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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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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의 저주, "잠을 깨우는 자는 죽으리라" 1973년 여름 경주 천마총을 한창 발굴하고 있을 때였다. 전국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고 민심마저 흉흉했다. 경주에서는 멀쩡한 신라왕릉을 발굴하는 바람에 하늘이 노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그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경주 김씨 종친회 노인들이 발굴현장을 방문해 발굴조사를 중단하라고 법석을 떨었다. 어떤 노인은 현장에 드러누웠다. 시민들 사이에는 “데모라도 해서 발굴을 막자”는 여론도 비등했다. 왕릉을 발굴하면 액이 따른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러던 7월26일 오후 왕릉의 흙더미 사이에서 눈부신 금빛유물이 나타났다. 1,500여 년간의 긴 잠을 깬 순금제 신라금관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1973년 7월26일 출토된 천마총 금관...
김기춘의 파부침주와 허균의 유민가외 ‘근검협동(勤儉協同) 총화유신(總和維新)’. 1974년 1월 1일자 신문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휘호다. 한해의 국정방향을 사자성어로 정리한 대통령의 각오가 담겨있다. 그런데 바로 신년휘호 사진 옆의 대통령 신년사 기사가 살풍경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개헌서명운동을 즉각 중단할 것을 엄중히 경고한다’는 신년사가 떡하니 실렸다. 1974년 1월1일자 매일경제 1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근검협동, 총화유신'이라는 신년휘호를 남겼다. 한편으로는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이른바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하라'고 경고했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인 1962(혁명완수)~79년(총화전진)까지 빼놓지않고 신년휘호를 발표했지만 매양 이런 식이다. 유비무환..
475년 9월 한성백제 최후의 날 '백제본기 개로왕조'는 한편이 대하드라마 같다. 전쟁과 냉전이 오가고, 스파이가 암약했으며, 간계와 반간계, 배신과 복수, 그리고 치열한 외교전까지 어우러진 숨막히는 108년의 동족상잔의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으니 말이다. 마치 남북한의 열·냉전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 숨막혔던 475년 9월의 기록을 보자. "(백제 망명인 출신의 고구려 장수) 걸루와 만년이 말에서 내려 백제 개로왕에게 절했다. 그런 뒤 왕의 얼굴에 세번 침 뱉고 죄상을 따지고 아차성 밑으로 끌고가 왕의 목을 벴다.” 이것이 가 전한 ‘한성백제 최후의 날’이다. 백제로서는 ‘아차성의 굴욕’이었다. 이로써 기원전 18년부터 시작된 백제의 한성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이날은 고구려-백제 간 벌어진 처절한 동족상잔(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부..
난 왕씨의 혼이 될테다. 너희는 이씨의 세상에서 살아라 “산소가 도굴됐는데 그 안을 보니까 무슨 선녀그림이 있었다는 거야. 한 6~7명이 봤다지.” 1980년대 후반 동아대 박물관 자료과장 박문국은 재실관리인에게 희한한 말을 들었다. 박문국은 그 유명한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 한 분인 송은(松隱) 박익 선생(1332~1398년)의 후손. 두문동 72현은 새로 개국한 조선에 충성하지 않은 절의신(節義臣)의 상징이다. 송은 선생의 묘는 경남 밀양시 청도면 화악산 중턱(해발 505m)에 있었는데 1987년 도굴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도굴 구덩이를 발견하고 무덤 안을 내려다본 경찰관 등 몇 명이 무슨 선녀그림 같은 것을 어렴풋 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덤 전면에 파헤친 도굴 갱을 서둘러 메웠기에 박문국으로서도 더 이상의 확인은 어려웠다. 경남..
'빨간 마후라' 해인사 폭격을 거부하다 이런 말 들어봤는지요. 해인사와 해인사 안에 있는 고려대장경판이 한국전쟁 때 잿더미로 사라질 뻔했다가 겨우 모면했다는 소리 말입니다. 어렴풋 접해보셨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공군 조종사를 우리가 ‘빨간마후라’로 일컫고 있는데, 그 유래가 어떠했는지 들어보셨는지요. 저는 두가지 사례를 공부하면서 역사를 제대로 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잘못 알려진 것을 올바로 고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해인사와 고려대장경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해인사와 고려대장경을 지킨 주인공임을 자처하는 일대기가 등장하고, 정부기관인 문화재청은 그 일대기를 아무런 거름장치없이 받아들여 곧이곧대로 기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진실과 다르다는 것이 한국전쟁에 ..
해상왕 장보고의 야망과 좌절이 깃든 청해진 본영 “아아, 원한으로 질투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걱정한 이는 진(晋)의 기해가 있고, 당에는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이는 두목(杜牧·803~852년)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의 ‘장보고·정년전’을 전재한 송기(宋祁)의 역사서 ‘신당서(新唐書)’에 적힌 내용이다. 이 평가는 장보고와 쌍벽을 이룬 정년(鄭年)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청해진 본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장도. ◇나라를 위해선 원수의 손도 잡는다 장보고와 정년은 서로 힘을 자랑했던 라이벌이었다. 정년과 견줘 나이는 10년 많았으나 힘에서는 다소 밀렸던 장보고는 ‘나이’로 누르려 했고, 정년은 ‘기예’로 대들며 앙앙불락했다. 둘은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 됐는데 대적할 자가 ..
851년 봄 장보고 세력의 슬픈 강제이주 1996년, 발굴단은 장도의 성 내부 무너진 석축 안쪽에서 둥그런 구덩이 유구를 발견했다. 당시 발굴단 학예사 김성배의 회고. “석축이 무너져 내린 부분이 있었어요. 무슨 건물지가 있는 줄 알고 조사했는데 건물임을 입증하는 초석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무너진 석축내부를 정리하다보니 둥그런 윤곽이 보였어요. 잘 들어내니까 철로 만든 유물의 끝이 보였어요.” 김성배의 말이 이어진다. 청해진 주민들은 장보고를 잃은 뒤 서둘러 제사용기 및 생활용품을 묻고 강제이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유구에서 세발 달린 정(鼎·철솥)과 함께 사각형 철제 소반, 편병, 청동병, 저장용 토기 등 범상치 않은 유물들이 나왔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세발솥은 알려진 대로 고대 제사용으로 쓰인 대표유물. ‘..
애완동물은 왜 망국의 조짐인가 ‘춘추 5패’ 중 한 사람인 초 장왕(재위 기원전 614~591)에게 아끼는 말(馬)이 있었다. 장왕은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수 놓은 옷을 입히고, 화려한 집에서 기르면서, 침대에 눕게 하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였다. 그런데 그렇게 끔찍하게 사랑했던 말이 죽고 말았다. 얼마나 먹였던지 살이 쪄서 죽은 것이다. 슬픔에 빠진 장왕이 신하들에게 명한다. “대신들은 모두 상복을 입어라. 말의 시신은 대부(大夫·재상 바로 밑의 고관대작)의 예절로, 즉 속널과 바깥 널을 구비한 관곽에 안장하고 장례를 지내라.” 대신들은 “말이 죽었을 뿐인데, 무슨 대부의 예로 장사를 지내냐”며 극력 반발했다. 왕은 “누구든 반대하는 신하는 죽여버린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때 우맹이라는 사람이 나섰다. 본래 초나라 음악가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