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패장 신립을 위한 변명

 이번 주 팟캐스트는 ‘패장 신립을 위한 변명’입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충주 전투에서 대패한 신립 장군을 두고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군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폄훼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립(1546~1592)은…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다.”라 했습니다. 명나라 사령관인 이여송도 “천혜의 요새지(조령)를 몰랐으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였다”고 촌평했습니다. 그 뿐인가요. 1801년(순조 원년) 탄금대를 지나던 다산 정약용은 “신립을 깨워 ‘왜 문(조령)을 열어 왜적을 받아들였는지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신립이 천혜의 요충지라던 조령(해발 642m) 대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대패한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금증에 생깁니다.
 과연 조선의 종묘사직이 급속도로 기운 책임이 전적으로 신립에게만 있을까요. 신립은 1583년 여진족의 침범을 막아낸 용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징비록>은 시종일관 신립을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립은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다.… 신립이 무사를 모집했지만 따라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서애는 장수(신립)를 잘못 썼음을 토로하면서 “지금 후회한들 어쩌겠냐만 훗날의 경계를 위해 기록한다”고 썼습니다. 서애는 신립을 ‘징비(懲毖)’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립은 그리 용렬한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에 총지휘할 체찰사(류성룡)와 부체찰사(김응남)가 문신들로 채워지자 “무장인 내가 나서겠다”고 화를 내며 고집했을 뿐입니다. 신립은 결국 오합지졸 8000명을 이끌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왜적은 이미 조령 인근까지 접근해있었습니다. 게다가 조령 주변에는 몇군데 우회로가 있었습니다. 만약 천험의 요새지라는 조령만 막았다가 왜적이 우회라도 한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서울의 임금과 조정은 피할 틈도 없이 화를 입었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신립은 왜병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요로, 즉 충주(탄금대)에 병력을 집중한 것이 아닐까요. 그 잘난 임금과 종묘사직을 위해 옥쇄를 결심한 것은 아닐까요. 신립을 위한 변명 한마디 해봤습니다. 이번에도 관련 기사와 함께 팟캐스트를 애청해주세요. 

 

  “신립은 원래 날쌔어 당시에 이름을 얻었지만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다.”(류성룡)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 장군을 무능한 장수로 폄훼했다. 류성룡은 더 나아가 옛 고사를 인용,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군에게 넘겨주는 것”이라 했다. 신립과 같은 무능한 장수로 인해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인 이여송도 조령을 지나며 혀를 끌끌 찼단다.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 지킬 줄 몰랐다니 신립은 지모가 부족한 장수였구나!”(이여송)
 신립 장군이 천혜의 요충지였던 조령(충북 괴산군의 연풍면과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에 있는 해발 642m 고개) 대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쳐서 대패한 것을 두고 손가락질 한 것이다. 조선의 종묘사직이 급속도로 기운 책임이 전적으로 신립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패장 신립에게 무자비한 십자포화가 집중됐다.
 

충추 탄금대에서 바라본 남한강. 신립 장군이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에 배수진을 친 이유는 왜군이 지날 수밖에 없는 요로에 군대를 배치, 옥쇄작전을 펼침으로써 왜군의 서울 진격을 조금이라도 막으려고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신립은 어리석은 멍청이’ 
 신립이 밤낮으로 잠을 잤다느니, 군율이 해이했니, 장수와 병사간 불통이었느니, 술에 취해있었느니, 포악한 성격에다 왜군을 업신여겼느니…. 장수로서 기본자질까지 의심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01년(순조 원년) 다산 정약용은 유배길에 탄금대를 지나면서 이렇게 읊었다.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江心湧出彈琴臺) 신립을 일으켜서 얘기나 좀 해봤으면(欲起申砬與論事)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는지(啓門納寇奚爲哉)….”(<다산시문집> ‘탄금대를 지나며’)
 다산은 험준한 문(조령)을 두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을 깨워서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라고 답답해했던 것이다. 그 뿐인가. 다산은 신립을 두고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다가 칼을 찾으러 간 멍청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다산이 표현한 ‘~멍청이’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를 빗댄 것이다. 즉 배를 타고 가던 중국 초나라 사람이 칼을 빠뜨렸는데, 칼이 빠진 지점의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다는 것. 그는 배가 나루에 닿자 표시를 해둔 뱃전의 밑 물 속에 들어가 칼을 찾았다. 이 꼴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저렇게 ‘각주구검’하는 멍청한 사람도 있네!”하며 비웃었다.(<여씨춘추> ‘찰금’) 다산은 신립을 ‘전략·전술에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 어리석은 멍청이’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거의 모든 평가가 신립 장군을 ‘임진왜란 패배의 상징’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물론 신립 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신립 장군에게만 모든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 그를 위한 변명 한마디 쯤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몇가지 논문과 저작물을 검토하며 신립 이야기를 한번 해보련다.(이헌종의 <신립에 대한 수정적 비판-탄금대 전투를 중심으로>, 동의대학원 석사논문, 1991)(이상훈의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군사’ 제87호, 2013)(이희진의 <징비록의 그림자>, 동아시아, 2015 등) 

국보 132호 <징비록>. 서애 류성룡이 기록한 생생한 국난의 역사이다.  그렇지만 신립 장군을 두고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한국국학진흥원 

■오랑캐 무찌른 임금의 장인
 신립(1546~1592)은 그렇게 녹록한 장수는 아니었다.
 22살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신립은 온성(함북)부사 시절이던 1583년(선조 16년) 굉장한 무공을 세운다.
 평소에 훈련시킨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방을 어지럽히던 여진족 무리를 섬멸한 것이다.
 “이탕개(尼湯介) 등이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종성(함북)을 이틀째 포위했다. 온성부사 신립이 기병들을 이끌고 구원하자 적이 허둥지둥 도망갔다. 강까지 추격하고 돌아왔다.”(<선조수정실록>)
 신립의 무용담은 계속된다. “한 오랑캐가 백마를 타고 의기양양 휘젓자 신립은 단 한 발의 화살로 거꾸러쓰렸고, 이후 적의 기세는 바람에 휩쓸리는 갈대처럼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군을 포위하면서 기세등등했던 오랑캐들은 신립의 얼굴을 알아차리고 “온성 영공(令公)이 왔다”면서 줄행랑 쳤다고 한다.(<목민심서> ‘병전 6조’)
 선조 임금은 그런 신립을 무척 아꼈다. 선조는 신립의 장녀를 자신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신성군의 부인으로 맞이했다. 신립은 임금의 사돈이 된 것이다. 선조의 넷째아들인 신성군은 임금이 끔찍하게 총애했던 인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선조는 어린 신성군(1579~1592)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갖은 수를 썼을 정도였다.

 

 ■신립을 징비한 ‘징비록’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신립을 매우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징비록>이 무슨 책인가. 류성룡이 자서(自序)에서 썼듯 ‘징비(懲毖)’는 “내가 지난 날의 잘못을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시경>의 구절(‘소비·小毖’)에서 따왔다. 류성룡은 “바로 이것이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라 했다. 그런데 류성룡은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신립의 ‘장수로서의 됨됨이’를 폄훼하면서 이렇게 표현한다.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래도 훗날의 경계가 되겠기에 상세히 기록해둔다.”
 이 대목에 관한 한 류성룡은 신립을 ‘징비’하고 있는 것이다.
 <징비록>을 보면 신립은 성질이 급하고 사나운, 그러니까 상당히 용렬한 장수로 표현된다.
 예컨대 류성룡은 임진년(1592년) 봄에 신립과 이일을 지방의 군비를 순찰하도록 했다. 그 때의 <징비록>을 보자.
 “신립은 성질이 잔인하고 사납다는 평판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죽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그를 두려워 한 수령들이 백성들을 동원해 길을 닦았고, 지나칠 정도로 대접했다. 대신들의 행차라도 이것만 못했다.”
 “신립이 찾아왔기에 왜적의 형세를 물어봤다. 신립은 ‘걱정없다’고 가벼이 여겼다.…신립은 ‘비록 왜적에게 조총이 있다지만 어찌 쏠 때마다 다 맞겠냐’고 했다. 신립은 도무지 반성하거나 깨닫지 않고 가버렸다.”
 류성룡은 오랑캐를 섬멸함으로써 승승장구하던 신립의 ‘의기가 날카로워져 왜적을 업신여길까 견식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걱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립을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장수인 조괄에 견줬다. 조괄(?~기원전 260)은 진나라를 업신여기다가 40만 대군을 몰살시킨 패장이다. 조나라는 참패의 후유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류성룡은 조선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린 인물로 신립을 꼽고 있는 것이다.   

문경에서 바라본 조령. 조령은 천혜의 요새였지만 신립 장군이 진격했을 때는 왜군이 이미 목전에 진격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립은 용렬한 장수다
 신립에 대한 류성룡의 부정적인 평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더욱 심해진다.
 4월14일 부산진을 공격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올라오자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진다. 대간들이 “대신을 체찰사(전쟁 총지휘관)로 삼을 것”을 상소했고, 류성룡이 체찰사로 지명된다. 이 대목에서 <징비록>을 보자.
 “이산해의 추천으로 내(류성룡)가 체찰사가 됐다. 나는 병조판서 김응남을 부체찰사로 삼았다.”
 전쟁에 총지휘할 체찰사와 부체찰사가 모두 문관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신립은 류성룡에게 “전장에서 싸우는 장수가 먼저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전황은 급박했다. 왜병의 선봉이 이미 밀양·대구를 지나 조령 아래까지 다가온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신립은 왜군을 막으려 내려간 이일(1538~1601)을 도우려면 문신이 아니라 무신, 즉 장수인 자신이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징비록>은 이 대목에서 “내(류성룡)가 신립의 말을 임금에게 아뢰었고, 임금께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대목을 보라.
 “신립이 대궐 문밖에 나가 직접 무사를 모집했지만 따라가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신립은 내(류성룡)가 모아놓은 군사들이 많은 것을 보고는 얼굴에 노한 빛을 띠었다. 신립은 김응남을 가리키면서 나(류성룡)에게 ‘이런 분을 대감(류성룡)이 데려가서 무슨 일에 쓰겠느냐’며 ‘소인(신립)이 부사(부체찰사)로 가겠다’고 했다.”

 

 ■화를 벌컥 낸 신립
 <징비록>의 다음 표현이 재미있다.
 “나(류성룡)는 무사들이 신립을 따라가지 않아 신립이 노여워 하는 것을 알고 웃으면서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이것저것 구별하겠는가. 공이 급히 가야한다니 내가 모아둔 군관을 먼저 데리고 떠나시오.’라 했다.…사람들은 실의에 가득찬 기색으로 신립을 따라갔다.” 
 <징비록>의 뉘앙스는 참 묘하다. 신립은 매우 용렬한 장수다. 사람들을 모집했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았고, 결국 류성룡이 모아둔 군관들을 데리고 출전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화를 벌컥 내면서….
 하지만 가만히 보자. 신립의 언행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전쟁통인데 체찰사 뿐 아니라 부사(부체찰사)까지 문관으로 채워야 했을까. 오랑캐 섬멸의 혁혁한 공로가 있는 장수(신립)는 처음부터 배제된 것이 아닌가. 무장인 신립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랬으니 신립으로서는 ‘전쟁을 하는 데는 무장이 나가야 한다’고 손들고 나섰던 것이 아닐까.
 실전경험이 없는 문관들이 병력을 지휘한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문신인) 김응남 보다는 차라리 나를 부사로 데려가라”고 한 것이 아닐까. 신립이 ‘내가 가겠다’고 하자 류성룡이 군말없이 병력을 인계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착안점이다. 결국 체찰사인 류성룡도, 부체찰사인 김응남도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어떤 연구자는 이 대목을 두고 류성룡이 출전하지도 않을 거면서 굳이 가겠다고 나선 것은 일종의 ‘쇼’로 읽힐 수 있다고 했다.   

 

 ■송시열의 한마디
 어쨌든 그렇게 출전한 신립의 조선군은 대부분 오합지졸들인 8000명에 불과했다.
 “신립은 도성의 무사·재관(材官)·서류(庶流·서자들)·한량인 등 활 잘쏘는 자들 수천명이었다. 인근 고을에서 군사를 거뒀다.”(<선조수정실록>)
 실록에 나왔듯이 인력은 물론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임진왜란 직전에 군기시 창고에 화약 2만7000근이나 비축돼 있었다. 천·지·현·황자 대포와 영·측자 소포, 그리고 대·중·소 등 3가지 양식의 총과 비격진천뢰 등의 포도 있었다.”(<서애집> ‘잡저’ 등)
 그런데 신립의 조선군이 총포로 무장해서 화약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대목이다. 무장인 신립으로서는 화나는 일이 아니었을까. 훗날 신립의 묘갈명을 쓴 송시열은 재상, 즉 류성룡의 비협조를 겨냥하고 있다.
 “장수와 재상이 서로 맞지 않고서 성공을 이루었던 적은 예부터 없었습니다.(將相不相應 而能成功者 自古無之)”
 “당시 재상(류성룡)은 평소에 공(신립)을 좋지 않게 여겨 그것을 막고자 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지금이 어찌 재상께서 구원을 앙갚음할 때입니까’라고 말했다.(時相素不悅公 格之 公曰此豈相公修隙時)”(<송자대전>) 

조령을 넘나드는 관리들이 묵었던 조령원터.


 ■뿔뿔이 흩어진 군사들
 그런데 아무리 변호를 해준들 신립을 향한 비판의 시선은 여기서 거둘 수는 없다.
 신립은 왜 천혜의 요새라는 조령을 버리고, 사지(死地)인 탄금대에서, 그것도 배수진을 쳐서 전멸했는가. 그런 의문을 풀어야 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될 점들이 너무도 많다.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인 ‘제승방략’ 체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작동되지 않았다.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특정장소에 집결시켜 대처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 때 조정은 제승방략의 군사 지도자를 중앙에서 파견한다. 그런데 이런 방어체제는 신속한 대규모의 침공을 받으면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류성룡이 일찍이 간파했다.
 “제승방략 체제 아래서는 전쟁이 나면 모든 군사가 모여 조정이 보내는 지휘관만을 기다리는 형편이 됩니다. 장수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군대는 흩어지고 결국 패하게 됩니다.”(<징비록>)
 임진왜란 때 그 병폐가 드러났다. 병란이 일어나자 경상감사 김수가 제승방략에 따라 각 수령에게 소속병력을 이끌고 대구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왜병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랐다. 조정이 파견한 순변사(제승방략의 지휘관)가 도착하기도 전에 왜병이 접근한 것이다. 대구에 집결했던 병력은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졌다.
 순변사 이일이 늦은 이유가 있었다. 출전을 위해 정예병 300명을 차출하려 했지만 싸울 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이일은 3일이나 지체했다. 겨우 군관 60여 명만 이끌고 남하했다. 이일이 조령을 넘어 4월20일 문경에 접어들었지만 고을엔 한사람도 없었다. 겨우 이곳저곳에서 6000명을 모았지만 군대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결국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은 상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병에 대패하고 만다.(4월25일) 신립이 8000명을 이끌고 도착한 것은 하루 뒤인 4월26일이었다.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를 택한 이유
 사실 왜병을 맞는 조선의 전략은 나름 있었다. 이미 출전한 이일이 제승방략의 시행으로 대구에 집결한 군사들을 지휘해서 왜병의 북진을 막는다. 그러면 신립이 조령을 중심으로 죽령과 추풍령의 방어선을 연결해서 방어선을 구축한다. 뭐 그런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방어작전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4월26일 충주 남쪽 10리 지점인 단월역에 주둔한 신립은 조령을 정찰한다.
 잠시 뒤 상주 전투에서 참패한 이일이 신립을 찾아와 “죽여달라”고 청한다. “훈련받지 못한 백성들이 대항할 수 없었다”고 고하면서…. 이 때 종사관 김여물은 신립에게 “중과부적이니 험준한 조령에서 방어하는 것이 좋다”고 청한다.
 이 때가 신립을 두고두고 욕먹이는 순간이었다. 신립은 “조령에서는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싸우는게 적합하다”고 반대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이 때 김여물이 패할 것을 알고 아들 김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옥쇄한 조선군
 신립은 군사를 인솔,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다. <선조수정실록>은 이 대목에서 “앞에 논이 많아 기병들이 말 달리기에는 불편했다”고 지적했다. 4월27일 왜군이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도착했다. 목사 이종장과 이일이 척후로 전방에 있었지만 왜병에 의해 차단 당했다. 28일 새벽 왜병이 삼군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주력군은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다. 실록은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고 전했다.
 신립은 곧장 말을 달려 주성(州城)으로 행해 나갔다. 군사들은 대열을 이루지 못한채 숨어버렸다.
 성중의 적이 호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자 신립의 군사들이 크게 패했다.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해서 신립이 도로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지만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졌다.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
 신립은 김여물과 함께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명을 죽인 뒤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립에게는 그의 뒤를 따라온 누이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도망가려 하자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며 머리를 붙잡고 함께 빠져 죽었다.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도 전사했다. 빠져나온 장수는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

 

 ■왜군은 조령을 고집했을까
 신립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장이다.
 적의 군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왜군에 포위됐다. 또 자신의 장기인 기병 중심의 돌격감행으로 스스로 진영을 무너뜨렸다. 또 배수진을 쳐서 퇴각로를 스스로 없앴고, 그 때문에 이후 부대를 수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책임을 신립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더듬어보자. 
 신립이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세가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이일이 패함에 따라 조령은 더 이상 지키기 어려웠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오합지졸의 조선군이 막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조령에는 관문인 새재 뿐 아니라 몇 개의 통로가 더 있었다. 만약 적이 조선군을 공격하는 채 하면서 다른 통로로 주력을 통과시킨다면 어땠을까. 자칫하면 도성의 임금과 조정은 아무 것도 모른채 적의 기습을 받을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선의 종묘사직이 창졸간에 무너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신립은 승산없는 조령보다는 적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닐까. 충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충주를 장악해야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왜군은 이곳에 주둔한 조선군을 우회하고 북상했다가는 보급로가 끊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마침 음력 4월은 조선군에 유리한 서풍이 충주지역에서 불 때여서 조선군에 유리한 상황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그렇다면 신립의 의도는 분명하지 않았을까. 그 잘난 임금을 위해, 종묘사직을 위해 시간을 벌게 하려던 것이 아닐까. 정규훈련을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 정규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옥쇄를 각오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신립 장군의 군대는 처절한 전투 끝에 산화의 길을 택했다. 빠져나온 장수는 두서너 명에 불과했다니까…. 지리멸렬했던 다른 군대와 달리 투혼을 발휘했던 것이다.
 
 ■꺼림찍한 징비록
 이런 분석도 있다.
 혹시 임진왜란 당시 조정을 이끈 동인 정권과 동인의 영수 류성룡이 신립에게 초전 연패와 서울 함락의 지휘책임을 신립에게 뒤집어씌운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선조수정실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조헌은 왜적이 반드시 침략할 것(倭必來)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내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싸잡아 ‘모두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교란시키는 것’이라 구별지어 배척했다.(區別麾斥) 그 때문에 조정에서는 감히 말도 꺼내지 못했다.”(1591년 3월1일)
 그러니까 일본의 ‘내침설’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인심을 교란시키는 서인 무리’라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그 ‘서인몰이’ 때문에 조정에서의 공론은 아예 싹이 잘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최종책임은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선조와, 그 시대 정사와 공론을 이끌어간 동인정권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화살을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신립에게 오롯이 쏘아댄 것이 아닐까. 신립을 초지일관 용렬한 인물로 몰아붙인 <징비록>의 내용이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죄없는 자가 신립에게 돌을 던져라.’
 물론 서애 류성룡의 공적인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특히 이순신 장군을 추천한 것은 만고의 업적이다. 성호 이익은 류성룡을 두고 이런 평가를 내렸다.
 “흔히들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활약을 펼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일이다. 나라를 잃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충무공 한사람이 있었던 덕분이다. 만약 류 선생의 추천이 없었던들 이충무공은 단지 일반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이름없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성호전집>)
 또한 <징비록>의 저술 또한 혁혁한 공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회고하고 반성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경계한 생생한 기록물이니까….   그러나 <징비록>은 어디까지나 서애의 개인 시각에서 쓴 기록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실록과 같은 정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포폄 역시 서애 류성룡의 시각이다. 맹신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쯤해서 신립을 위한 변명 한마디…. “누구든 죄없는 자가 신립에게 돌을 던져라.”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헌종, <신립에 대한 수정적 비판-탄금대 전투를 중심으로>, 동의대학원 석사논문, 1991
 이상훈,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군사’ 제87호, 2013
 이희진, <징비록의 그림자>, 동아시아, 2015
 장호식, <신립장군 전설연구>, 세명대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6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