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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우주식물' 백일홍의 반전매력

흔히 백일홍이라는 일컬어지는 식물은 두가지다.

중국 원산인 목백일홍과, 멕시코 원산인 꽃백일홍이다. 꽃백일홍은 원래 잡초에 불과했지만 독일인인 진(Zinn)이 발견한 이후 화훼가들이 개량해서 관상용으로 재배했다. 반면 동양의 문헌에 다수 등장하는 목백일홍은 배롱나무를 가리킨다. 이 ‘목백일홍’의 이름은 가슴 찡한 전설을 담고 있다.

우주인 스콧 켈리가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핀 백일홍 사진을 트위터에 올럈다.|스콧 켈리 트위터 캡처

옛날 어떤 남자가 제물로 낙점된 처녀를 구한다며 괴물과 싸우려고 떠났다. 남자는 처녀에게 ‘성공하면 흰 깃발을,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100일 후 괴물과 한판 승부를 펼치고 돌아오던 남자의 깃발은 붉은 색이었다. 처녀는 남자가 죽은 줄 알고 크게 낙담하면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괴물의 피가 깃발에 물들었던 것이었다. 그 뒤 처녀의 무덤에서 피어난 붉은 꽃은 100일 동안이나 폈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양의 목백일홍(배롱나무)이든, 서양의 꽃백일홍이든 두 식물의 공통점이 있다. 꽃이 매우 오래 피고, 매우 예민하다는 것이다. 우선 백일홍에게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성어가 통하지 않았기에 옛 사람들의 시심을 사로잡았다. 구한말 시인·학자인 황현(1855~1910)은 “매화와 국화도 오래 못가지만…날마다 붉어져 100일이나 이어지는 꽃이랴…천번을 봐도 싫증나지 않는다”(<매천집> ‘경자고·백일홍’)고 읊었다. “이름 있는 꽃은 오래가지 못하니(名花不能壽) 이런 이치 참으로 한탄스럽다.(此理良可歎) 매화와 국화도 오히려 얼마 못 가는데(梅菊尙未幾)…하물며 이렇게 날마다 붉어져(況玆日日紅) 석 달 반이나 이어지는 꽃이랴.(强及三月半) 핀 꽃이 아직 지기도 전에(開者未遽落) 꽃봉오리가 계속 이어서 터진다.(未開續續綻)…천번을 보고 보아도 싫증이 안 난다(不厭千回看) 드디어 꽃나무 중에서(遂令卉譜中) 의젓하게 으뜸을 삼게 하는구나.(儼然爲之冠)”

동양의 백일홍. 동양에서는 배롱나무를 백일홍이라 했다. 동양의 백일홍이나 서양의 백일홍이나 꽃이 오래 피고 예민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고려말 학자 문인인 목은 이색(1328~1396)은 “백일 내내 빨갛게 피는 선경의 꽃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 모습 여전히 농염하다”(<목은집> ‘시·백일홍’)고 찬양했다.
“사시 내내 푸르고 푸른 소나무 잎이라면(靑靑松葉四時同) 백일 내내 빨갛게 피는 선경의 꽃이로다(又見仙파百日紅) 새것과 옛것이 서로 이어 한 색깔을 이루다니(新故相承成一色)조물의 묘한 그 생각은 끝까지 알기 어렵구나(天公巧思진難窮)…여름부터 가을까지 꽃 모습 여전히 농염해라.(自夏조秋態自濃)”
또 백일홍은 ‘자극에 민감한 식물’로 도 알려졌다. “간지러운 것을 참지 못해 손가락으로 긁으면 흔들린다”(<산림경제>)고 해서 ‘파양수(파痒花)’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 전기 학자 문신인 김일손(1464~1498)은 백일홍을 간지러움을 참는 수줍은 여인에 비유했다.
“수줍은 여인, 푸른 치마 붉은 소매로 아리따움 견주는데(碧裙紅袖競언然)…풍류를 독점해서 여름 꽃 압도하고(獨占風流當夏艶) 얼굴빛은 봄꽃들도 당해내지 못한다(不將顔色競春姸) 간지럼 시키면 신선의 손톱인지 돌아보고(파痒還擬爬仙爪) 교령을 풀어도 웃음을 참고 잔치에 끼지 않네.(忍笑休敎狎禁筵)”(<탁영집> ‘칠언율시·백일홍’)
최근 미 항공우주국(NASA)가 우주정거장 실험실의 무중력 환경에서 백일홍을 꽃피웠다고 발표했다. 왜 하필 백일홍이냐.
나사 관계자는 “이 꽃이 오래 피고(60~80일) 환경변화와 빛의 특성에 민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백일홍의 재배에 성공하면 ‘우주 식물 재배 프로젝트’에 중대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옛 사람들의 시심을 자극해온 백일홍의 별난 성질이 우주실험의 안성맞춤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