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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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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째 '이중국적' 국보 백자 168호…원나라냐 조선이냐 (가)-‘백자 유리홍 매화 국화무늬 병(白磁釉裏紅梅菊文甁), 중국 원나라 시대, 국보 제168호…’(국립중앙박물관) (나)-‘백자 동화매국문 병(白磁 銅畵梅菊文 甁), 조선시대, 국보 제168호….’(문화재청) 국보 제168호로 지정된 유물은 당연히 하나일텐데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의 유물소개는 완전히 다르다. 우선 유물 명칭부터 그렇다. 박물관은 ‘유약 밑에 붉은 그림이 있는 매화와 국화무늬 백자 병’이라 해서 ‘백자 유리홍(釉里紅) 매화 국화무늬 병’으로 이름 붙였다. 그러나 문화재청 유물검색란은 ‘붉은 색을 내려고 발색제로 동(銅)을 사용한 백자 병’이라 해서 ‘백자 동화 매국문 병’으로 표기했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상반된 유물설명. 이렇게 이름부터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기관마다 다르..
노비, 재소자, 장애인…세종의 '혁명적인' 인권 복지정책 (가)=“출산 휴가 100일로는 부족하다. 산전 휴가 1개월을 더 보태라.” (나)=“산모만 휴가를 주었더니 안되겠다. 그 남편에게도 30일간 출산 휴가를 주어라.” 꼭 요즘 시대 어느 나라 복지정책을 일컫는 것 같다. 그러나 놀라지 마라. 이것은 다름아닌 만고의 성군이고,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대왕 복지정책의 일단이다. 그것도 조선시대에 사람 취급도 받지못한 것으로 알려진 ‘노비의 출산정책’이다. 조선 후기 곤장을 맞는 모습. 세종은 범죄자에 대한 노여움과 분풀이로 태형을 함부로 가하는 것을 막았다. 가죽채찍을 대용으로 사용하되 50대 이하로 규제했다.■노비의 남편에게도 1개월 출산휴가를 줘라 (가)는 1430년(세종 12년) 10월 19일 세종이 승정원에 내린, 그야말로 노비를 보살펴줘야 할 어엿한 ..
혜공왕, 만월부인, 맥놀이, 스위트 스팟…'에밀레종, 천상의 소리' 비밀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일명 ‘에밀레종’을 둘러싼 설화는 해괴하고 끔찍하다. 같은 주제인데 여러 버전으로 전해진다. 즉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해서 스님들이 시주를 받으러 다녀야 했다. 그런데 어느 가난한 집 부인이 시주를 받으러 문을 두드린 스님에게 “마음 같아서는 시주 하고 싶지만 있는 것은 갓난아이 뿐이니 이 아이라도 시주 받겠냐”고 했다. 스님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열심히 시주받아 종의 제작에 보탰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종은 완성되지 않았다. 2003년 타종 및 음향.진동 측정조사를 위해 종을 치는 모습.스님이 이상하게 여겨 점을 쳐보니 ‘받을 시주를 받지 않아서 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궤가 나왔다. 스님이 문득 갓난 아이..
숙종 영조 부자는 왜 노인대접을 받으려 생떼를 썼을까 “주상(숙종)께서 기로신 10명을 초대하시어 종일토록 즐겼는데 5차례에 걸쳐 5잔씩 술을 마시도록 했다. 5번째 잔은 ‘사기로소(賜耆老所·기로소에 하사한다) 네 글자가 새겨진 큰 은술잔으로 마시게 했다. 기로신들은 주상의 명을 사양하지 못해 만취했다.” 1719년(숙종 45년) 4월18일 59세가 된 숙종 임금(1661~1720, 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던 숙종은 “병든 몸이 궁전에 오르니…여러 관리 모여있고…이 연회는 본시 높이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가득한 술잔에 자주 손이 간들 어떠리”라는 시를 지었다. 이날의 연회 내용을 첩자로 만든 것이 바로 ‘기사계첩’이다. 에 ..
크리스마스 선물, 7000년전 고래사냥의 시원이 된 반구대 암각화 “저기 무슨 그림일까.” 지금으로부터 48년전인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울산 울주군 언양읍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특히 천전리와 대곡리 일대의 계곡에서 원효대사가 양지의 도움을 받아 과 등을 저술했다는 반고사터를 찾고 있었다. 반고사터로 추정되는 반구대 마을에는 절터는 물론 정몽주의 유배를 기념하는 사당터도 있었다. 1965년 건설된 사연댐 때문에 마을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강가의 절벽엔 조선의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그 기념으로 새긴 한시와, ‘나 여기 다녀갔소’를 알린 사람의 낙서, 그리고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있었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입체화한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해동의 요순' 세종은 왜 짜증과 불통의 대마왕이 되었나 (가)“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면서 내가 한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따위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저속한 선비다.” “내가 너희에게 처음부터 죄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보자보자 하니 안되겠다. 죄를 벗기 힘들겠구나.” 감정적인 언사로 일관하고 있는 발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러나 이것은 새발의 피다. (나)“대소신료들이 떼지어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부덕한 임금이라 마음대로 한다” “내가 세 살 먹은 아이들을 달래는 것 같구나.” “너희가 정승이냐” “친형제 같은 원로대신도 날 친견하지 않는다. 너희가 무슨 물건이기에 날 보려고 하는가.” “정승 1000명이 나와 말해봐라. 그래도 난 굽히지 않는다.” “분명한 일은 임금 독단으로..
비격진천뢰, 일본군을 '공포'에 빠뜨린 비밀병기 개발자 이장손을 아시나요 “1592년(선조 25년) 9월1일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다퉈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쇠조각에 맞은 20여명에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경상좌병사 박진(?~1597)이 비격진천뢰를 써서 경주성을 탈환했다는 실록기사다. 비격진천뢰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조선의 비밀병기였음을 알려주는 기사다. 그러나 현전하는 실물자료는 5점 안팎에 불과했다.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의 무기고에서 11발의 비격진천뢰가 발굴됐다.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년)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한 최첨단 무기였다. |호남문화재연구원 제공 ■11발이나 쏟아진 비격진천뢰 그러던 차에 이번에 전북 무..
애써 <택리지>를 쓴 이중환의 결론, "18세기는 헬조선이었다" “택리(擇里), 즉 사는 곳을 택하는 책은 이중환이 썼는데 사람들이 그 책에 엄청 현혹되어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擇里之書李重煥創著 人多被惑 其弊無窮)”(이규경의 ‘택리변증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은 이중환(1690~1756)의 가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염려하는 평론을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는 사대부가 조선 팔도에서 살만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요즘으로 치면 어느 지역에 아파트와 땅을 사놓으면 돈을 번다는 식의 이야기를 역사와 경제, 유통, 명승의 관점에서 ‘족집게’처럼 콕 찍어 정리했으니 ‘혹’할 만 했다. 1723년(경종 3년) 9월 이중환이 임청각의 고성 이씨에게 보낸 편지다. 목호룡의 배후 세력으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가 9월2일 풀려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