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정조 임금이 '안(평대군)빠'가 된 사연

최근 도난 당한 <삼국유사> ‘기이편’을 갖고 있던 문화재 사범이 적발됐습니다. 이 사람은 1999년 도난된 <삼국유사> ‘기이편’을 어떤 경로인지 모르지만 입수해서 보관했다가 공소시효가 끝난 줄 알고 올해 1월 경매시장에 내놨다가 잡혔습니다. 범인을 잡고, 문화재까지 찾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난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2001년 도난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행방이 묘연한 문화재인데, 바로 안평대군이 직접 쓴 <소원화개첩>입니다. 1987년 국보 238호로 지정된 문화재인데요. 크기가 A4용지보다 작은 크기인데 안평대군의 낙관과 도장이 찍힌 진적이어서 국보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직 오리무중인 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번 주는 <소원화개첩>의 출현을 갈망하면서 안평대군의 삶과 글씨를 되돌아보려 합니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조선시대 내내 국보급 보물로 꼽혔고, 중국인들도 반드시 소장하고 싶은 보물로 여겼답니다. 안평대군의 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이 조선 뿐 아니라 중국 사대부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안평대군을 좋아하는 이른바 ‘안빠’들도 많았답니다. 이번 주 제79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안평대군의 작품을 소장하라-조선의 안(평대군)빠들’입니다.  


“안평대군(1418~1453)의 글씨가 자연미를 방불케 하니 불세출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동방에 서도를 일으켰고… 중국 조정의 선비들이 또한 글씨 한 장씩만 얻어도 가첩을 만들어 보배로 사랑하고 모방하여 비교하려고….”
조선전기의 문인 최항(1409∼1474)은 시문집 <태허정집>에서 안평대군(이용)의 글씨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구구절절 묘사했다. 허언이 아니었다. 1450년(세종 32년) 명나라 사신인 예겸과 사마순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안평대군이 쓴 현판의 두 글자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알려진 <소원화개첩>. 국보238호로 지정됐다. A4용지보다 작은 소품이지만 진적임을 알려주는 비해당(안평대군의 호)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다.

 

■중국에서도 선풍을 일으킨 안평대군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세째아들(안평대군)에게 “중국 사신을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과연 예겸 등은 안평대군의 글씨에 흠뻑 빠져 “지금 중국에서는 진학사가 글씨를 잘 써서 유명하지만 여기 이 왕자(안평대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예겸 등은 예의를 다해서 받아간 안평대군의 글씨는 중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예컨대 조선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네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합니까.”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 가운데서 어찌어찌해서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해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대부분이 안평대군의 글씨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사온 글씨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기뻐했다.(<연려실기술> ‘전고·필적’)
머나먼 중국까지 가서 애써서 사왔다는 서예작품이 다름 아닌 자신의 것이라고 확인한다면 얼마나 흐뭇했겠는가. 안평대군은 조맹부(1254~1322)의 ‘송설체’를 표방했다. 원나라 서예가인 ‘송설도인’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정통적인 서법과 고법의 전통이 당나라 중엽 이래 황폐화했다는 것을 개탄하면서 복고주의를 표방했다. 필법이 굳세고 아름다웠으며 결구가 정밀했지만 호연지지가 부족하고 유약하다는 상반된 평가도 받는다.
안평대군은 바로 이 조맹부의 필법을 바탕으로 ‘호매한 필력이 대단했으며 늠름한 기운이 날아 움직일 듯한 보물’이라는 극찬을 받았다.(<용재총화>)
동시대인인 박팽년(1417~1456)은 “글씨 좋아하는 왕자가 서예를 배워(好書王子喜臨池) 송설의 풍류가 다시 일어섰구나(松雪風流又一時)…인간의 신묘한 솜씨 오래 흠모했는데(久欽妙手人間少) 과연 높은 이름 나타나 천하가 다 알게 되었네(果見高名天下知)…”

안평대군의 또다른 진적인 <몽유도원도> 발문.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들려준 꿈 이야기가 생생한 필치로 적혀있다.

 

■천하의 인재들이 꼬인 안평대군의 휘하
세종대왕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아 하나같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세종대왕은 소헌왕후 사이에서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등 여덟왕자를 두었다. 그 중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세 사람이 유독 도드라졌다. <연려실기술>은 안평대군(이용)의 일생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군은 특히 시와 문에 능했다.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고 옛 것을 좋아했다. 좋은 경치를 찾아 북문(자하문)밖에는 무이정사를, 남호(용산 부근의 한강)에는 담당정을 지었다. 만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안평대군의 주변으로 글깨나 쓰고 짓는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평대군 역시 이름난 문사들을 휘하에 두려고 애썼다.
“문사들이 모여들어 달빛아래 배를 띄워 시를 짓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었으며,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소리를 했고, 한때의 이름있는 선비와 모두 사귀었다. 무뢰배와 잡인들도 많이 따랐다. 바둑판과 바둑알을 모두 옥으로 만들었고, 바둑알에 도금까지 할 정도였다. 비단 위에서 진서와 초서, 행서를 휘갈겨 썼다. 그 글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내주었다.”(<용재총화>) 

 

■형(수양대군)에게 덜미 잡혔다 
그런데 그것이 빌미가 됐다. 당대 세상의 모든 문사들이 안평의 품에 갔다는 것, 그것은 야심으로 가득찬 둘째형(수양대군)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의 말을 곱씹으면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세종 이후 태평성대를 구가하자 문장을 잘하고 절의에 찬 선비들이 조정에 깔렸다. 이때 여러 왕자들이 다투어 문객들을 맞았는데 온 문인(文人)·재사(才士)들이 안평대군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한명회가 인재가 모여들지 않았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은밀하게 말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문인들은 필요없습니다. 나으리(수양대군)는 문인보다는 무사들과 결탁해서 세력을 쌓으십시요.’ 한명회의 모책을 들은 수양대군은 그 꾀를 써서 내란을 평정하고….”(<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안평대군의 죄라면 주변에 사람을 많이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53년 10월10일 정권탈취의 야욕을 드러낸 수양대군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것이 계유정난이다. 안평대군이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결탁해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하려는 음모를 저지하려고 거사할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안평대군은 그 날짜로 강화도로 유배됐고, 단 8일만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안평대군의 나이 36살이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견은 안평대군의 무릉도원 꿈을 전해듣고 그림으로 남겼다. 일본 덴리대에 소장돼 있다.

 

■누명을 자초한 안견의 배신
세상인심은 시세에 따라 변하는 법. 안평대군의 부르심을 피해 계유정난의 화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회자됐다.
이른바 안평대군의 꿈을 바탕으로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은 어떤가. 윤휴(1617~1680)의 <백호전서>를 보면 안견과 안평대군의 기막힌 이야기를 전한다.
즉 안견은 안평대군이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간파하고 되도록 멀리 하려 했다. 그러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안평대군이 좀처럼 안견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안평대군은 북경에서 사온 용매묵(龍媒墨)을 안견에게 내리고는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안평대군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보니 용매묵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화가 난 안평대군이 노복들을 꾸짖었다. 노복들은 결백을 주장하면서 곁눈질로 안견을 의심했다. 그때 안견이 일어나 소매를 떨치며 변명을 하던 중에 소매 안에서 먹이 떨어졌다. 안견의 짓이 분명했다. 배신감을 느낀 안평대군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얼씬도 하지 마라”고 쫓아냈다. 안견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했다. 이 일은 화제가 되어 장안에 퍼졌다. 그것은 분명 안견의 계책이었다.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의 회오리에 빠지자 문객들이 대거 희생됐지만 안견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안평대군을 멀리해서 목숨을 건진 이들
안지(1377~1464)와 성간(1427~1456)의 이야기도 인구에 회자된다.
인재 모으기에 힘썼던 안평대군은 당시 덕망이 있던 안지를 무던히도 초청하려 했다. 여러차례 편지를 보내 “한번 만나보자”고 청했다.(<연려실기술> ‘세종조 고사전말 문형’) 심지어 병풍이나 족자에 글씨를 써서 선물공세까지 해댔다. 그러나 안지는 “한번 찾아뵙겠다”고 대답하고는 끝내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안평대군 처소에서 여러 문인들이 글짓기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자 안평대군은 “안지의 글이 정평이 나있으니 한번 그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안지는 가져온 글들을 보고 일부러 잘 쓴 글은 못썼다고 하고, 못쓴 글을 잘 썼다고 했다. 안평대군의 품에 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모든 선비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 늙은이가 나이 많아서 정신이 없으니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안평대군 역시 그 말을 듣고 안지를 구하기를 포기했다.
지독한 책벌레로 꼽히는 성간의 어머니 이야기도 극적이다.(<용재총화>)
안평대군은 성현(1439~1454)의 둘째형인 성간을 휘하에 두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역시 사람을 시켜 “한번 교유해보자”고 초청했다. 부르심을 받고 안평대군의 용산 정자(담담정)을 찾아갔다. 안평대군은 성간의 시에 찬사를 보내면서 후히 대접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만나 보고 싶다”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성간의 어머니는 “다시는 만나지 말라”면서 신신당부했다.
“왕자의 도(道)는 문을 닫아 손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어찌 (안평대군은)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반드시 패할 것이다. 너는 같이 사귀지 말아라.”
어머니의 말을 들은 성간은 안평대군이 몇차례 초청했지만 끝내 가지 않았다. 안평대군이 마침내 계유정난으로 사사되자 성간의 집안은 어머니의 혜안이 탄복했다.

명나라 사신인 예겸(倪謙)과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1418~1456), 신숙주(1417~1475), 정인지(1396~1478) 사이에 나눈 창화시(倡和詩·시를 읊으면 다른 사람이 받아 노래하는 화답시)를 모은 시권이다. 예겸은 1450년(세종 32년)는 20일 동안 조선을 방문했다. 예겸은 안평대군의 글씨를 중국에 알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안평대군 작품 소장은 사대부의 로망
안평대군은 1747년(영조 23년)이 되자 비로소 관작을 회복했다. 명예회복하기까지 자그만치 294년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조선시대 내내 지금으로 치면 국보급 유물의 대접을 받았다.
하기야 시·서·화에 모두 능해 3절(絶)의 칭호를 받았고, 양사언·김구·한석봉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예가로 꼽혔으니 그럴만도 했다.  
최항·박팽년 등 동시대 문인·학자들은 물론 후대 학자들 가운데서도 지금의 속된 말로 ‘안(평대군)빠’들이 많았다.
조선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1595~1682)은 “안평대군의 글씨는 그 변화무쌍함이 신의 경지”라 했다. 조선 중기 문인 정두경(1597~1673)은 “명필의 족보를 보면 첫번째가 김생이고, 다음이 고려 이암(1297~1364)이며 그 다음이 안평대군 이용”이라 했다.(<동명집> ‘해동명적’)
중흥군주인 정조 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홍재전서> ‘일득록·문학’)
“안평대군의 글씨는 조선의 명필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글씨의 모양새가 고상하고 점획이 근엄하다. 강건하면서도 원활하고 우아하면서도 아름답다. 안평대군은 족제비털로 백추지(다듬이로 부드럽게 편 흰종이)에 글씨를 섰는데 오직 한석봉(1543~1605)만이 그 묘미를 깨달았다.”
“안평대군의 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사대부의 자랑이자 로망이었다.
조선 중후기의 문인 송준길(1606~1672)은 이후원(1598~1660)에게 보내는 편지(1640)에서 “나에게도 안평대군의 친필이 있다”고 자랑했다.(동춘당집)
“저에게도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친필이 있습니다. 형(이후원)께서 보신다면 형의 기호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것을 단연 으뜸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안평대군 해적판까지 찍은 백사 이항복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아예 안평대군이 쓴 책의 인쇄본 2~3책을 베껴서 활자로 만든 뒤 다시 인쇄본을 여러 책 찍어냈다.
그러자 인쇄본을 구하려는 사대부들이 앞다퉈 달려왔다고 한다.(<백사집>) 지금 같으면 불법 복제물, 즉 해적판을 마구 찍어냈으니 백사는 저작권법으로 큰 처벌을 받아야 했을 판이다. 그러나 백사가 안평대군의 해적판을 찍어 훈련도감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다소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나 할까. 그저 객쩍은 소리다.
조선 중기의 문인 윤근수(1537~1616)도 안평대군이 표제를 쓴 책과 족자(서축)은 “필획이 정밀하고 광채가 나서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는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모두 희귀한 보물”이라 했다.(<월정집>)
“지금도 사람들이 그(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는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커다란 옥 같은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
그러면서 윤근수는 “친구가 선물로 준 안평대군의 책과 족자를 모두 잃어버려 가슴이 아팠다”면서 “겨우 비해당첩(안평대군의 글씨책)을 얻었는데 아직 장황(표지장식)을 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서울 종로 부암동의 안평대군 집터.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돼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안평대군은 ‘수집덕후’
안평대군은 자신의 글씨와 시 뿐 아니라 중국 서화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동문선>에 수록된 신숙주의 ‘보한재집·화기’를 보라.
“비해당(안평대군)은 서화를 사랑했다. 다른 사람이 한 자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을 갖고 있다고 하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해서 좋은 표구로 소장했다.”
안평대군은 언젠가 소장품들을 모두 꺼내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수집열을 한껏 과시했다.
“내 천성이 소장을 좋아하니 이것이 병인 것 같소. 끝까지 탐색하고 널리 구하여 10년이 지난 뒤에 이만큼 얻게 되었소.”
안평대군은 시쳇말로 ‘수집 덕후’임을 자랑한 것이다. 안평대군은 이 자리에서 소장 작품들을 일일이 소개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안평대군의 소장품은 동진·당·송·원 등 5대 왕조 작가 35명의 작품 222축(산수 84점, 조수초목 76좀, 누각인물 29점, 글씨 33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자신의 수집열을 과시하면서 끝에 덧붙인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아! 물(物)이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다 때가 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운수가 있다.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어찌 알겠는가.”
안평대군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계유정난으로 사사된 뒤 안평대군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소장품들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 작품 가운데 일부가 시중에 흘러나왔다.
“안평대군이 소장한 서첩과 명화, 서적 중에는 몰수되었다가 세상에 흘러나온 것 또한 적지 않았다. 내(윤근수)가 젊었을 적에, 세상에 돌아다니는 안평대군의 시축 가운데 성상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지은 시가 있다. 안평대군이 첫머리에 시를 쓰고 장난삼아 붉은 먹으로 매화와 대나무 한 가지씩을 그려놓았다.”(<월정집>)

 

■안평대군의 벼루도 특별했다
안평대군이 쓰던 물건 역시 특별했다. 예컨대 그가 쓰던 문방사우는 예사스럽지 않았다. 언젠가 안평대군의 옛 별장터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희한한 물건을 출토했다.
“농부가 옛터에서 밭을 갈다가 오래된 벼루를 발견했다. …이 벼루는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색깔 또한 조선의 것이 아니다. 결코 보통 사람이 갖고 있던 물건이 아니다. 별장의 옛터에서 얻었으니, 안평대군의 물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윤근수는 “안평대군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얻어서 자기 생각대로 다시 만들어낸 것”이라고 추측했다. 문제의 벼루가 나온 안평대군의 옛 별장터는 승지 박동열(1564~1622)이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벼루는 박동열의 것이 됐다. 윤근수는 안평대군의 벼루를 차지한 박동열을 무지무지 부러워하고 있다.
“안평대군이 죽은지 백여 년이 넘었고 그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 벼루는 박(동열)군의 소유가 됐다. 박군은 한창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날마다 글씨를 쓰고 있다. 벼루가 박군에게 간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고 하겠다. 그것도 운명이 아닌가.”
윤근수는 “박군이 보물로 간직하여 영원히 반남 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지키는 가보로 삼기를 바란다”고 덕담을 전했다.

 

■잘못 쓴 글자도 안평대군이기에 유행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안평대군이 취중에 금니(金泥·금박가루를 아교풀에 갠 것)를 검은 비단에 흥건히 뿌린 뒤 붓을 들어 금니의 점을 따라 초서를 썼다.
다른 글자는 절묘하게 감춰졌지만 오로지 사람 인(人)자  위에만 세개의 금니 흔적만 감춰지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급히 붓을 안쪽으로 놀려 세 개의 금니점을 그래도 둔채 사람 인(人)자를 만들었다. 이것은 단점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안평대군을 따라 이 글자를 사람 인(人)자로 알고 쓴다.“(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목구비’)
이처럼 안평대군의 작품이나, 소장품, 그리고 그의 채취가 묻은 모든 물건, 심지어는 그의 실수까지도 조선의 국보급 유물과 자취로 전해졌다.

 

■소원화개첩의 행방 
그의 진적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유정란의 희생자였기에 모든 소장품들이 몰수됐고,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유독 많은 전란에 시달렸으니 그 사이 어쩧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안평대군의 해서로 <몽유도원도>에 실린 ‘몽유도원기’는 일본 뎬리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문제는 국내에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진필로 알려진 <소원화개첩>이다. <소원화개첩>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812~858)의 칠언율시 ‘봉시(峰詩)’를 필서한 것이다. 비단에 행서체로 썼으며 말미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안평대군 호의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다. A4용지보다 작은 크기(가로 16.5cm, 세로 26.5cm)의 56자 소품이지만 1987년 국보 제238호로 지정됐다. 안평대군의 정형이 분명한데다 또 낙관과 도장이 찍혀있어 진적이 확실하고 국내에서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의 소장자는 고미술수집가인 서정철씨였다. 수집경위를 보도한 1991년 9월7일 <동아일보>를 보면 서씨가 경북 안동의 한 고가(古家)에서 발견해서 수집하기까지 10년의 공을 들였다고 한다. 원소장자는 서씨의 정성에 감복해서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을 그냥 건넸다고 한다. 그래도 ‘귀한 작품을 그냥 받을 수 없다’며 적절한 값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작품 가운데 국내에 남은 유일한 진적으로 알려진 <소원화개첩>은 지금 행방이 묘연하다.
15년 전인 2001년 소장자인 서씨가 집을 한 달 정도 비운 사이 문제의 <소원화개첩>을 도난당했다며 신고한 것이다. 경찰은 2010년 이 소원화개첩>을 비롯한 도난문화재 29점을 인터폴에 국제 수배했다. 세상이 다 아는 국보이다보니 해외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소원화개첩>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조선시대 내내 천고의 보물로 남았던 안평대군의 자취는 이제 영영 사라져버린 것일까. 안평대군이 꿈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는데…. 이제는<소원화개첩>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군의 꿈을 기다려야 할 판인가. 안평대군의 유일한 흔적인 <소원화개첩>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