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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누가 '몰카'의 원조인가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역의 영주가 가혹한 세금을 매기자 그의 아내 고다이버가 “제발 세금 좀 낮춰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영주는 실현 불가능한 조건 하나를 달았다.
 ‘당신이 벌거벗고 성안을 한바퀴 돌면 모를까.’
 하지만 방년 16살이었던 고다이버는 실행에 옮겼다. 다만 주민들에게 ‘내가 말을 타고 알몸으로 지날 동안 창문을 닫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세금 문제가 걸려있었으니 주민들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톰이라는 양복재단사가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했다. 창문 틈새로 몰래 여인의 알몸 행진을 감상했다. 청년은 하늘의 벌을 받아 눈이 멀고 말았다. 관음증을 뜻하는 ‘피핑 톰(Peeping Tom)’이라는 여기서 말이 나왔다. 못말리는 인간의 관음 성향을 일러주는 이야기다.
 조선의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은 우스갯소리로 ‘몰카의 원조격’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카메라가 없었으므로 화폭에 담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김홍도의 ‘빨래터’를 보면 혹은 허연 두 다리를 노출한채 빨래하고, 혹은 아기에게 젖을 주는 아낙네들을 먼 발치에서 훔쳐보는 양반을 그리고 있다. 신윤복의 ‘몰카 그림’은 정평이 나있다.

단원 김홍도의 '빨래터'

 

 ‘단오풍정’은 속살을 드러낸채 목욕하는 기녀들을, 그것도 어른들도 아닌 동자승 두 명이 바위 틈새에서 엿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월야밀회’는 기녀와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정변야화’는 야밤에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인을 나이 지긋한 양반이 바라보고 있다. ‘이부탐춘’은 마당에서 짝짓기하는 개 두마리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과부와 몸종을 그렸다. 조선 뿐이 아니다. 일본의 이하라 사이가쿠(井原西鶴·1642~1693)가 쓴 소설(<호색일대남>)의 삽화를 보면 겨우 9살 주인공이 목욕하는 하녀를 망원경으로 훔쳐본다.  하녀가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자 되레 ‘내가 본 것을 소문내겠다’고 협박한다.

   관음증이 9살 짜리 어린아이조차 한순간에 사생활 침해 및 협박범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400여 년 전에 보여준 것이다.
 요즘엔 최첨단장비로 장착한 스마트폰을 누구나 손에 쥐고 있고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찍혔는 지도 모른채 은밀한 사생활이 만천하에 생생 동영상으로 유포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오죽했으면 ‘몰카공화국’ 소리를 듣는가.
 고대 그리스 시대 사냥꾼인 악타이온은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가 다른 요정들과 목욕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훔쳐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아르테미스의 저주를 받아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은 그 자신이 데려온 사냥개들에게 갈기갈기 찢어 죽임을 당했다. 마치 요즘 사람들에게 ‘우연이라도 몰카를 찍지 말라’는 경고를 준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