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천세, 구천세, 만세…김정은의 만세12창

얼마전 북한의 제7차 노동당 대회 때 김정은 위원장에게 ‘만세’가 연호됐다고 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12번이나 만세를 불렀다네요. 그만 하라는 손짓을 해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세 삼창’이 아니라 ‘만세 12창’이라 할까요. 그래서 제가 이 만세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군주라고 해서 다 ‘만세’라 할 수 없었다는군요. 황제에게만 ‘만세’라 할 수 있었다네요. 제후국의 임금에게는 ‘천세’라 했답니다. 내심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의 경우 강화도 천도시절엔 ‘만세’라 했답니다. 물론 조선시대 들어서는 ‘천세’라 했다고 하고…. 그런데 중국에서는 천세도, 만세도 아닌 ‘구천세’의 칭호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그는 왜 천세도, 만세도 아닌 구천세의 구호를 들았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81회는 만세의 역사를 다룹니다. ‘천세, 구천세, 만세…. 그리고 김정은의 만세 12창’입니다.

 

---

명나라 희종(재위 1621~1627) 시대의 환관 위충현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를 떨쳤다.
굳이 중국 자료를 찾을 필요도 없다. 1624년(인조 2년)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홍익한의 기행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런 말들이 돌고 있다. ‘천하의 권세를 가진 사람 가운데 첫번째는 태감 위충현이고, 둘째는 (위충현의 내연녀이자 황제의 유모였던) 객씨다. 황제(희종)는 세번째다.’라는 수근거림이다.”(<조천항해록>)

 

■구천세, 구천구백세는 됐지만…
어린아이의 뇌를 생으로 씹어먹고 양기를 되찾았다는 위충현(?~1627)의 권세는 황제를 능가했다.
그랬으니 황제의 권세가 위충현은 물론이고, 위충현의 내연녀(곽씨)보다 뒤처진 ‘넘버3’라 했겠는가. 위충현은 권세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자신을 호위하는 환관 3000명을 궁중에서 훈련시켰다.

사대부들도 위충현의 세도를 좇았다. 위충현의 공덕을 기리는 사대부만 해도 40만명에 이르렀다. 심지어 국자감 학생인 육만령은 위충현을 ‘살아있는 공자’라 치켜세운 것도 모자라 “위충현의 사당을 국학 옆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모신 위충현의 살아있는 사당, 즉 생사당에는 침향(동남아시아산 향나무)으로 만든 위충현의 목상을 조성했다. 눈과 귀, 입, 코, 손, 발이 위충현과 똑같았다. 뱃속의 창자와 폐에는 금은보화로 가득 채웠다.(<명사> ‘열전·위충현전’) 그랬으니 황제의 면전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 특권을 누렸다.

중국 소림사에서 바라본 쑹산(嵩山). 한 무제가 제사를 지내러 올랐다가 어디선가 ‘만세삼창’ 소리가 들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게 황제를 ‘넘버 3’로 전락시킨 위충현이었지만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성역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만세(萬歲)’라는 칭호였다. 황제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칭호였기 때문이다. 위충현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고심 끝에 꾸며낸 칭호가 있었다. 바로 ‘구천세(九千歲)’라는 칭호였다. 황제가 아니니 ‘만세’를 연호할 수는 없지만 구천세는 괜찮지 않을까. 당시엔 그것이 ‘신의 한수’로 여겨졌다. 점입가경이었다. 위충현이 큰 길을 지날 때 연도의 백성들은 ‘구천세’도 모자라 ‘구천구백세’까지 목청껏 불러댔다.
그러나 ‘만세’ 소리는 끝내 들어보지 못했다. 희종이 재위 7년 만에 병으로 죽고 새 황제(의종)가 등극하자 위충현의 꿈도 일장춘몽이 됐다. 위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새 황제(의종·1627~1644)은 위충현의 시신을 천참만륙(千斬萬戮), 즉 천갈래만갈래로 찢기는 극형을 내렸다. 우습지 않은가. 황제의 ‘만세’는 아니더라도 ‘구천세’의 칭호를 얻었던 위충현이 결국 ‘천참만륙’의 형벌로 마감했다니 말이다.

 

■고려는 ‘만세’를 불렀다.
사실 중국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북아 체제에서 ‘만세’의 호칭은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조선과 같은 이른바 ‘제후국’의 군왕에게는 만세는 언감생심이고 원칙적으로는 ‘천세’ 호칭까지만 허락됐다. 예컨대 1423년(세종 5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해수(海壽)가 떠나면서 한 이야기가 이를 증명한다.
“명나라 사신 해수가 송별연을 마치고 하직하면서 말했다. ‘황제는 만만세 하고, 전하(세종)는 천천세, 세자(문종)은 천세하소서.”(<세종실록>)
그러니까 황제에게는 ‘만세’지만 제후국 군왕에게는 ‘천세’ 칭호가 부여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의 경우 노골적으로 ‘만세’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300년(충렬왕 26년) 원나라 정동행성이 황제 성종(재위 1294~1307)에게 아뢴 내용을 보라.
“고려 국왕이 큰 모임을 열 때 곡개(曲蓋·수레 위에 받쳐 햇빛을 가리는 덮개)와 용병(龍屛·용이 그려진 병풍)을 치고, 경필(警필·임금이 행차할 때 행인을 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합니다. 심지어 여러 신하들이 발을 구르며 춤추고는 만세(萬歲) 부르기를 중국 조정에서 하듯 합니다. 분수에 넘침이 극에 달합니다.”(<해동역사> ‘예지·조례’)
정동행성은 1280년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해 고려땅에 세운 정치간섭기구다. 고려가 말로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속으로는 황제국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을 원나라 조정에 알린 것이다. 그러자 원나라 황제 성종은 늑달같이 조서를 내려 “이 무슨 짓이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 충렬왕이 했다는 변명이 흥미롭다.
“예전에 강화도에 있을 때는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천세(千歲)를 부르고 있습니다.”(<원사>)
고려가 원(몽골)나라 침략기에 강화도 항전으로 버틸 때는 ‘만세’ 연호를 부르며 결사항전을 펼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애간장을 녹이는 외교술로 세계제국이었든 원나라를 쥐락펴락했다.
그러나 조선조 들어서 ‘만세’는 언감생심이었다. 제후국 신분에 걸맞은 ‘천세’를 자처했다. 예를들어 1418년, 세종 임금이 즉위하면서 아버지(태종)을 상왕으로 봉숭하는 의식을 펼치는 장면을 보라.
“통찬(通贊·국가적인 행사 때의 사회자)이 몸을 굽혀 세번 발을 구르고 꿇어앉아 ‘산호 천세(山呼千歲), 산호 천세’를 부르고, 다시 ‘산호 천천세’를 부른다.…많은 관원들이…꿇어앉아 ‘산호천세, 산호천세’를 부르고, 재차 ‘산호천천세’를 부른다.…”(<세종실록>)
무슨 뜻인가 하면 황제(국왕)의 즉위식이나 혹은 국가적인 잔치가 벌어질 때 황제(임금)을 향해 ‘만(천)세, 만(천)세, 만만(천천)세’하고 ‘만(천)세삼창’을 연호한다는 것이다.
실록을 일별해보아도 단종과 인종의 즉위식과 영조를 위한 잔칫상, 그리고 혜경궁 홍씨의 육순·환갑잔치 등에서 ‘천세삼창’의 의식이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부귀만세가 새겨진 서진 시대 막새. 만세는 한 무제 때부터 황제의 존엄을 상징하는 낱말이 되었다.

 

■만세의 서양버전은
서양에도 군주를 향한 찬양이나 축복을 의미하는 문구가 있다. ‘Long live The King!’, 즉 ‘대왕이여 영원하라!’란 뜻이다. 그런데 원래 이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붙어야 한다. ‘The King is dead’이다. 그런데 원래 이 문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붙어야 한다. 즉 ‘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이다. 이 말은 1422년 프랑스의 샤를 7세(재위 1422~1461)의 즉위식 때부터 처음 연호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다. ‘임금이 죽었는데 왜 임금이여 영원하라’는 모순된 말을 했을까. 
이 말에는 군주의 통치권에는 공백이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즉 프랑스에서는 죽은 임금의 유해가 생드니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자 마자 후임 임금이 승계된다는 의미에서 ‘선대왕은 죽었고, 이제 새로운 임금이 등극했으니 우리는 이 새로운 임금이 영원하기를 바란다!’고 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전임 임금의 죽음과 동시에 통치권이 이양된다는 법에 따른 것이다. 통치권의 공백은 군주국가에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왕자들간 왕족간 골육상쟁의 내란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72년 영국의 헨리 3세가 죽었을 때 후임자인 에드워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 중이었다. 그때 영국 왕실은 부재중임에도 에드워드 1세의 즉위를 승인했다. 전장에서 뒤늦게 자신의 즉위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1세는 부랴부랴 고국으로 돌아와 정식즉위했다. 이렇듯 ‘만세’의 서양버전에는 통치권의 신속한 이양이라는 숨은 뜻과 함께 새로운 왕을 향한 충성서약이 담겨있다.

 

■맹상군이 만세삼창을 받은 까닭
그러나 동양에서 ‘만세’는 단순히 군주(황제, 국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세는 원래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군주를 향한 찬사는 물론 아니었다.
만세는 ‘수많은 세월’(<장자> ‘제물론’)이나 ‘후세’(<사기> ‘전숙열전’)의 의미로 쓰였다. 사물의 유래를 풀이한 송나라 때 저작물인 <사물기원>은 “전국시대 때 군주를 경축하는 백성들 모두 만세를 부른다”고 했다. 대표적인 기록이 전국시대 제나라 때의 일을 기록한 <전국책> ‘제책’의 내용이다.
즉 제나라 왕족 가운데 맹상군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식객이 3000명이나 몰려들 정도의 명망가였다. 그 수많은 식객 가운데 풍환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통찮은 인물이 있었다. 어느 날 맹상군은 밥만 축내고 있던 풍환에게 “설 땅(산둥성 텅저우·山東省 등州)에 가서 제가 백성들에게 빌려준 돈 좀 받아오면 어떻겠냐”고 부탁했다. 맹상군은 식객 3000명을 먹여살리느라 지금으로 치면 사채업에도 손을 댔는데 빌려준 돈을 받지못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우락부락하고 풍채좋으며, 말주변까지 좋은 풍환을 한번 써먹겠다고 나선 것이다. 풍환은 지금으로 치면 ‘채권추심’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채무자들을 어르고 달래 밀린 돈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풍환은 “알았다”고 쿨하게 대답한 뒤 설 땅을 떠났다. 풍환은 우선 채무자들에게 ‘차용증서를 가져오라’고 한 뒤 잔칫상을 차렸다. 많은 술을 빚고 살찐 소를 잡아 채무자들을 대접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풍환은 이자를 낼 능력이 되는 자에게는 기한을 정해주었다. 그런 다음 도저히 이자와 원금을 낼 수 없는 자들의 증서를 불태워 버렸다. 풍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채무자들에게 말했다.
“맹상군께서 돈을 빌려준 까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부자들에게는 돈 갚을 기한을 정해주었고, 가난한 이들의 차용증은 불태워 없앴습니다. 마음껏 음식이나 드십시요. 이런 맹상군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맹상군 만세! 만세! 만세!’하는 만세삼창을 연호하고 절을 두 번이나 올렸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맹상군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풍환을 불러들였다.
“선생은 빚 좀 받아 오랬더니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맹상군)
그러자 풍환은 침착한 어조로 가난한 자들의 빚을 탕감한 이유를 설명했다.
“가난한 자들은 어차피 10년이 지나도 이자를 낼 수 없습니다. 이자만 눈덩이처럼 늘어날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선생(맹상군)이 이익만 좇지 선비나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망할 겁니다. 어차피 받을 수 없는 돈…. 쓸데없는 차용증을 불태웠으니 설 땅의 백성들은 선생을 존경할 것이고, 선생의 명성은 드높아 질 것입니다.”
그제서야 맹상군은 손뼉을 치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상왕으로 모시는 의식을 치르면서 <세종실록>에 기록한 ‘천세삼창’ 의례.

■만세의 다양한 뜻
‘만세’는 군주 혹은 어른의 죽음으로도 쓰였다. <전국책> ‘초책’을 보면 초나라 임금이 한껏 노닐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웃었다.
“즐겁구나. 그런데 과인이 만세천추(萬歲千秋) 후에는 누구와 놀지?”
한나라 창업주 고조 역시 고향땅(沛·장쑤성 페이현)을 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그네는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내가 비록 관중(西安·시안)에 도읍하고 있지만 만세 후에는 내 혼백이 고향을 좋아하고 그리워할 것이야.(萬歲後吾魂魄猶樂思沛)”(<사기> ‘고조본기’)
이런 저런 뜻으로 쓰였던 ‘만세’가 황제의 존엄으로 쓰인 것은 언제부터일까.
일치된 견해는 없지만 한고조 유방(재위 기원전 202~195)이 원조라는 주장도 있다. 즉 한 고조가 기원전 198년 새 궁전인 미앙궁을 완성한 기념으로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고조는 부친(태상황)에게 농담을 던졌다.
“어릴 적 태상왕(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넌 재주가 없어서 생업을 꾸리지 못할 거야. 넌 유중(고조의 둘째형)처럼 노력도 하지 않아! 하고 입버릇처럼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룬 업적을 유중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그러자 어전에 모인 신하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殿上群臣皆呼萬歲)”(<사기> ‘고조본기’)
한고조 유방은 어릴적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늘 둘째형인 유중과 비교 당하면서…. 황제가 된 고조는 어릴 적 이야기를 농담처럼 던진 것이다. 이렇게 한고조 유방의 농담으로 시작된 ‘만세’ 구호가 황제의 존엄을 의미하는 뜻으로 처음 쓰인 것이다.

 

■만세삼창의 원조
그러다 철권의 통치자 한무제(기원전 141~87)부터 ‘만세’가 황제의 상징으로 굳어지게 된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숭산(嵩山·허난성 북부의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날 때 사당 옆에서 만세삼창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누가 만세삼창을 했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산 위 사람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했고, 산 밑 사람들에게 물어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이를 신비롭게 여긴 무제는 300호의 봉읍을 태실산에 바쳐 제사 지내게 했다.(<사기> ‘효무본기’) 반고의 <한서> ‘무제본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후한의 학자 순열(148~209)는 “만세삼창 소리는 산신(山神)이 지른 것”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이로부터 15년 후인 기원전 94년 무제는 낭야(산둥성 자오난·山東省 膠南)로 출행해서 산에 올랐다.
“산 정상에 오르자 만세 소리가 들렸다. 바다 위에 더 있는 듯 했는데 어디선가 만세소리가 들렸다. 무제는 그때 ‘신령과 돌 등이 모두 황제를 만세라 부르는데 백관과 백성들은 왜 만세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이때부터 황제에게는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만세’라 하면 반역이나 불경의 죄로 다스렸다.
후세 사람들은 만세삼창의 원조를 한무제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임금이나 나라의 무사태평을 가리키거나 기원하는 것을 ‘산호(山呼)’ 혹은 ‘만세삼호(萬歲三呼)’라 하고, 만(천)세삼창을 ‘호숭(呼嵩)’이라고 일컫는다. ‘호숭’이나 ‘삼호’ 혹은 ‘산호’라 하는 것은 한무제가 숭산(嵩山)에 올라 만세삼창 소리를 들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자주 보이는 표현들이다.

 

■그래도 유만세, 이만세, 사만세, 조만세는 있었다
이 때부터 황제는 ‘만세야(萬歲爺)’, 즉 ‘만세어르신’이라는 극존칭으로 일컬어졌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후한 시대 외척인 두헌(?~92)이 북흉노를 무찌르고 개선하자 신료들이 엎드려 절하면서 ‘만세!’를 연호하고자 했다. 이때 상서 한릉이라는 인물이 나서 “신하에게 만세라 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정색하자 다른 신하들이 부끄러워 하며 물러났다.(<후한서> ‘한릉전’)
전한시대인 고조와 무제를 지나 후한 시대에 접어들면서 ‘만세=황제’의 등식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황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이 이름을 ‘만세’라 짓는 것을 엄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 화제(재위 88~106)의 동생 중에 이름이 유만세(劉萬歲)’인 황족이 있었다. 후주나 수, 당 시대에도 이만세(李萬歲), 사만세(史萬歲), 조만세(조萬歲)란 이름이 간간이 보인다. 요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탤런트 송일국씨의 쌍둥이 3형제 중 막내인 ‘송만세’도 당나라 시대까지는 허용되는 이름이었다는 얘기다.   

 

■송나라 때부터 만세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송나라 때부터 달라진다. ‘만세’ 칭호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존엄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예컨대 북송 때의 충신 구준(961~1023)이 길을 나설 때 어떤 정신병자가 구준의 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자칫 역모죄를 뒤집어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준을 질시하던 정적들도 가만두지 않았다. 황제(태종·977~997)의 면전에서 “누군가 구준 앞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구준이 황제의 뜻을 품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탄핵했다. 구준을 아꼈던 황제도 할 수 없이 유배형의 형벌을 내려야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북송의 권신 조이용에게는 조예라는 조카가 있었다. 그런데 이 조예는 술에 취하면 주변사람들에게 “나를 ‘만세’라 부르라”고 주정을 부린다. 누군가 이 사실을 고발하자 조예는 황제모독제로 장형(杖刑)을 받고 죽었다. 이때부터는 ‘만세’라는 이름도 일절 불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세 삼창과 만세 12창 
그 유래가 어떻든간에 ‘만세’라는 말은 갖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군주의 존엄과 왕조의 안녕을 상징하는 말로 굳어졌다. 적어도 왕조시대엔 그랬다.
생각해보라. 만백성이 연호하는 만세삼창의 구호를 듣고 황홀경에 빠지지 않을 군주가 몇이나 되겠는가. 온백성의 충성구호에 짜릿짜릿 했을 것이다. 권력의 의지를 더욱 다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군주라면 어떨까. 예컨대 1766년(영조 42년) 세손(정조)가 차려준 잔칫상에다 ‘천세삼창’까지 받았던 영조가 남긴 한마디에서는 그나마 군주의 양심이 엿보인다.
“과인이 잘 대접받았는데 아랫사람들이 잘 먹을 수 없다면 잔치를 베푼 의미가 있겠느냐. 잘 먹이도록 하라.”(<일성록>)
이 대목에서 전국시대 제나라 백성들이 맹상군을 위해 연호한 ‘만세삼창’이 떠오른다. 백성들의 빚을 일거에 탕감해주었으니 얼마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만세’였을까. 맹상군의 예에서 보듯 백성의 아픔을 진정으로 어루만질 때 절로 ‘만세’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저절로 터져야 진짜 ‘만세’가 아닐까.
지난 6~7일 열린 제7차 북한 노동당 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이 끝나자 12번의 ‘만세’ 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아무리 ‘세습정권’이라 해도 ‘만세 12창’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진심에서 터진 만세였을까. 궁금증이 한가지 더 생긴다. 1985년 당시 김일성 주석이 “인민들이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날이 와야 7차 당대회를 연다”고 했다. 지금 그 약속은 지켜진 것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