준 지방관리를 변호하는 편지 1통을 전달했으며….”
 사간원·사헌부 소속 대간들은 “황희는 수상으로서 ‘잘 봐달라’는 청탁편지를 써주었으니 탄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뜬 소문으로 어찌 탄핵하느냐”고 황희를 변호했다. 문제의 사관 이호문은 사초를 쓰면서 “황희는 수상(首相)으로서 몰래 뇌물을 받고 죄를 풀어주고자 청탁했으니 지조(志操)가 비루하다”고 꼬집었다.

경기 파주에 있는 황희 정승의 묘. 황희정승이 죽자 문종 임금이 장삿날에 친히 파주로 행차했다고 한다.

 ■“황희 정승이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나 정인지 등 <세종실록> 편수관들은 ‘황금대사헌’ 운운 내용과 박포의 아내 사건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다. 편수관 허후가 황희를 변호했다.
 “‘황금대사헌’이라는 비난은 좀…. 이호문의 사초를 보면 사람들이 황희를 ‘황금대사헌이라 일컬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일컬었다’는데 왜 여기에 모인 8~9명이 한결같이 모른다는 말입니까.”
 허후는 “황희가 재상이 된 지 30년이 다 됐지만 탐오하다는 이름이 없는데 어찌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이호문이 나의 친족이지만 원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어 그의 말을 다 취할 수 없다”면서 “사초를 삭제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낸다.
 김종서는 “박씨 사건은 사생활 공간의 은밀한 일이므로 그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다른 일들은 (30년간 황희를 지켜본) 우리가 모를 수 없다”며 황희를 변호한다. 편수관들은 두 사람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필(史筆)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며 사관들의 행태를 한 목소리로 성토한다.
 “만일 사관 한 사람이 사감(私感)을 갖고 사서를 쓴다면 천만세가 지나도 고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특히 정인지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직필(直筆)이라 할 수 없다”고 사초 삭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황보인은 신중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큰 일입니다. 가벼이 결정할 수 없어요. 마땅히 중론을 모아서 결정해야 합니다.”
 이호문을 한 목소리로 성토하던 최항과 정창손이 신중론에 가세한다.
 “명백하게 틀린 내용이라 삭제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사초를 삭제하는 실마리를 열어놓으면 말류(末流·말세)의 폐단을 막기 힘듭니다.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황보인이 논란을 잠재우는 마무리 발언을 한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큰 일은 한사람이라도 안된다고 하면 반드시 정법을 따라야 합니다. 따라서 삭제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내 지우지 못한 오점
 이 ‘황희의 스캔들’을 두고 최근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박씨 아내 사건’과 ‘황금대사헌 사건’ 등 갖가지 의혹들의 정확한 진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정인지·김종서·황보인 등 황희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사람들조차 “우리가 모르는 일을 사관 이호문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니까. 그들의 말대로 이호문의 ‘사감(私感)’이 작용해서 그런 엄청난 스캔들이 허위 혹은 과장되게 사초에 기록됐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1452년 2월 8일자 <문종실록>에 기재된 ‘황희 졸기’에는 ‘박씨 사건’과 ‘황금대사헌 운운’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졸기’에도 “황희가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법 행위를 저질러 압수 당한 아들과 과전을 자신의 과전을 바꾼 이야기. 처형들의 불법행위를 변명한 일, 중죄인이 된 서자(庶子)의 성(姓)을 바꾼 일 등을 예로 들었다.

황희 정승이 말년에 여생을 보낸 파주 반구정.

 ■황희 정승이었다면…
 필자는 황희 논란을 둘러싼 실록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한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읽을 수 있었다.
 <세종실록>의 편찬자들이 황희 스캔들을 기록한 이호문의 사초를 ‘사감에 의한 허위·과장’이라 판단했음에도 끝내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인지 등이 “사실이 아니니 당연히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편수관들의 의견이 ‘삭제’ ‘수정’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결국 ‘사초를 삭제하는 선례를 만들면 말세의 폐단이 생기고, 그것은 정법(正法)이 아니라’는 의견들이 힘을 받았다. 물론 이호문의 사초가 과장 혹은 허위라면 황희 정승으로서는 천추에 길이남을 오욕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하지만 <세종실록>의 편찬자들은 사관의 붓은 그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교훈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었다.
 비단 그들 뿐인가. 태종 때의 사관 민인생은 “사관은 과인의 공간인 편전에 들어오지 마라”는 엄명을 내리자 “신의 위에는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고 응수했다.(1401년) 3년 뒤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태종이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는 밀명을 내렸지만, 사관은 “모르게 하라”는 임금의 밀명까지 고스란히 사초에 적었다.
 1735년 영조가 대신들과의 밤샘 밀담을 기록한 사초를 불태우자 전직 사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사관이 된 자는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말이 있습니다.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황희 정승 스스로 이호문의 사초가 과장·허위라고 여겼을지언정 그것을 삭제·수정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1438년(세종 20년) 세종 임금이 편찬을 마친 선왕의 실록, 즉 <태종실록>을 보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자 황희는 얼굴색을 바꾸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서를 보는 관례를 만들면 후세에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려 할 겁니다. 사관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