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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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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이 찢어놓은 궁예의 야망 “저기 예쁘게 생긴 나무 한 그루 보이시죠? 그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띠 처럼 펼쳐진 윤곽이 보이시죠?” “예” “저 윤곽이 바로 궁예가 건설한 태봉국 도성의 외성 흔적입니다.” 지난 25일 강원 철원 흥천원 벌판, 비무장지대가 눈앞에 펼쳐있는 평화 전망대. 필자는 파주 교하도서관의 탐방프로그램(‘길 위의 인문학’)에 참가한 답사객들에게 태봉국과 태봉국의 역사를 설명했다.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 지역 문화유산 전문가인 박종용씨가 부연한다. “이곳에 와보니 궁예가 왜 이곳에 태봉국의 도읍을 정했는지 알 수 있겠죠?”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궁예의 태봉국도성. 군사분계선과 경원선이 4등분으로 도성을 갈라놓았다. ■비무장지대는 산이 아니다. 벌판이다. 최성숙 교하도서관 사서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호로고루 “662년 김유신의 신라군이 야밤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瓢河)에 이르니 고구려군이 추격해왔다. 김유신이 군사를 돌려 총반격에 나섰다.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으며….”( ‘열전 김유신조’ 등) “673년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이 침범했다. 신라군이 호로하(瓠瀘河) 등에서 아홉번 싸워 모두 이겨 2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두 강에 빠져 죽은 당나라 군사가 헤아릴 수 없었다.”( ‘신라본기·문무왕조’) 경기 연천 장남면 원당리에 있는 호로고루성. 고구려가 신라와 맞서 싸울 때 세운 최전방사령부이다. 호로고루가 있는 임진강은 553년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었으며, 일종의 군사분계선이었다.|김창길 기자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37번 국도를 따라가다 경기 연천군 장남..
3000년 전 청동기 마을의 비밀 춘천 중도에서 확인된 고인돌 군. 이런 고인돌들은 흔히 알려진 거대한 탁자식이나 바둑판식 고인돌이 아닌 개석식 고인돌이다. 소박한 형식의 고인돌이다. |서성일 기자 100년 전에도 심상치 않은 곳이었나 보다. 일본의 고고·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역시 그 냄새를 맡았다. 하기야 강(江)은 선사시대의 고속도로(강)이자, 문명의 젖줄이니까…. 게다가 땅이 가라앉으며 이뤄진 침강분지인 춘천 일대는 북한강과 소양강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이뤄진 비옥한 충적대지였다. 그러니 농사를 짓게 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1915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조선의 구석구석을 답사하던 도리이는 소양강변 춘천 천전리(泉田里·샘밭)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과 돌무지 무덤(적석총)을 확인했..
400년 만에 현현한 허준 선생의 체취 “‘陽平○ ○聖功臣 ○浚.” 1991년 7월 어느 날, 민통선 이북에서 의성(醫聖) 허준 선생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서지학자 이양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양천 허씨’의 족보에서 시선을 잡아끈 허준 선생의 무덤 위치, 즉 ‘파주 장단 하포 광암동 동남’이라는 구절에 ‘꽂혀’ 10년 가까이 찾아 헤매던 때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허준 선생’의 묘임을 입증하는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라는 두동간 난 비석이었다.(지금의 소재지는 경기 파주시 진돔면 하포리) 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란 수식이 붙었을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 피란길에 오른다. 그런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신하들이 줄줄이 임금을 팽개치고 뿔뿔이 흩어진다. 민통선 이북에서 발견된 허준 선생의 묘..
경순왕, 지뢰와 비무장지대의 호위를 받다. 경순왕릉 가는 길은 언제나 서늘한 느낌을 준다.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인데도 그렇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닿아있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릉과 왕릉 가는 길을 잘 닦아놓고는 ‘민간인 통제선’에서 제외시켜 놓았으니…. 입구에서 왕릉까지의 길 양옆에는 ‘지뢰’ 표지를 단 울타리가 길게 펼쳐져 있다. 갈 때마다 섬뜩하다. 그 길을 100m가량 가면 시야가 확 트인다. 제법 새뜻한 모습의 왕릉이다. 왕릉을 빙 둘러싼 울타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 저 울타리를 넘어가면 큰일 난다. 울타리 너머 손에 닿을 듯한 거리, 야트막한 성거산 능선이 바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이라고 새겨진 명문비..
유엔군 화장터, 한 줌 재로 스러진 젊은이들 1940~50년대 육체파 여배우였던 제인 러셀. 오성산 인근의 고지가 제인러셀의 가슴을 닮았다해서 '제인러셀' 고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피의 의미 한국전쟁은 국제전쟁이었다.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과 중국, 소련, 그리고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16개국 등 20개국이 직접 참전했다. 차마 제3차 세계대전을 치를 수 없었던 동서 양진영이 한반도에서 ‘제3차대전의 대체전’을 치른 것이다. 전쟁의 양상은 특이했다. 1년 여의 혈전 끝에 교착상태에 빠졌다.(1951년 6월) 전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 공산측으로서는 1951년 두 차례에 걸친 대공세를 벌였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소련이 약속한 60개 사단분의 전투장비와 보급품도 도착하지 않았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와의 반..
평강공주 '통곡의 바위' 아시나요. “이것 좀 보십시요.” 아차산 구리 둘레길과 온달샘으로 가던 길, 김민수 문화유산 해설사가 이상스럽게 생긴 바위를 가리켰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의 두터운 바위….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나신(裸身)의 여성이 엎드린채 뭔가를 부여잡고 있는 또 다른 바위…. “저 바위는 화살을 맞고 죽은 온달 장군의 ‘주먹바위’라 합니다. 이 바위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급한 나머지 옷도 입지 않은채 달려와 온달장군의 투구를 부여잡고 엎드린채 울부짖는 ‘통곡바위’라 합니다.”(김민수씨) 나신의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의 투구를 잡고 울었다는 통곡바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어우러진 곳이다.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온달장군의 시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민규 기자 두 사람의 혼인..
단군신화와 닮은 일본 축제 “백제마을의 시와스마츠리는 단군신화와도 흡사하다.” 난고손(南鄕村) 백제마을에 조성된 ‘니시쇼소인(서정창원)’ 전시실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전시장 패널마다 ‘시와스마츠리와 한국의 각종 의식에 흡사한 점이 많다’는 것을 일본어와 한국어로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시와스마츠리를 부여의 은산별신굿과 비교한다. 시와스마츠리가 정가·복지왕을 위한 제사라면, 은산별신굿은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던 복신과 도침 장군을 모신 제사로 알려져 있다. 둘 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찬물에 목욕재계하는 계율이 있고, 무녀들의 굿(은산별신굿)과 요카구라(夜神樂·시와스마츠리)가 신명나게 펼쳐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정가왕과 복지왕의 신주를 모시는 시와스마츠리 행렬과, 승마전장을 한 대장군 등 6명과 깃발 30여기가 동원되는 은산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