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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바둑 간첩, 한성백제를 멸망시켰다

오는 3월9일부터 역사적인 바둑대결이 펼쳐집니다. 구글이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이세돌 9단 간의 5번기입니다. 이미 1990년대 후반 체스 세계챔피언을 무릎꿇린 인공지능은 이제 경우의 수가 무한대라는 바둑에서 입신, 즉 신의 경지라는 9단, 그것도 세계최정상급 기사인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인공지능, 즉 컴퓨터가 경우의 수가 10의 180제곱, 즉 무한대라는 바둑에서 인간에게 도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감정, 직관, 통찰력이 집중되는 바둑에서조차 승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번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을 열렬히 응원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마음마저 컴퓨터에게 빼앗긴다는 게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는 인간과 인공지능 대결을 계기로 바둑의 오묘한 세계에 한번 빠져보고자 합니다. 바둑이 얼마나 심오하기에, 바둑이 얼마나 요지경 같기에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떨쳤을까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세력을 떨쳤던 한성백제가 바둑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까요. 이번 주 주제는 '바둑 간첩, 한성백제를 멸망시키다'입니다. 바둑의 세계에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바둑을 일컫는 말은 여러가지다.
난가(爛柯)의 전설’(“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지 모른다”)에 등장하는 ‘신선놀음’이 바로 바둑을 지칭힌다. 또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 해서 ‘수담(手談)’, ‘앉아서 은둔한다’는 뜻의 ‘좌은(坐隱)’, 흑돌과 백돌을 의미하는 ‘오로(烏鷺·까마귀와 해오라기)’ 등….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지방천원(地方天圓)에서 유래된 ‘방원(方圓)’, 근심을 잊게 한다는 것에서 ‘망우(忘憂)’ 등의 이름도 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맞대결을 앞둔 이세돌 9단

■바둑의 기원
그런 바둑의 기원은 4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요임금의 고사이다.
요 임금에게는 단주(丹朱)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요임금의 뒤를 이을 이는 단주였다. 하지만 요 임금은 “아들 단주는 덕이 없고, 싸움을 좋아한다”고 걱정했다. <박물지>와 <증흥서>, <테평어람> 등 중국문헌은 “요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를 가르치려고 바둑을 만들었다.(堯造圍棋 丹朱善之)”고 했다.
만고의 성인이신 공자님은 어떤가. <논어> ‘양화’를 보자.
“온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곳이 없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박혁(바둑과 장기)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그래도 그걸 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빈둥빈둥 노느니 ‘바둑과 장기’(박혁·博奕)로 마음을 다잡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개로왕의 비극
이른바 동이계는 유난히 바둑을 사랑했다. 
예컨대 <북사>와 <주서>, <수서> 등은 일제히 “고구려와 백제인들이 바둑을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오죽했으면 바둑 때문에 한성백제 500년 사직이 멸망의 길로 접어 들었을까. 무슨 말인가.
장수왕이 즉위한 뒤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처절한 복수전을 꾀한다.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군에 의해 전사한 이후 별러왔던 복수전이었다.
장수왕은 스파이전을 선택한다. 극비리에 백제를 도모할 첩자를 구한 것이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손들고 나섰다.
도림은 당시 국수(國手)라 일컬어질만큼 바둑의 고수였다. 백제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를 매우 좋아했다.
도림은 거짓 죄를 짓고 백제에 투항했다. 도림은 “왕(개로왕)에게 바둑을 한 수 지도하고 싶다”고 접근했다. 개로왕이 도림을 불러들여 시험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개로왕은 도림을 상객으로 모셨다.
“우리가 이렇게 늦게 만나다니….”
바둑으로 개로왕을 홀린 도림은 서서히 마각을 드러냈다.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제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성곽과 궁실이 수축·수리 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도림의 바둑 실력에 빠진 개로왕은 “알겠다”고 적극 찬성했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대로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 때문에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다. 도림은 고구려로 달려가 장수왕에게 고했다.
“이제 됐습니다.”
도림의 보고를 들은 장수왕은 백제 정벌에 나섰다.(475년)
475년 9월,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자 개로왕은 땅이 꺼지도록 후회한다.
“내가 어리석었다. 간사한 자의 말을 믿다니….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다. 위급해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개로왕은 결국 참담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백제의 한성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는 종막을 고한다.
임금의 빗나간 바둑 사랑이 결국 망국의 나락으로 빠뜨린 것이다.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공을 막지못한채 한강 이남 도성에서 붙잡혀 아차성 밑까지 끌려와 참담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사진은 남아있는 아차산성의 흔적

■당나라-신라 바둑 연승최강전
신라의 바둑사랑도 어지간했다.
효성왕(재위 737~742)을 보자. 효성왕은 태자시절, 궁정(宮庭)의 잣나무 밑에서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바둑을 두며 약속했다.
“내 잊지 않겠다. 혹여 나중에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을 까맣게 잊었다. 신충이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다. 신충이 부른 노래가 삽시간에 퍼졌다. 그때서야 왕은 신충을 기억해냈다. 왕은 그제서야 무릎을 치고 신충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러자 잣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738년, 역시 효성왕 때의 일이다.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두 가지를 당부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중국과 비길만 하다는구나. 그들에게 대국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해라.”
그러면서 신신당부한 한마디.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구나. 당나라의 바둑실력을 유감없이 뽐내고 오너라.”
<삼국사기>를 보라.    
“당 현종은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楊季膺)을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서 나왔다.(國高奕 皆出其下) 이때 왕(효성왕)이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보물·약품 등을 하사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효성왕조’)
물론 신라의 바둑실력은 당나라를 넘지 못했다. 당나라는 바둑을 국가차원에서 육성했으니 말이다.
즉 궁정에 ‘기대소(棋待詔)’라 하는 전문기사제도를 둘 정도였다. 그랬으니 현종은 바둑을 잘 둔다는 신라 사람들에게 선진바둑의 실력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자세한 승패의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 국수(國手) 양계응에 맞서 신라 고수들이 돌아가며 도전하는 흥미진진한 반상대결을 벌였을 것이다. 어떻든 반상의 나·당 전쟁으로 서라벌이 들썩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신라고수들은 연전연패했다. 효성왕은 신라 기사(棋士)들을 ‘지도’한 당나라 사절에게 상을 내렸다.
꼭 똑같지는 않지만 아마도 요즘의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의 스타일이 아닐까. 양계응을 대표로 하는 중국팀과 신라팀이 연승제로 대결을 벌인….
그 단체전에서 중국이 전승을 벌였다는 것이다. 1270여 년이 지난 요즘 세계최강전에서는 한국(11회 우승)이 중국(3회 우승)을 앞서고 있지만…. 

경주 분황사 출토 통일신라시대 바둑판 모양 전돌. 가로 세로 각각 15줄을 넣었다. 길이 42cm, 너비 43cm

■이세돌 대 알파고

3월9일 또하나의 바둑 빅이벤트가 열린다. 이번에는 한중간 싸움이 아니다.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5번기다. 
물론 전문가들은 이세돌 9단의 압승을 점친다. 바둑의 수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바둑의 ‘경우의 수’는 사실상 무한대다. 한번 놓을 수 있는 가짓수만 361개(19X19)에 달한다. 흑과 백이 첫수를 주고 받는 경우의 수만 12만9960(361X360)가지에 이른다. 두 번 씩만 주고받아도 167억 가지(361X360X359X358)가 되고, 모든 경우의 수를 굳이 계산하면 ‘10의 170제곱’에 이른다. 우주의 원자수 10의 80~100제곱 보다 훨씬 많다. 요순시대부터 시작됐다는 바둑의 5000년 역사에서 똑같은 판이 나왔을 리 없다. 옛 사람들이 바둑을 우주에 견줘 바둑판의 한가운데 점을 하늘의 중심인 ‘천원(天元)’이라 한 것은 천고의 혜안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수학의 ‘경우의 수’니 확률로 계산할 수 없는 ‘패’나 ‘먹여치기’ ‘되따기’ 등의 요지경 같은 바둑룰까지 있다. 상대방의 수를 그대로 따라 두는 ‘흉내바둑’이 있기는 하다. 1929년 우칭위안(吳淸源)이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에게, 1965년 후지사와 호사이(藤澤朋齊)가 린하이펑(林海峰)에게 각각 흉내바둑을 두었다. 하지만 어떤 흉내 바둑도 70수를 넘지 않았다. 그저 승부를 위한 부분전술일뿐 ‘인간의 체면’을 걸만한 전략은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불끈불끈 솟아나는 인간의 승부욕이 똑같은 바둑을 용납하지 않았다. 순간의 감정과 직관을 발휘해서 그때 그때의 국면에 대처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까지 정복하겠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기업들이 인공지능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감정과 직관을 불어넣기 위해 바둑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체스에서는 로봇이 인간을 추월했지만 차가운 논리 만으로 둘 수 없는 바둑은 난공불락으로 치부됐다.
그런데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알파고)이 최근 프로 2단인 유럽바둑챔피언을 꺾은 뒤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알파고는 컴퓨터의 이미지 인식능력 98.52%인 구글은 인간의 97.53% 보다 뛰어난 점을 앞세워 바둑정복에 나서고 있다. 3000만국의 프로기사 대국장면을 이미지 인식으로 읽어내 판세를 분석하고 좋은 수를 찾아가는 식이다.
물론 아직은 알파고의 기력이 이세돌 9단에게는 역불급인 듯싶다.
 하지만 꺼림칙하다. 만일 로봇이 이긴다면 기계가 인간, 그것도 입신의 경지라는 바둑 9단의 마음까지 훔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원래는 약자를 응원하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이번에는 강자인 이세돌 9단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다. 만약 인간의 경우의 수가 무한대라는 바둑에서조차 무릎을 끓는다면 어찌되는가. 컴퓨터가 인간의 직관과 통찰력을 지배하는 세상, 즉 인간을 통치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