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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선화공주님 대체 어디 계십니까

서동(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등장하는 설화다. 서동이 경주 시내에 동요를 퍼뜨려 평소 연모했던 공주를 얻은 뒤 익산에 공주를 위한 절(미륵사)를 지었다는 설화를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2009년 1월 이 철석같은 믿음이 깨졌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절을 세운 이는 좌평(16관등 중 첫번째)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라고 새긴 사리봉안기를 발견한 것이다.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가 절의 주인공이라면 <삼국유사> 내용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얘기다. 역사고고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안타깝지만 ‘선화공주=가공인물’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미륵사가 3개의 절을 합친 구조라는 점을 착안한 색다른 주장도 제기됐다. 동·서의 절은 백제 출신인 사택왕후가, 가운데 절은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화공주와 사택왕후는 무왕의 두 부인이었다는 주장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지금까지 무왕과 선화공주의 부부묘로 알려진 익산 쌍릉으로 옮겨갔다.
이 쌍릉에서 최근 또 한 번 학계를 ‘멘붕’에 빠뜨릴 발굴결과가 나왔다. 쌍릉 중에서도 무왕묘로 추정된 대왕묘에서 20~40대 성인 여성의 치아 4점이 확인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정확히 7년 전 ‘가공인물’로 폄훼되어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던 선화공주가 부활한 것이 아니냐”며 흥분할 법도 하다.
그러나 낙관은 금물이다. 선화공주가 쌍릉 가운데 대왕묘의 주인공이라면 소왕묘에 묻인 이는 누구인가. 다시 한 번 치열한 토론의 장터가 열려야 할 것 같다. 학계는 애간장이 녹는다. 선화공주는 허구인가, 실재인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가 묻는다. ‘선화공주님 대체 어디 계십니까.’ 이기환 기자가 예전에 썼던 두 꼭지의 글을 참고로 올린다.

 

 

익산 미륵사 석탑(사적 11호)은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 무왕(600~641)때 창건된 국내 최고(最古), 최대의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탑은 1,400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6층 일부만 남았고, 1915년 일제가 붕괴를 막기 위해 싸 발라 놓은 콘크리트에 무겁고 늙은 몸을 기댄 채 아슬아슬 버티고 있었다. 지금까지 누누이 일제가 흉물스럽게 콘크리트로 싸 바른 것에 대해 비난해왔지만,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륵사 서석탑에서 나온 명문사리기.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왕후가 절을 지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콘크리트는 최첨단공법이었다
당시만 해도 콘크리트 공법은 그야말로 최첨단 기법이었으니까. 콘크리트는 기원전 300년 무렵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초기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의 발명 이후 1867년 프랑스에서 철망으로 보강된 콘크리트가 본격적인 콘크리트 공법의 시작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란다. 그러니까 1915년 일제가 미륵사탑 구조보강에 활용한 콘크리트 기법은 당대의 기준으로는 나름 첨단 기법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석재의 강도가 약해진데다, 보강재였던 콘크리트마저 금이 가고 군데군데 부서지면서 탑 전체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자 미륵사탑(서탑)의 해체복원 결정이 내려졌다. 그것이 1998년이다. 그러나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해체복원 사업은 첩첩산중으로 빠져간다.
우선 일제가 보강해놓은 콘크리트의 양은 185톤에 달했다. 원래 두께를 30∼40센티미터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최대 4미터나 됐다. 콘크리트 양만 185t에 달했다. 원래의 석재에 늘어붙은 콘크리트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수작업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탑을 구성하는 부재는 당초 1000개 정도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3000개에 이르렀다. 붕괴위험 속에 석재는 갈수록 늘어나고, 옆에서 보면 속 터질 노릇인 수작업으로 진행되다 보니 시간과 예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초 2007년이면 마무리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2014년까지로 늘어졌고, 예산도 당초(80억원)보다 60억원이나 늘었다.
더욱이 복원계획도 난항 그 자체였다. 몇 층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9층이냐, 아니면 잔존 높이인 6층이냐를 두고 논란이 극심했다. 자칫하면 1993년 우스꽝스럽게 복원된 동탑(미륵사 동탑)의 전철을 밟는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마치 대책 없이 병든 사람을 일반 수술대에 올려놓고 배를 짼 격이었다.
미륵사지 해체ㆍ복원사업은 이렇게 숱한 우여곡절을 벌이며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홀연히 등장한 백제왕후
2009년 1월14일, 국립문화재연구소 미륵사지 석탑보수정비사업단 조사원들의 손길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날의 작업은 약 2도 가량 기울어진 미륵사지 석탑(서탑)의 심주석을 해체하는 작업이었다.
오후 3시쯤. 조사단은 별 감흥 없이 크레인으로 약 2.5톤이나 되는 2단 심주석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조사단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노출된 1단 심주석 위에 사리공 뚜껑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저것은 백제시대 때 조성된 사리공이 분명했다. 크레인으로 들어올린 2단 심주석과 1단 심주석 사이의 틈은 석회로 밀봉된 흔적이 있었다. 이것은 백제 때 조성된 이후 아무런 훼손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조심스레 사리공(25×25센티미터, 깊이 27센티미터) 뚜껑을 열어보았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현장엔 정적이 흘렀습니다. 뚜껑을 열자 사리공 중앙에 금동제사리외호가 안치돼 있었고, 남측 벽면에 먼지를 머금은 금판이 보였습니다.”(배실장)
금판을 꺼내 먼지를 닦자 눈으로도 식별할 수 있는 글자가 보였다. ‘법왕(法王)’, ‘백제왕후(百濟王后)’ 같은 명문이 빛났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고고학ㆍ미술공예ㆍ건축ㆍ보존과학 등 연구소 내 관련 직원들이 은밀하게 ‘소환’됐다. 29명으로 구성된 수습팀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면서 작업을 이어갔다. 작업은 이튿날인 15일 오후 4시가 되서야 끝났다. 수습유물은 19종에 683점에 이르렀다.
핵심인 금제사리호와 사리봉안기(가로 15.5×세로 10.5 센티미터)는 물론 은제관식, 금괴, 금제고리, 시주자의 명문이 적힌 금제소형판과 칼, 유리 및 구슬류, 다양한 직물류 등 다양한 유물이 수습됐다. 이제부터는 보안을 지키면서 사리봉안기와 금제소형판의 명문을 해독해야 했다. 원문해석의 적임자로 김상현 교수(동국대)를 낙점했다.

미륵사의 구조는 <삼국유사>에 나온 그대로다. 3개의 금당과 3개의 탑이 모여있는 형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가운데 금당과 탑은 선화공주가, 동서탑과 동서금당은 사택왕후가 지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한다.    

 

그 여인의 이름은 사택왕후였다
서둘러 번역한 내용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 백제왕후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서 오랜 세월 선인(善因)을 심어서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三寶의 棟梁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
대체 무슨 뜻인가.
명문에는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百濟王后)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진평왕의 따님인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백제 왕후(我百濟王后), 즉 좌평(백제 16관등 가운데 최고벼슬) 벼슬인 사택적덕의 따님(佐平沙宅積德女)’이라고 못 박고 있지 않은가.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명문대로라면 사료로서 <삼국유사>의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것이었다.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곧 허구이며, 나아가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역시 허구이고, 따라서 서동요도 당연히 허구로서 모두 후대에 창작됐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충격적인 내용이 전해지면서 각 언론 뿐 아니라, 학계가 요동쳤고, 선화공주와 서동이야기를 신주 모시듯 했던 익산 지역은 일순 ‘패닉’에 빠졌다.

 

삼국유사는 과연 틀렸나?
하지만 파란만장한 하루(19일)가 지나면서 서서히 반전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과연 그럴까.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이야기, 그리고 <삼국유사>는 과연 허구일까.
20일 아침, 기자는 우선 명문을 해독한 김상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게 있어요. 명문 내용을 곱씹어보면 한 가지 일 수 있는데, 그것은「삼국유사」내용과 부합되는 점이 있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그러면서 “일단 미륵사가 무왕대(재위 600~641년)인 기해년, 즉 639년에 창건됐다는 점과 백제왕후가 창건을 주도했다는 명문은 <삼국유사> 내용과 일치한다”고 했다.
여기서 <삼국유사> ‘무왕조’를 곱씹어보자.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세요.’라 했다. 임금이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를 찾아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상을 만들고 회전(會殿ㆍ불전)과 탑(塔)과 낭무(부속건물)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공사를 도왔다.”
과연 김상현 교수의 말이 틀림이 없다. 또 하나, 미륵사 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와 <삼국유사> 기록을 맞춰 보아도 부합되는 면이 많다.
발굴결과 <삼국유사> 내용대로 미륵사는 이른바 ‘3금당 3탑’의 형식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즉 ‘중원(中院)ㆍ중앙목탑+금당’, ‘서원(西院)ㆍ서석탑+금당’, ‘동원(東院)ㆍ동석탑+금당’으로 배치된 것이 틀림없다.

 

미륵사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과 명문사리기  

무왕의 부인이 한명 뿐이었을까.
또한 발굴결과, 미륵사 터는 연못과 같은 습지에 조성되어 있음이 확연했다. 발굴 과정에서 주춧돌이 다른 절과 달리 높게 세워진 모습인데, 이는 늪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주춧돌을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을 헐고 연못을 메워 절을 조성했다”는 <삼국유사>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사랑이야기’는 무엇이고, 미륵사는 과연 누가 건설했다는 것일까. 발굴 명문에 따르면 둘 다 허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이는 노중국 교수(계명대)였다.
폭풍우가 휘젓고 간 다음날인 1월20일 노중국 교수는 “미륵사의 구조, 즉 ‘3금당 3탑’에서 실마리를 찾으면 어떠냐는 가설은 어떠냐”고 했다.
즉 명문이 출토된 것은 서 석탑, 즉 서원(西院)이었다. 그런데 절의 구조를 보면 제일 먼저 세워진 것은 중원(中院ㆍ중앙목탑+금당)이다. 노중국 교수는 예전 발굴조사결과 ‘기축년(己丑年)’, 즉 629년이라는 도장을 찍은 기와가 중원의 금당터에서 발굴된 점을 주목했다. 이로 미루어 중원은 서원(639년)보다 10년 앞선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절의 조성시기는 중원→동ㆍ서원 순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자. 재위기간이 41년이나 되는 무왕의 왕후는 과연 한 사람 뿐이었을까. 무왕의 첫째왕후가 선화공주이고, 두 번째 왕후가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서석탑, 즉 서원에서 출토된 명문은 혹 사택적덕의 따님이 발원해서 조성한 것이고, 그보다 먼저 건립된 중원은 선화공주가 세운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것은 목탑인 중앙탑과 석탑인 동탑이 이미 불에 탔거나 무너져 버리는 바람에 그 안에 반드시 있었을 명문 사리기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제왕은 석가모니 가계를 좇았다
역시 논란의 핵심은 ‘미륵사 창건 주체’를 둘러싼 ‘선화공주’와 ‘백제왕후 사택적덕의 딸’ 간 벌어진 ‘사후 영혼전쟁(?)’이었다.
학자들은 미륵사 서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 명문에 주목했다. 미륵사는 본래 미래의 중생을 제도하는 미륵불의 출현을 기원하며 세운 사찰이다. 그런데 이번에 서석탑에서 확인된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의 ‘미(彌)’ 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도리어 “석가모니(법왕)의 간략한 일대기와 함께 백제왕후 사택적덕의 딸이 가람을 창건하고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만 있다. 그러니까 명문대로라면 미륵신상이 아니라 석가불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조경철씨(한국학중앙연구원)는 우선 사리기 명문에 나오는 ‘사택지적’이라는 인물에 주목했다. 특히 ‘지적(智積)’이라는 이름이 심상치 않다. 불교와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법화경>을 보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큰 아들인 대통불(大通佛)에게는 석가와 지적 등 16명의 아들이 있다. 즉 전륜성왕→대통불→석가모니ㆍ지적의 계보로 이어지는데, 그러고 보면 석가와 지적은 형제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륜성왕은 미륵이 하생하여 중생을 제도할 때 정법(正法)으로 그 나라를 다스리는 세속의 최고통치자이자 정복군주이다.
백제는 성왕 때부터 왕계를 석가모니 가계와 연결시켜 왕실의 신성성을 고양하면서 기울어져가는 국세를 끌어올리려 했다. 성왕이라는 시호도 전륜성왕에서 비롯됐다.
성왕의 아들인 창왕은 위덕왕(威德王)이라는 시호를 얻었다. <법화경>에서는 대통불(大通佛)을 ‘대위덕세존(大威德世尊)’, 즉 위덕불(威德佛)이라도 부르고 있다. 결국 ‘위덕왕=대통불’인 셈이다. 또한 위덕왕의 아들 역시 법왕(法王)의 시호를 얻었는데, 법왕은 곧 석가모니를 뜻한다.
그러니까 불교와 백제사를 결부시킨다면 전륜성왕(성왕)→대통불(위덕왕)→석가모니(법왕) 및 지적(사택지적 가문, 즉 사씨 가문)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다.

 

출토된 사리호와 유리구슬

미륵사의 원 주인은 선화공주가 맞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왕실의 가문도 아닌 귀족가문인 사택지적이 왜 석가모니 가문과 연결되는가.
조경철씨는 이 대목에서 ‘사택’가문을 왕실의 인척으로 보고 있다. 이는 서석탑에서 나온 사리기 명문에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등장함으로써 사택씨 집안과 왕실의 인척관계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결국 ‘지적’으로 대표되는 사택씨 가문은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무왕의 왕후가 된 사택적덕의 딸은 바로 석가신앙(법화신앙)에 기초를 두고 639년 미륵사 서원(서탑+서금당)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원(동석탑+동금당)과 중원(중앙목탑+중금당)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미륵사는 석가가 아닌 미륵을 본존으로 하는 절이다. 만약 법화신앙의 기반에 있는 사택왕후가 절의 창건을 주도했다면 과연 절의 핵심인 중원, 즉 중앙목탑에 석가를 모시지 미륵을 모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의문점. 서원은 그렇다치지만 동원은 과연 무엇인가. <법화경>을 보면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탑이 솟아나오는데 그 탑 안의 다보불이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와 나란히 앉아 있다. 그러니까 석가불과 다보불은 대칭을 이루는 한 세트이며, 따라서 미륵사 서석탑은 석가탑, 동석탑은 다보탑의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서원과 대칭되는 동원 역시 백제왕후가 세웠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불상 가운데 상하삼존불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석가-미륵-다보의 배열이 된다. 이것은 미륵사의 가람배치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미륵사는 비록 3원(院)의 형태지만 전체적으로는 1원(院)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셋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사상은 법화신앙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연상시킵니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의 미륵삼회(彌勒三會)와 법화신앙의 회삼귀일이 통합을 이룬 사찰로 볼 수 있습니다.”(조경철씨)
문제는 미륵사 서원+동원의 발원자인 사택왕후가 과연 미륵을 본존으로 하는 미륵사 전체를 창건했을까. 당연히 미륵신앙에 돈독한 다른 한 분의 발원자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분이 미륵사의 근본인 중원, 즉 중앙목탑+중금당의 발원자라는 것이다. 
 
무왕과 의자왕, 사택왕후 
여기서 선화공주 이야기가 나온다.
주목되는 기사가 <삼국유사> ‘탑상·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 나온다.
“신라 흥륜사 진자(眞慈)스님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자 꿈에서 ‘웅진(熊津) 수원사(水源寺)로 가서 미륵선화(彌勒仙花)를 찾아라.’고 했다.』
물론 미륵선화의 선화(仙花)는 선화공주의 선화(善花)는 한자가 다르다. 하지만 둘 다 미륵과 관련되어 나오므로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선화공주는 미륵선화처럼 미륵의 화신이 되어 미륵이 하생하는 미륵사를 건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원+동원의 발원자(백제왕후)와, 중원의 발원자(선화공주, 혹은 무왕+선화공주)가 다른 이유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연구자들도 많다.
길기태 씨는 미륵사 중원을 세운(629년 쯤) 직후인 630~632년의 정치적 격동기에 주목한다. 당대의 <일본서기> ‘서명(舒明)’을 보면 “무왕이 아들 풍장(豊章)을 왜에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다음 무왕 33년(632년) 맏아들 의자(義慈)가 태자로 등극한다. 무왕은 왜 재위 33년이나 지난 뒤에 태자를 세웠을까. 또 하나 왜 다른 아들인 풍장을 왜에 보내고서야 의자를 태자로 삼았을까. 길기태씨는 “바로 이 격변기에 석가사상을 따르는 사씨, 즉 사택씨 가문이 급부상했으며 이 석가사상에 기초한 미륵사 서원이 건립된 것(639년)이 아닐까”하고 추정했다.

 

사택은 의자왕이 쫓아낸걸까
또 하나 역사서 기록에 보이는 흥미로운 대목.
“642년 정월 국주모(國主母)가 죽자 의자왕은 동생 풍장의 아들인 교기와 외사촌 형제 4명, 그리고 내좌평 기미, 당시 유명한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했다.”(<일본서기>)
주경미 교수(부경대)는 ‘국주모’는 바로 미륵사 서원의 발원자이자 사리봉안기 명문에 나오는 사택적덕의 따님인 백제왕후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의자왕은 등극 직후에 이 국주모의 가문을 추방한다.
김주성 교수(전주대)는 “이 대목은 의자왕이 평소 외가 측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혹은 이런 생각도 든다.
의자왕이 불만을 품은 국주모, 즉 백제왕후는 혹 아버지 무왕의 계비(繼妃)가 혹 아니었을까. 의자왕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니기에 태자 등극서부터 상당한 갈등을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사택씨 가문을 추방시킨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무왕의 첫 번째 왕후는 누구일까. 혹 미륵사 창건의 밑그림을 그렸고, 중원의 발원자가 된 선화공주는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선화공주가 죽자 무왕은 세력가인 사택가문의 따님을 왕후로 맞았고, 그 왕후가 미륵사 서원과 동원을 발원하지 않았을까.
 
쾌도난마식 해석은 금물
나아가 선화공주를 반드시 신라사람이라고 봐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도 나온다.
김수태 교수(충남대)는 설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는 지금의 익산과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로「선화」라는 용어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이름으로서 보통명사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즉, 선화공주는 익산지역에서 미륵신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인물로 파악되며, 선화공주 설화는 익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인데, 후대에 진평왕의 공주로 분장된 것이라는 얘기다. 김교수는 미륵사가 건립될 즈음 익산세력이 급부상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즉, 신라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익산이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익산은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처로 각광받았다는 것. 이로써 수도인 부여나 옛 수도인 웅진과 달리 권력의 중심지를 익산으로 이동시키려는 움직임이 나온 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왕대 후반에 이르면 사비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씨, 즉 사택씨 세력이 득세함으로써 익산세력은 몰락하고 만다.
김수태 교수는 “630년 무왕이 사비의 궁궐을 수리하고, 왕은 웅진성으로 거동했다는 <삼국사기>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즈음 무왕은 익산 경영을 포기하고 다시 백제의 옛 수도인 웅진과 사비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선화공주가 창건을 추진하던 미륵사에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씨의 백제왕후가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은 미륵사 창건주체가 바뀌었음을 알려줄 뿐 아니라 더 이상 익산의 미륵불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백제 왕실의 의지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수태 교수)
이 또한 그럴듯한 가설이다.
물론 김상현 교수는 “백제왕후가 미륵사 전체를 발원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미륵사는 처음부터 3탑3금당이라는 가람배치라는 기본으로 하여 조성된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중원의 발원자와 동ㆍ서원의 발원자가 다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서석탑에서 나온 명문 그대로, 미륵사는 백제왕후의 발원으로 창건된 것미륵사는 백제왕후의 발원으로 창건된 것이라는 흔들림 없는 주장이다. 사리봉안기 명문은 당대의 기록이고, 선화공주 이야기는 13세기에 후대의 인식과 설화적 윤색을 가한 기록(<삼국유사>)이라는 점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 주장 또한 설득력이 있다.

 

쌍릉의 주인공은 수수께끼

그렇다면 2016년 1월 벽두부터 쌍릉에서 전해진 소식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무왕묘로 알려진 대왕묘에서 성인여성의 치아가 나왔다는 소식이다. 그렇다면 쌍릉 가운데 큰 묘의 주인공은 선화공주란 말인가. 치아 근처에서 발견된 등잔이 신라계통이라는 분석이 있으니 그럴 듯하다. 하지만 아직 모른다. 등잔이 신라계 토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으니까.

그리고 큰 무덤의 주인공이 선화공주라면 작은 무덤은 누구 것이란 말인가. 무왕은 대체 어디에 묻혔다는 건가. 수수께끼 투성이다. 또한번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할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