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327)
'블랙코미디' 휴전회담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고려하는 토의는 끝났다. 앞으로는 협의하지 않겠다.” 1951년 8월10일,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판문점. 유엔군측 수석대표 터너 C 조이 중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30분간이나 성명서를 낭독했다. 조이 중장은 휴전회담의 핵심내용이 되는 군사분계선을 ‘현재의 양측 접촉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유엔측의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은 한 달 전(7월10일) 정전회담을 시작하면서 그때까지 군사분계선 설정 등 핵심의제를 두고 팽팽한 접전을 벌여왔다. 공산군측은 전쟁 이전의 상태인 38도선을, 유엔군측은 현재의 양측 접촉선(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조이는 이날 “더는 공산군측의 의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면서 “앞..
코끼리가 유배를 떠난 까닭은?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됩니다.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다. 병조판서 유정현의 진언에 따라 ‘코끼리’가 유배를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문제의 코끼리가 그만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화가 난 코끼리가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대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는데,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체 먹지않아 날로 ..
'왕수석' 정약용의 무단이탈기 만약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청와대 왕수석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면? 그것도 야당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던 수석이 3일이나 잠수를 탔다면? 다산 정약용(1762~1863년)을 두고 하는 얘기다. 요즘 같으면 도하 각 언론에 ‘왕(정조)의 남자’ 정약용의 근무지 무단 이탈 소식을 대서특별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797년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이었다. 당시 36살의 다산은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승정원 좌부승지로 일했던 다산으로서는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법에는 벼슬하는 자라면 임금을 뵙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는 도성 문을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뵙고 재가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출발했다.” 다산의 열초산수도. 다산이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한강(열수)에서 ..
정전협정 '바로' 읽기 1953년 7월27일, 판문점 일대의 하늘은 두툼한 구름이 뒤덮여 있었지만, 구름 사이로 이따끔씩 햇빛이 새어나오곤 했다. 1127일 간의 혈전(전투) 속에서 764일 간의 지루한 설전(휴전협상) 끝에 마침내 평화의 날이 찾아온 것이다. 정전협정 조인식장으로 설치된 건물의 벽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두마리 그려져 있었다. 이윽고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측 수석대표와 남일 공산군측 수석대표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조인식장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수석대표들은 단 한마디의 인사말도 나누지 않고 악수도 생략한채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퇴장해버렸다. 그날 오후 10시..
딸 낳으면 집안이 망한다 조선 후기의 혼수품 내역을 기록한 혼수물목. 세로 31㎝에 가로는 1m가 넘는다. 신부가 준비해야 할 장농, 상의, 바지, 고쟁이 등의 갖가지 혼수용품의 명칭과 수량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신이 박연의 아들 박자형을 사위로 맞이했사온데…. 사위가 제 딸의 혼수품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여자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행실이 부도덕하다’며 쫓아내려 합니다.” 1445년(세종 27년)의 일이다. 전 현감 정우(鄭瑀)가 사헌부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고소장에 나타나는 박연은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일컬어진 바로 그 ‘유명한 분’이다. 한데 박연의 자식 교육은 ‘불합격점’을 받을 만 했다. 소장을 보면 정우의 사위가 된 박연의 아들 박자형이 혼수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 부인을 두고 ‘뚱뚱하고..
연산군을 위한 변명 “임금이 두려워 한 것은 사서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성군의 말씀이 아니다. 연산군의 말씀이시다. 비록 폭군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 한 탓일까. 연산군은 넘지 못할 선을 넘고 말았다. 절대 보아서는 안될 사초를 보았을 뿐 아니라 아예 ‘임금의 일’은 역사로 남기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렸다. 때는 바야흐로 1498년 편찬과정에서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파문을 일으켰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것을 빗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진노한 연산군은 “당장 김일손의 사초를 모조리 가져오라”는 엄명을 내린다. 승정원 일기의 기초가 된 사초. 광주 이씨 가문이 소장한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배탈외교와 핑퐁외교 1971년 7월9일이었다. 파키스탄을 방문 중이던 헨리 키신저 미백악관 안보담당특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 그는 야하칸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만찬을 전격 취소하고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80㎞ 떨어진 나디아갈리 산장에서 휴식을 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튿날에도 배탈은 낫지 않았다고 보도됐다. 전 세계가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이목을 따돌리기 위한 감쪽같은 속임수였다. 그는 그 이틀간 비밀리에 당시 적성국가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만나고 있었다. 이는 훗날 ‘배탈외교’, 혹은 ‘복통외교’로 일컬어졌다. 장발의 ‘히피선수’ 글렌 호완. 1971년 나고야 세계대회 도중 중국선수 좡쩌둥과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키신저의 ‘배탈외..
삼국시대 '최고의 사랑' 신라 진평왕대(재위 579∼632년)의 일이다. 경주 율리에 절세미인이 살고 있었다. 설(薛)씨의 성을 가진 여인이었다. 비록 평민의 빈한하고 외로운 집 처자였지만 용모단정한 뜻과 행실로 유명했다. 뭇 남성들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을 흠모했지만 감히 말 한 번 걸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설씨 집에 큰 일이 생겼다. 나이 많은 설씨의 아버지가 병역의 대상으로 징발됐다. 아버지는 정곡(正谷·경북 의령)의 수자리(국경수비) 당번으로 차출된 것이다. 사량부 출신으로 가실(嘉實)이라는 청년이 그 설씨녀의 딱한 소식을 들었다. 그 역시 상사병이 걸릴 정도로 설씨녀를 짝사랑하던 소년이었다. 그는 잽싸게 설씨녀를 찾았다. “제발 이 몸으로 아버지의 일을 대신케 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전남 여수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