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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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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 모나리자의 외출을 엄금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03년부터 ‘귀부인(Monna) 리자(Lisa)’라는 뜻의 영어식 표현인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했을 때 이 그림을 가져갔다. 프랑수아 1세가 정식으로 구입했고, 훗날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적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루브르궁(박물관)의 전시물이 됐다. 나폴레옹이 잠깐 이 그림을 자신의 침실에 걸어두기도 했지만 1804년 반환했다. 1911년 모나리자의 도난소실을 대서특필한 신문 1911년 8월 22일 청년화가 루이 벨루가 루브르 박물관의 ‘살롱 카레’ 벽에 걸려 있어야 할 모나리자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림은 없고 그림을 고정해둔 못만 4개 박혀 있었다. 없어진 것은 전날이었는데 다음날 아침 9시..
뉴욕타임스, 98년만에 유관순 부음기사를 쓰다 1995년 5월13일 영국인 앨리슨 하그리브스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무산소 등반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이자, 남녀를 통틀어 남이 설치한 고정로프에 의존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두번째 등반가였다. 정상에서 두 자녀에게 보낸 “얘들아. 엄마가 올라왔어. 사랑해”는 라디오 메시지는 영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3개월후 하그리브스는 K2 등반 중 돌풍에 휘말려 숨졌다. 향년 33살. 그러나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너무 무책임한 등반이었다는 ‘사후 악플’이 쏟아졌다. 소설 의 샬럿 브론테(1816~1855)는 당대의 계관시인 로버트 사우드리에게 자신의 작품 한편을 보낸다. 그러나 사우드리는 “문학은 여자의 일도, 여자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지독한 ..
닉슨, 김일성, 김정은… 2억원짜리 마오타이주 중국이 자랑하는 술이라면 역시 마오타이주(茅臺酒)다. ‘기원전 135년 한무제가 파견한 당몽이 촉 지방의 소국 야랑에서 맛본 구장이라는 술’( ‘서남이열전’ 등)을 기원으로 삼으니 21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술이다. 수수를 주원료로 누룩과 함께 향과 맛을 내는 수십종의 원료를 배합해서 오랫동안 숙성과정을 거친 술이다. 예부터 ‘색을 보고(看香), 향을 맡은 뒤(聞香), 맛을 보는(品味) 술’이라 했다. 마오타이주를 둘러싼 전설의 일화가 많다. 19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 ‘마오타이주’가 출품됐다. 그러나 아무도 이 볼품없는 병에 든 술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러자 중국전시관의 누군가가 술병을 고의로 깨뜨렸다. 마오타이주의 향기를 맡은 관람객이 몰려들었고, 마침내 많은 출품작..
260㎜ 신석기인의 신발 6세기 초중반 중국 양나라를 방문한 12개국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를 살펴보면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예컨대 가죽신을 신고 있는 백제 사신과 달리 왜국 사신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서있다. 이를 두고 ‘미개한 왜국의 문화 수준’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다. 스위스 취리히 인근 그라이펜제 호수 제방의 뻘층에서 확인된 5000년전 신석기시대 신발.|취리히칸톤(연합뉴스) 하지만 그것은 각 나라의 기후와 풍습을 고려하지 않은 너무 일방적인 생각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왜국의 경우 굳이 신발을 신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 겨울 날씨가 매서웠던 고구려에서는 “구걸해서 어머니를 공양했던 바보 온달이 너덜너덜한 옷에 ‘해진 신발(弊履)’이라도 반드시 신었다”( ‘열전·온달전’)는 기..
텐궁의 추락, 손오공의 소란인가 ‘대요천궁(大鬧天宮)’은 1960년대초 제작된 중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손오공이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궁전(天宮)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큰 소란을 일으켜(大鬧) 마침내 대승을 쟁취하고 개선하는 고대소설 의 1~7화를 각색한 것이다. 중국이 2011년 우주정거장을 쏘아올리며 ‘톈궁(天宮)1호’(사진)란 이름을 지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양분해온 우주공간에 도전장을 내밀어 결국 우주의 지배자로 등극하겠다는 야심을 담고 있다. 옥황상제를 몰아낸 손오공처럼…. 사실 톈궁 1호는 우주실험실이라 표현하는 게 옳다. 길이 10.4m, 최대직경 3.35m에 무게는 8.5t에 불과하다.(사진) 우주인들이 중·장기로 체류해서 실험도, 관측도, 연구도 수행하는 진정한 의미의 우주정거장이 아니다..
중국이 한반도로 쫓아낸 ‘악귀와 재앙’, 그것은 미세먼지 “섣달그믐부터 정월대보름까지 폭죽의 관습에 따라 딱총(紙統·종이폭죽)으로 귀신을 쫓는다. 포탄소리보다 웅장한 굉음이 아침까지 끊이지 않는다.” 1791년(정조 16년) 연경(북경)을 방문한 김정중의 이 전한 중국의 세시풍속이다. 특히 “부잣집은 천은(순은) 300~400냥짜리 호화딱총을 산다”면서 폭죽에 거금을 쓰는 중국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폭죽놀이의 유래는 뿌리깊다. 6세기 인물인 종름의 는 “춘절(음력 1월1일)만 되면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수 산조가 싫어하는 빛과 폭발소리를 내려고 대나무를 태웠다”고 했다. ‘폭죽(爆竹)’ 단어가 그래서 나왔다. 중국 뿐이 아니었다. 우리네 세시풍속에도 섣달 그믐이 되면 폭죽을 터뜨리고, 대문에 복숭아 나무를 꽂아 악귀과 재앙을 쫓아내는 전통이 있..
어느새 문화재가 된 온돌, 그 따끈한 아랫목 “고구려인들은 겨울에 긴 구들 아래 불을 지펴 방을 덥힌다”는 의 기록처럼 온돌은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였다. 그렇기에 세계적인 대영백과사전에도 떡하니 ‘ONDOL’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고고학 자료를 봐도 청동기~옥저~고구려~발해를 이어온 구들이 온돌(溫突)로 표기된 것은 만고의 성군인 조선조 세종 시절이었다. 즉 세종은 “1425년(세종 7년) 성균관 학생들이 습질(濕疾·아토피 같은 피부병)에 걸리는 일이 많으니 (기숙사에) 온돌과 목욕탕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발해영역인 러시아 체르냐치노에서 확인된 온돌 유구. 과연 습기가 차기 쉬운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긍휼히 여긴 성군의 마음씨다. 그런데 세종의 지시에는 또하나의 코드가 숨어있다. 바로 온돌 문화의 특징을 설파하고 있다. 사실 같은 ..
시황제, 위안스카이, 시쩌둥 황제의 원조는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다. 초대황제라는 뜻에서 시(始)자를 붙였고, 이후 ‘2세, 3세, 4세…’ 등의 만세까지 이어질 것이라 장담했다. 하늘의 권능을 받은 황제이니 쉽게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징조만 느끼게 하면 된다는 신비주의 컨셉트를 내세워 ‘짐(朕·조짐)’이라 했다. 급기야 불로장생의 미몽에 사로잡혀 술사를 시켜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그러나 6국을 멸한(기원전 221년) 시황제의 진나라는 단 15년만(기원전 206년)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후 2100여년이 지난 1912년 쑨원(孫文)에 이어 중화민국 대총통에 오른 위안스카이(袁世凱·사진)도 만만치 않았다.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될 사주와 관상”이라는 술사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중국의 개헌투표용지. 소수민족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