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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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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의 '막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치(한나라 여태후)와 무조(무측천·측천무후) 같은 이에 이르러 어리고 나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행하였다.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운 게 하늘의 이치다.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를 지은 김부식은 를 쓴 뒤 맨 끝에 이런 평론을 달았다.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을 풀어놓은 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한 것이다. 김부식은 한 술 더 뜬다. 선덕여왕을 두고 “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빈계지신·牝鷄之晨)’고 했다.”고 표현하면서…. 요즘 같으면 큰일 날 ‘막말’을 역사서에 버젓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
응답하라 1937년 “이것은 발해 온돌이고, 요 밑에는 옥저 온돌이고….” 지난 2007년 7월 22일, 연해주 체르냐치노 마을 유적을 발굴 중이던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깜짝 놀랐다. 같은 주거지에서 1m 깊이를 두고 발해(698~926)와 옥저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의 온돌(쪽구들)이 차례로 발굴된 것이다. 4일 뒤인 26일 필자는 경향신문의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기획팀 일원으로 이곳을 찾았다가 이 흥미진진한 유구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주거지 1기의 바닥에서 옥저 온돌이 발견됐고, 바로 그 1m 위에 발해 온돌이 차례로 확인됐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마을은 옥저시대 사람들의 터전이었다는 것. 그러다 옥저가 사라진 지 400년 뒤에 이 마을엔 발해 사람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것. 발해인들은 옥저..
박정희의 XXX 따러 왔시요. “청와대를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1968년 1월22일 저녁 7시. 방첩대 사령부 식당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북한 유격대원 김신조(당시 27살)의 얼굴은 오기에 가득 찼다.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작전에 실패한 적군의 자존심으로 도끼눈을 뜬 채” 기자들의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비록 투항했지만, 전향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영문도 모르는 기자회견장에 개끌리듯 끌려나와 대답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날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니 격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를 떠올린 김신조의 후일담이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그것도 ‘청와대를 습격해서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니….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게다가 김신조 일당이 제지 당한 곳이 청와대와 직선..
치욕의 병자호란 속 '귀중한 1'승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1637년 1월30일은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적인 날이다. 말이 ‘조아린다’는 것이지 사실은 머리를 찧어 피가 밸 정도로 용서를 비는 절차였다. 이나마 다행이었을까. 청나라는 사실 항복의 예를 갖출 때, 삼배구고두보다 더 지독한 의식을 요구했던 것 같다. 즉 인조가 두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문채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옛날 진나라 3세황제가 된 자영(子영)이 노끈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유방(한 고조)에게 항복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죽여든 살리든 알아서 해달라는 무조건 항복의 의미였다. 하지만 청 태종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은 것 같다. 항복일을 이틀 남..
고구려의 청야전술 vs 미군의 교살작전 “지금 한나라 군사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성 주위에 해자(垓子·도랑)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판의 곡식을 비워 대비하면(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그들은 반드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굶주려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 틈에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서기 172년 11월, 고구려 신대왕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연다. 막강한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이끌고 처들어온 것이다. 그 때 국상 명림답부가 주장한 전법이 바로 ‘청야(淸野)전술’이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맞대응을 피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자 한나라 군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철수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적군을 좌원(坐原)에서 맹공했다. 전의를 상실한 한나라군은 대패했다...
2100년 전 장례식에 생긴 일 “의창(창원) 다호리에서 국내 최고(最古)의 철제 농구 등 발굴. 삼한은 고도의 문화국가.”() “삼한시대 청동·철기유물 대량출토, 철제사용 문명국가 입증.”() 1988년 4월8일과 9일, 도하 각 신문이 획기적인 고고학 발굴조사성과를 앞다퉈 전했다. 경남 의창군 다호리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 즉 삼한시대의 발전상을 증언해줄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는 소식이었다. 과연 그랬다.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가운데를 파내 만든 목관 안팎에는 ‘위서·동이전·변진조’와 ‘동이전·진한조’ 기록을 입증할 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선 중국의 전한시대(기원전 1세기)에 사용됐던 오수전이 출토됨으로써 확실한 연대가 확정됐다. 무엇보다 청동기와 함께 다양한 철기가 출토됐다. 다호리 제기에 담긴채 발견된 2100년 전의 감..
한국전쟁, 원자폭탄 불바다 될 뻔한...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모든 행동을 취할 겁니다.” 1950년 11월30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애매모호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눈치 빠른 기자들이 대통령의 발언을 파고 들었다. “그 모든 행동에는 원자탄도 포함됩니까.”(의 젝 도터 기자)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가 포함됩니다.”(트루먼) “그 말은 핵무기 사용을 적극 고려한다는 말입니까.”(의 폴 리치 기자) “핵무기 사용에 대해선 항상 적극적인 고려가 있었습니다.”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1년 9월15일 작성한 원자폭탄 가상표적. 강원 평강이 표적이었다, 자칫했으면 불바다가 될 뻔했다. 미국은 중국군이 전면개입하자 한반도와 중국 만주 등에 원자폭탄의 투하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평강엔 10여 차례 용암이..
배터진 왕·귀족과 굶어죽는 백성들 “태종무열왕은 하루에 쌀 서 말(斗)의 밥과 꿩 아홉마리를 먹었다. 백제를 멸한 뒤에는 점심을 먹지 않고 다만 아침 저녁만 먹었다.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말, 술 여섯말, 꿩 열마리를 먹었다.”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을 다룬 기록이다. 무열왕은 대식가다. 왕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리려 다소 과장을 했을 수는 있다. 백제 멸망 후 두끼만 먹었다는 것은 백제고토의 민심수습과 고구려 정벌, 당나라와의 외교 등으로 할 일이 많아졌음을 뜻한다. 안악 3호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귀족 부엌. 여인이 시루 안을 휘휘 젓고 있다. ■신라왕·귀족은 탐식가 하지만 두끼만 먹었다는 데 하루 세끼 먹었을 때의 식사량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하기야 는 대식가 태종무열왕의 식탐을 다루면서 ‘백성들이 이 때를 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