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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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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엔 지하만리장성이 있다 “포격전이 한창일 때 F-80 제트전투 폭격기 편대가 나타나 공산군 진지에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활활 타오느는 화염, 그리고 푸른 하늘 높이 뭉클 솟아오르는 소형 원자운 같은 버섯형 흑연. 유엔군은 공산군 진지 아래 병사들이 전부 불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전멸했어야 할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 1952년 불모고지 전투를 취재한 일본기자가 본국에 타전한 기사내용이다. 일본기자는 미군 장교의 말을 인용하면서 “산의 정상에서 20미터 쯤 내려온 공산군의 지하진지를 네이팜 탄이 완전히 불태울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대체 공산군 진지에 어떤 장치가 있었기에 이토록 철옹성이었을까. 아니면 이 지역에 만리장성이라도 구축했단 말인가. 그랬다. 정말로 중국군은 이른..
이승만과 김일성의 '합작 다리'를 아시나요 1950년 12월 30일 오전 11시. 기관사 한준기씨가 수색 차량기지를 출발했다. 개성역까지 가서 군수물자가 실린 화차를 달고 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러나 개성역에 도착하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 기관차를 인계받고는 다시 평양까지 올라가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31일 오전 1시. 열차가 황해도 평산 한포역에 도착하자 다시 급박한 소식이 들렸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가 불가피해지자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한준기 기관사는 후진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진으로 개성역에서 간 한씨는 다시 화차 25량을 끌고 파주 장단역에 닿았다. 31일 밤 10시쯤이었다. “기차를 멈추고, 기관차 승무원은 기차에서 내려 대기하라.” 남과 북이 시차를 두고 건설한 승일교. 북의 김일성이 시..
태종 이방원이 충성서약에 목맨 이유 “우리들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은 임금을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고, 부귀와 이익을 다투지 말며, 다른 자의 이간을 듣고 의심을 품지 말며, 과실은 바로잡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해 줄 것입니다.”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1392년 7월 17일)한 지 두 달이 지난 뒤인 9월 28일, 정도전과 배극렴 등 개국 공신들이 총출동했다. 태조 이성계를 향한 충성서약식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개국 공신들은 “처음과 끝이 같도록 충성을 바치겠다”면서 “자손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신(神)이 벌을 내릴 것”이라 재차 다짐했다. 조선시대 공신들의 충성서약을 받던 회맹터. 지금의 청와대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배신자는 대대로 복수할 것이다” 그러나 “공신 간 절대 반목하지 않겠다”..
억울한 여인을 죽인 세종의 잘못된 판결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은 장 100대이고, 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형률·범간조(犯奸條)’) 1637년 명나라가 제정한 이다. 조선도 이 에 따라 성범죄나 성희롱을 엄단했다. 보기에도 무시무시하다. 강간범은 교수형에 처하고 미수범이라도 장 100대에 유배 3000리의 처벌을 받았다니…. 욕정을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성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1404년(태종 4년)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와 그들의 처남인 박질이 능지처사의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주인집 딸을 집단 성폭행한 죄였다. 피해자(내은이)는 손발이 묶인 채 밤새..
'굴러온 돌(백제)'과 '박힌 돌(마한)'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의 창시자인 온조는 굴러온 돌이자,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온조가 누구인가. 비류와 함께 고구려 추모왕(주몽)의 서자가 아니던가. 무슨 사연인가. 북부여의 주몽은 북부여 태자인 주몽이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한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못한 것이 있었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공주 수촌리에서 확인된 금동관모(왼쪽)과 이번에 경기 화성에서 발견된 금동관모의 흔적..
목숨 걸고 역린을 건드려라 “내가 사심을 버리고 의견을 물은지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진언하는 자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역린(逆鱗)을 건드릴까 두려워하는 것인가.” 1491년(성종 22년) 1월 6일, 성종이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다. 재변이 잇달아 “내가 부덕한 탓이니 어느 누구라도 나서 무슨 말이라도 직언을 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종은 “대체 내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임금으로 생각하느냐”고 다그쳤다. “다시 한번 고한다. 재앙을 만나서 나의 부덕함과 부족함을 듣고자 하니 기탄없이 직언해주기 바란다.” 그 후 4년 뒤인 1495년(연산군 1년), 대간이 간언(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사헌부와 사간원 등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대간이 잘못을 논한 것은 바로 공론입니다. ..
첨성대는 결국 '피사의 사탑'이 되는가 “별기에 ‘선덕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축조했다(別記云是王代鍊石築瞻星臺)’는 기록이 있다.”( ‘선덕여왕 지기삼사’) 에 기록된 633년(선덕여왕 2년)의 첨성대 축조기사이다. 참으로 소락(疏略)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첨성대’가 ‘별(星)을 관찰하는(瞻) 건축물(臺)’이라는 이름이므로 천문대였음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후대의 기록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지’와 ‘경주부’ 등을 보자.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척5촌, 둘레가 21척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첨성대는 833년(선덕여왕 2년) 별(星)을 관측하는(瞻) 건축물(臺)의 이름으로 ..
조선판 '세월호' 참사와 태종의 '사과' 1656년(효종 7년) 8월27일, 전라도 해안에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전라도 해안에서 실시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가한 전함들이 거센 비바람에 휘말려 떠내려 가거나 침몰한 것이다. 금성·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에서 출동한 배들이었다. 문제는 이 사고로 죽은 병사들이 1000여 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진도군수 이태형도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고는 전남 우수사 이익달이 저지른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즉 이익달이 “풍랑 때문에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경험많은 부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훈련을 강행했다가 참변을 부른 것이다. 효종은 “보고를 듣고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다”며 “이익달 등 관련자들을 엄중 문초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시대 조운선을 복원한 모양. 을 근거로 만들었다.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