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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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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직접 밝힌 양녕대군 폐세자 이유-"대체 너 때문에 몇 사람이 죽었냐" “나이 10세 때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내….” 정조가 1789년(정조 13년) 양녕대군 이제(李제·1394~1462)의 사당을 위해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의 내용이다. 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극한 덕’을 뜻하는 ‘지덕사’라 했을까. 정조는 “무슨 덕이 제일 좋을까”라고 자문하고는 “그야 사양하는 덕, 그것도 명예를 사양하는 일”이라고 자답했다. 1962년 개봉된 영화 ‘양녕대군 주유천하’. 양녕대군이 부왕(태종)의 뜻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부러 거짓 광태를 부리며 주색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훗날 양녕대군이 ..
행방이 묘연했던 신라 명필 김생의 친필 글씨, “3건이나 있었다” 신라 명필 김생의 일화 중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김생의 필법을 이어받은 서예가인 홍관(?~1126)이 송 휘종 연간(재위 1100∼1125)에 진봉사(進奉使·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려고 파견한 사신)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천 수도암비’에서 확인된 ‘김생서(金生書)’ 글자(왼쪽)와 제작연대를 밝힌 연호인 ‘원화 3년’(808년) 글자(가운데), 그리고 제작목적을 알린 ‘비로자나불’ 글자.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이 비문은 ‘김생서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왕희지의 재림을 몰라본 중국인들 어느날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빈관에 머물고 있던 홍관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송나라 한림대조 양구와 ..
'의문사' 인종의 기일마다 대성통곡한 참선비 김인후, 그의 유언은?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 때에 문자를 이해하여 사람을 놀라게 했고…용모만 바라보면 속세 사람같지 않았다.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예의와 법도를 실천했다.” 1560년(명종 16년) 1월16일 이 기록한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졸기(부음기사)다. 절대 다수의 부음기사는 고인의 잘잘못을 엄정하게 따졌지만 김인후의 졸기는 그야말로 찬양일색이다. 그런데 그런 김인후의 유언 한마디가 심싱치않다. “(내가 죽은 뒤) 옥과(전남 곡성)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김인후는 지금으로 치면 곡성군수(옥과현감)를 지낸 뒤에도 명종 시대에 성균관 전적(정6품), 홍문관 교리(정 5품)와 성균관 직강(정 5품) 등의 관직을 명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직함은..
'피골이 상접한' 도산 안창호의 형무소 사진 1919년 무렵과, 1932년, 그리고 1937년의 도산…. 시간을 달리한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사진 3장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첫번째 사진은 일제강점기 대정 연간(1919~1926년)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 양식에 붙여놓은 것이다. 1919년 도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약할 당시의 자신만만한 안창호, 즉 시쳇말로 ‘리즈’ 시절의 사진을 여러 장 복사해서 붙인 것이리라. 1932년의 사진은 도산이 그 해 4월 29일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 날에 일제경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수감되었을 때의 수형카드이다. 소화 12년(1937년) 7월 4일 촬영한 사진이다. 그나마 양복을 차려입었지만 초췌한 모습이다. 1919년의 사진과 비교하면 몰라보..
홀연히 나타난 또다른 홍길동…, 홍길동전은 대체 누구의 작품인가 ‘홍길동전은 허균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금까지 ‘홍길동전의 작자=허균(1559~1618)’이라는 등식은 공리처럼 여겨졌다. 그와 함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전의 명대사는 풍운아 허균이 창조해낸 조선시대 ‘적서차별’의 상징말로 일컬어졌다. ■어느 향토사학자의 제보로 밝혀진 홍길동전의 존재 하지만 최근 허균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지소 황일호(1588~1641)이 쓴 홍길동의 간략한 일대기가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전주의 향토사학자 조봉래씨(68)가 국문학자인 이윤석 전 연세대 교수를 통해 황일호의 에 실린 ‘노혁전’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은 연구자들에게는 알려진 문집이지만 ‘홍길동전’이 아닌 ‘노혁전’이란 제목 때문에 조명받지 못했던 것이다. 노혁전에서 노..
악질친일경찰 노덕술의 훈장과 의열단 의백 김원봉의 '빨갱이' 딱지 (이 기사는 지난 주의 김원봉 선생의 서훈 논쟁을 다룬 의 후편입니다. 지난주 전체적으로 다룬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는 기사의 보완편이기도 합니다.) “1947년 1월16일 경남 통영에서 김원봉 장군의 대일 실전 조선의용대 기록영화를 상영하던 중 광복청년단원 20여명이 영화관을 습격해서 해설중이던 황용암씨를 무수히 난타한 뒤 통영경찰서에 인도했다. 경찰서는 황씨를 4일간 구금했다. 이 영화는 공보부의 검열을 받고 정식으로 허가받아 상영했는데….” 자유신문 1947년 1월25일자 기사이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조선의용대 기록영화가 백색테러를 당했다는 기사다.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의열단 ‘의백’이자 조선의용대장이며, 광복궁 부사령이자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김원봉 선생을 공격한..
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내가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 지 몰라.” 약산 김원봉(1898~1958)과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의 악연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물론 1차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의열단 동지인 유석현(1900~1987)과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정정화 선생(1900~1991)의 회고담, 독립운동가 송남헌(1914~2001) 등의 , 그리고 이런 자료들을 재구성한 과 각종 논문 등을 종합해보자. 의열단 의백 김원봉 선생. 의열단을 이끈 이를 단장이 아니라 의백이라 했다. 의형제의 맏형이라는 뜻 이다. 남이지만 피를 나눈 형제처럼 유혈투쟁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노덕술에게 화장실에서 잡혀가 모욕당한 의열단의 맏형 1947년 3월 하순 서울 청계천 은신처에서 변소에 앉아있던 약산 김원봉(1898~1958) 선생이..
성류굴 500원 동전같은 한줄기 빛에서 찾아낸 신라인의 낙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하는 본능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고생대인 2억5000만년전에 생성되어 온갖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 베이컨시트와 동굴진주. 석화, 동굴산호, 동굴방패 등을 자랑함으로써 ‘지하 금강’이라는 별명을 얻은 경북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도 ‘다 다녀가오!’하는 낙서가 한 둘이 아니다. 역사·고고학적인 가치를 지닌 낙서, 즉 옥석을 가리기도 힘들 정도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신라와 조선시대 명문을 확인한 바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의 심현용 학예연구사가 조선시대 명문을 발견해서 보고한 바 있고, 2015년에는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이 굴 입구 바로 위쪽 석회암 바위면에서 신라 진흥왕 4년(서기 543년) 3월8일 신라 축부 대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