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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10)나주 복암리 下 - 마한의 수수께끼

결국 마한은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유지해온 고대국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백제와는 다른 문화를 유지했다고 백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 즉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백제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800년간이나 정치체를 유지했다면 왜 마한과 관련된 역사기록은 없을까.’

차근차근 풀어보자. 마한에 대한 기존의 통설을 살펴보자.


■ 마한의 역사가 800년이라고?

“마한은 BC 2세기 무렵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백제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차 흡수됐으며, 4세기 후반에는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던 잔여세력까지도 백제에 통합되었다.”

이 통설은 두계 이병도가 일본서기에 나온 반설화적 기록을 해석한 이후 구축됐다. 

“(왜가) 침미다례(枕彌多禮·전남 지방의 마한 소국으로 해석)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다. 왕 초고(肖古·근초고왕)와 왕자 귀수(貴須·근수구왕)가 군사를 이끌고 맞으니….”(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369년)

이병도는 이를 토대로 근초고왕 부자가 369년 전남지역을 원정,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했다고 보았다. 이후 백제가 직접통치보다는 간접통치라는 형식을 취해 영산강 유역을 다스렸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하지만 일부 고고학자들은 나주 복암리 고분의 예에서 보듯 전형적인 백제 석실분(6세기 중엽)이 나타나기 전까지 백제와는 전혀 다른 묘제의 전통을 유지했다는 점을 중시했다. 통설이 달리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마한 800년의 역사’가 그것이다. 이것은 지역적인 욕구와 맞물려 이른바 ‘마한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풍납토성 우물터에서 켜켜이 쌓인 채 확인된 215점의 토기류. 토기의 아가리 부분이 의도적으로 파괴된 채 확인됐는데, 이는 제사의식의 한 형태다. 이 가운데는 5세기 초 제작된 영산강 유역의 토기류가 보인다. 한성백제 중앙이 지방세력을 서울로 불러모아 제사를 지낸 뒤 복속의례 차원에서 토기를 매납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신대 박물관 제공

“과연 고고학 자료가 마한의 실체를 제대로 100% 증거할 수 있는가. 자칫하면 이른바 지역고고학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까.”(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렇습니다. 최근 일각에서 주장하는 마한론은 근거가 빈약하고, 위험천만한 학설입니다.”(최성락 목포대 교수) 

■ 믿을 수 없는 삼국사기?

무슨 얘기인가. 우리 측 정사인 삼국사기를 꼼꼼히 살펴보던 기자의 눈에 밟히는 대목이 있다.

“(AD 8년)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고~1년 뒤 마침내 (마한은) 멸망했다.”(백제본기 온조왕조)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이 이미 AD 9년 망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 역사학계가 이 삼국사기 기록을 믿지 않는 것이다.

“역사학계는 마한 멸망기록을 후대에 의도적으로 (온조왕대로) 소급해서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했지. 이 대목을 54국 마한 연맹체의 우두머리격인 목지국(目支國)의 멸망기록이라고 보는 거지. 잔존 마한세력은 백제의 핍박을 피해 점차 한반도 서남부로 내려갔다고….”(조 관장)

“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 측 기록 때문이죠. 특히 진서에는 277~290년까지 마한이 진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최 교수)

이병도는 바로 이 중국 사료와 일본서기의 반설화적 내용을 차용, 백제의 마한 병합시기를 근초고왕대인 369년으로 본 것이다. 

“너무 견강부회가 아닌가요? 일본서기의 반설화적 내용을 마한 병합의 통설로 활용한 것이 어쩐지 무리스럽기도 하고….”(기자)

“학계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지. 우리 측 사료보다는 중국·일본 사료에 기대는 측면도 강하고…. 곁들여 말하자면 두계(이병도)의 학설을 절대 깰 수 없는 금과옥조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고….”(조 관장)


■ 마한론과 모한론의 위험천만한 동거?


어찌됐든 이렇게 굳어진 정설인데, 이 정설마저 새롭게 대두된 마한론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즉 정치체로서의 마한이 AD 6세기 중엽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존재했다는 새로운 주장까지 등장한 것이다. 우리 측 정사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AD 9년 망했다는 마한이 실은 AD 6세기까지 존재했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운 것인가. 


“AD 369년 멸망했다는 역사학계 정설도 의아스러운데, 마한의 역사가 800년이라? 좀 무리스럽지 않나요? 게다가 영역과 문화는 다르지 않나요. 영산강 유역이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고 해서 한꺼번에 깡그리 백제의 문화가 유입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기자)

“물론이죠. 지금도 지역색이 있잖아요. 중앙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지역색 강한 문화가 유지되는데….”(이한상 대전대 교수)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다 하더라도 기층문화는 있었을 겁니다. 그곳의 민중은 비록 백제의 영역에 살았지만 전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던 토착세력, 즉 마한 연맹체의 유민이었을 것이고 그 문화도 유지했겠죠.”(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

더욱이 섣불리 마한론을 개진하다 보면 위험천만한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모한론(慕韓論)이 바로 그것이다. 송서(宋書) 왜왕조를 보면 438년 왜왕은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 등 6국에 대한 통솔권을 자임한다. 송나라는 451년 집요한 왜의 외교에 백제를 빼고 가라(加羅)가 첨가된 6국의 안동대장군이라는 가호를 준다. 일본학자 가운데는 여기에서 보이는 모한을 백제와는 다른, 영산강 유역의 독자세력으로 보고 이를 왜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했다.

즉 모한=마한이며 이것은 왜의 식민지라는 것이다.

“모한을 인정하면 임나와 가라, 신라, 진한을 인정해야 하지. 그렇게 되면 이들이 모두 왜의 식민지라는 소리가 됩니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지.”(조 관장)

“위험천만한 외줄타기죠. 마한을 잘못 강조하다 보면 자칫 일본학계가 쳐놓은 덫에 걸릴 수 있어요. 478년까지 한반도에는 삼국이 아니라 삼한 즉 모한, 진한이 남아있다는 괴상한 논리가 성립되는 겁니다.”(최성락 교수·이정호 동신대 교수)

■ 백제를 극복하지 못한 영산강 세력 

한 가지 더. 기자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 기록에 눈이 갔다.

“498년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탐라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자 중지했다.”

무진주는 지금의 광주, 즉 영산강 유역이다. 백제 동성왕이 군사를 이끌고 영산강 유역까지 내려갈 정도였다면 이곳은 이미 백제의 명실상부한 영역이었다는 소리다. 

그러면 영산강 유역에 분명히 존재했던 대형옹관고분 세력(반남고분 세력)과 복암리 세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산강 유역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일본 규슈로 이어지는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지였습니다. 3세기부터 토착묘제인 대형옹관묘를 썼던 이른바 옹관고분사회가 5세기 이후 반남고분세력(나주 신촌리·대안리·덕산리)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475년 한성백제가 속절없이 망하면서 영산강 유역에서 큰 파동이 일어났겠죠. 백제왕권이 약해지자 그 틈을 이용하여 복암리 세력을 비롯한 반남고분 주변의 다른 세력들이 성장했던 것이고….”(김낙중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관)

하지만 영산강 세력은 ‘정치체로서 마한’의 기치를 올릴 만큼 강성하지는 못했다. 김낙중 학예관은 “국가단계의 지표는 궁궐과 성벽 등인데 영산강 유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정호 교수도 “마한을 독립세력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마한이 정말 강했다면 한성백제가 멸망했던 그 어수선한 시기에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 독립을 선언했겠죠. 하지만 한성백제의 지배질서에 편입되었던 반남고분 세력은 쇠퇴했고, 복암리 세력 등이 우후죽순 격으로 떠올랐어요. 그러나 그 역시 웅진(475년)-사비(538년) 천도의 격동을 겪은 뒤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백제에는 대항하지 못했고….”(이정호 교수)

기자는 한성백제 멸망기(475년)에 등장한 장고분(전방후원형 고분)이 50년도 안돼 홀연히 사라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요. 마한은 54개국이 맺은 느슨한 연맹체였다는 것과, 마한이라는 명칭도 (백제와 신라와 같이) 스스로 정한 국가명이 아니라 남이 그렇게 불러준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최성락 교수)

■ 삼국사기로 돌아가자

지난 6월30일. 나주 복암리에서 숱한 수수께끼를 안고 돌아온 기자는 풍납토성에서 5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한성백제 우물터를 보았다. 이 우물터에는 무려 215점에 달하는 토기들이 완형의 상태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토기들은 아가리 부분을 의도적으로 깬 형태였다. 제사를 위한 파괴의식이 분명했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의 해석은 흥미진진했다.

“영암 만수리, 광주 하남지구 등 영산강 유역에서 보이는 장군(액체를 담는 그릇)과 같은 토기들이 있네요.”

5세기 초반이면 한성백제가 멸망하기 전이다. 그때 이미 백제는 전라도 지역까지 완전히 아우르고 있었으며, 백제 중앙이 지방세력을 서울로 불러모아 제사를 지낸 뒤 복속의례의 차원에서 지방산 토기들을 차곡차곡 매납한 증거가 아닌가. 

7월 초에는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가 복암리 3호분 바로 곁에서 귀중한 고고학 자료를 발굴했다. 

“사비기(538~660년) 백제가 이곳에 관영제철소를 운영했고, 치밀한 인력관리시스템을 펼쳤음을 알 수 있는 왕희지체 명문 목간(木簡)을 확인했습니다.”(이종훈 학예관)

자,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얼추 복원해보자. 마한 연맹체의 일원이었던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지방통치 아래 간접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한성백제가 망하자 일시적으로 파동이 일었지만(AD 475년) 독립국을 이룰 힘이 없었는지(아니면 의지가 없었는지), 다시 백제의 직접통치 아래 놓인다.

이렇듯 복암리 고분은 고대사 수수께끼를 풀어줄 실마리를 계속 던져주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풀기엔 여전히 역부족인 듯 싶다. 

기자가 운을 뗐다.

“삼국사기로 돌아가면 어떨까요. 왜 우리는 삼국사기보다는 주변국의 역사서에 눈길을 줄까요.” 

“우리 스스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걸 믿지 않으니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외국 역사서와 고고학 자료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최성락 교수) 

“고고학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해요. 사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고고학자가 만능 엔터테이너가 아니잖아요. 적은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스스로 너무 정밀한 해석을 내려버리면 훗날 새로운 자료가 나왔을 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셈이 되지요.”(조유전 관장)

<나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