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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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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들 닮은 ‘개경 사람들’- 한국역사연구회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휴머니스트|한국역사연구회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갈 수 없는 도시 개성. 그러나 이제 남북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맞아 개성은 반나절 코스로 훌쩍 다닐 수 있는 옆동네가 될 날도 머지 않았다. 개성, 즉 개경은 알다시피 한민족과 한민족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고려왕국의 수도이자 국제도시였다. 이 책은 다소 밋밋한 제목이 불만스러울 만큼 당대 개성인의 생생한 삶, 그리고 애환을 담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시대의 서울을 보는 것 같다. 요지경 그 자체다. 결혼을 말할 때 아주 상반된 표현으로 ‘시집간다’ 혹은 ‘장가간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장가간다는 표현이 맞았던 것 같다. “혼인 하면 필요한 것은 모두 처가에 의존하니 장모·장인의 은혜는 부모와 같다”(이규보)느니, “부모공..
인류기원의 열쇠 ‘DNA’- 마틴 존스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마틴 존스|바다출판사 유적에서 토기가 출토됐다고 치자. 그러면 고고학자들은 부드러운 솔로 항아리에 묻어있는 먼지와 쾨쾨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기체를 조심스레 털어낼 것이다. 신주 모시듯 하면서…. 그러면서 기왕의 토기편년에 막 나온 유물을 대입시켜 연대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를 설왕설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고학은 한물 간 시대가 되었으니 세상, 참…. 이젠 막 출토된 토기는 거들떠보지 않고 토기에 묻은 생체분자들을 모아 최첨단 실험실로 가져간다. DNA 분석을 위해서다. 이 괴상한 사람들은 생체분자 고고학자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고학자 노릇하기도 힘들어졌다. 고고학자는 고생물학, 분자생물학, 지구화학, 법의학 등 골치아픈 자연과학 공부까지 섭렵해야 행세할 수 ..
18세기 천재들 ‘벽과 치’-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휴머니스트 일찍이 박제가 선생은 벽(癖)이 없는 인간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쳤다. 여기에 치(痴)를 하나 더 붙이자. ‘벽과 치’. 이덕무 선생이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바보라는 호를 지은 이유다. 요즘 말로 한다면 ‘마니아’ 혹은 ‘폐인’이라 할까. 뭐 그런 뜻으로 한다면 10년 이상 고전에 빠져 불과 한달 반 만에 책을 두 권 내는 등 내공을 뿜어내는 저자야말로 ‘벽과 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설하고 저자는 ‘벽과 치’, ‘마니아와 폐인’을 ‘프로페셔널’이라 칭했다. 저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카스트적인 신분사회질서가 횡행했던 조선에서 독보적인 ‘벽과 치’로 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이들의 삶을 발굴하는 일 또한 지난한 작업이었을 터. 그런 의미..
서라벌 인구가 100만…삼국유사는 사실일까- 이기봉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대도시 경주의 탄생…이기봉|푸른역사 “신라의 전성기엔 경중(京中)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 진한조) 가구당 5~6명이 살았다치면 전성기 신라의 왕경엔 90만~120만명에 이르는 인구가 살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망정이지 우리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엄연한 기록을 ‘그럴 리 없다’고 폄훼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조선의 한양도 기껏해야 4만~5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신라에 무슨 90만명이냐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암묵적으로 신라전체의 인구를 250만명(50만~60만호)으로 추산해왔다. 그렇다면 전체인구의 30~36%가 왕경에 살았다는데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왕들이 사랑했던 조선의 ‘참 궁궐’- 최종덕 <창덕궁> ▲창덕궁…최종덕|눌와 창덕궁은 또하나의 세상이다. 한 나라를 다스렸던 임금과 왕실이 평생동안 백성을 생각하면서 살았던 공간이다. 임금이 의식을 행했던 인정전에서 의상실(상의원), 종합청사격(궐내각사), 집무실(선정전), 임금과 왕비의 생활공간(희정당·대조전) 등등. 어디 그뿐인가. 내일의 조선을 이끌 왕세자에게 자연관찰기록과 각종 볼거리를 제공했던 ‘디즈니랜드(연영합·중희당)’가 있고, 헌종이 마침내 사랑을 쟁취한 낙선재·석복헌·수강재, 그리고 무미건조한 궁궐의 따분한 삶을 씻어줄 후원까지…. 그러나 후원에서조차 그저 놀지 않았다. 군사훈련을 친견하기도 했고, 국가산업의 기틀인 양잠과 농사 권장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창덕궁은 골육상쟁의 피로 얼룩진 경복궁을 기피한 태종때부터 역대 임금들의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