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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역사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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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패 몽골군은 왜 강화도를 무서워했을까 “비록 작은 나라지만 산과 바다로 막혀있어 군사를 동원한지 20여 년이 되었는 데도 신하로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고려 태자가 조회했으니 후히 대접하소서. 일단 돌아가면 오지 않을 것이니….” 1259년(고종 46년)이었다. 몽골 조정의 강회선무사 조양필이 쿠빌라이(세조)에게 고한다. “제발로 찾아온 고려 태자를 홀대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상황일까. 와 등 고려 측 사료와, 등 몽골측 사료를 통해보자. 펄갯벌로 이뤄진 강화도 갯벌.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과 함께 허리춤까지 빠지는 갯벌 때문에 몽골군은 상륙의 엄두도 내지 못했다. ■쿠빌라이의 반색 고려는 1231년부터 만 28년 간에 걸친 몽골과의 항쟁에 지쳐 있었다. 고려는 결국 늙고 병든 왕(고종)을 대신해 태자인 전(원종..
"차라리 XX를 잘라버리자"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치르는구나!” 1803년 전남 강진의 갈밭에 살던 백성이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男根)을 싹둑 잘라버렸다. 그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남근을 들고 관아 문을 두드렸다. 아내가 울며불며, 하소연 했지만 소용없었다. 문지기가 가로막고선 관아의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체 무슨 사정이었을까. 자해한 남성은 사흘 전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자 마을 이장이 이 핏덩이를 사흘만에 군적에 편입하고는 기다렸다는 듯 백성의 소(牛)를 토색질해갔다. 그렇게 되자 아이의 아비는 자신이 남근을 잘못 놀린 탓에 아이를 낳았다고 자책하고는 자해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 고발한 ‘군정 문란’의 생생한 현장이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이 1808년부터 10..
백정놈의 '춘추필법' 1)“의 법은 ‘무군(無君)’, 즉 임금을 업신여기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도전·남은의 관을 베고, 저택(저澤·대역죄인의 집을 헐어 연못을 조성하는 일)하소서.” 1411년(태종 11년), 대사헌 박경 등은 이미 처단된 정도전 일파를 부관참시하고, 그들의 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태종 이방원이 ‘백성의 나라’를 꿈꿨던 삼봉 정도전을 주살한 지(1398년) 13년이나 흘렀는 데도 ‘정도전을 한번 더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 친 것이다. 공자가 제자를 시켜 길을 묻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공자는 일생의 역작이라는 를 지은 뒤 "훗날 나를 칭찬하는 것도, 나를 비난하는 것도 모두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역심을 품은 죄 2)“의 법은 ‘난신을 죽이고 역적을 칠..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죄상이 아니다. “진나라는 분서를 자행했다. 그러나 육경(六經)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나라는 갱유를 저질렀다. 그러나 유생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청말 민국 초의 사상가인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이렇게 평했다. 캉유웨이는 과연 유교 경전(육경)을 포함, 천하의 모든 서적들을 깡그리 불태우고, 모든 유생들을 산채로 묻어버린 진시황의 폭군 이미지를 ‘세탁’하려 했던 것일까. 중국 CCTV 프로그램에서 를 강의한 왕리췬(王立群) 교수(허난대)의 (김영사)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를 펼쳐 들었다. 진시황이 죽은 때가 기원전 210년이고, 사마천이 를 쓴 중심연대를 대략 기원전 110년 언저리로 본다면…. 약 100년의 차이라면, 사실상 동시대의 역사인 셈이 아닐까. 바로 그 시대의..
조선의 어느 재야사학자 '분투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국민과 인민, 그리고 황국신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60년~70년대 ‘국민’(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의 전문이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도덕시간이나, 애국조회 때마다 암송을 해야 그 날 수업이 무사히 넘어갔다. 58년생인 김한종 교수(교원대)의 회고담에서 당대 국민학생들의 당혹감이 절절이 배어나온다. 1970년대 교과서에 실린 국민교육헌장 전문. 당시 국민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의 글자수가 몇자인가'라는 시험까지 봐가야 달달 외워야 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도덕시험은 대체로 좋은 말이 포함된 답안만 고르면 맞는 경우가 많아 가장 쉬었다. 그런데 첫번째 문제를 보는 순간 경악했다. ‘1.국민교육헌장은 몇 자인가.’ ~입으로 웅얼거리며 손가락..
18세기 한류, 조선통신사의 영욕 “임금(영조)께서 통신사로 떠나는 세 사신을 불러 친히 ‘이릉송백(二陵松柏)’의 글귀를 외웠다. 임금은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은 듯 했다. 그러면서 친히 ‘호왕호래(好往好來)’, 즉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를 직접 써서 사신들에게 나눠주었다.”(조엄의 ) “임금이 사신들을 불렀다. ‘그대들에게 시 짓는 능력이 있는지 먼저 시험해보고자 하니 글을 짓고 차례로 제출토록 하여라.’”(원중거의 ) 계미년인 1763년 7~8월, 영조는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두가지 사항을 신신당부했다. 첫번째는 ‘이릉송백’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릉’이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되어 시신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뜻한다. 왜란 이후 조선의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윤안성은..
'쥐와 참새' 창궐로 붕괴된 복지서비스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년), 임금이 사냥 나갔다가 길가에 주저앉아 우는 자를 보고 연유를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날품팔이로 어머니를 공양해왔는데, 올해 흉년이 들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임금이 한탄했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닌가. 백성들을 이렇게 굶기다니….”( ‘고국천왕조’) 고국천왕은 그 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런데 만약 그것으로 끝났다면….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군주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임시방편의 빈민구제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담당관청에 일러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구휼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해마다 3월부터 7월에 이르기 까지 관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가구수에 따라 ‘차등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