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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조선 외교관 오사카 피살사건…고구마 종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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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data-ke-size="size16">여러분은 역사 공부할 때 조엄(1719~1777)이라는 분을 배웠죠. 그 분의 혁혁한 공은 조선통신사(사절단)를 이끌고 일본을 다녀오는 길에 고구마 종자를 도입했다는 거죠. 아시다시피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었죠.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어서 초근목피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작물이었죠. 바로 이 조엄이라는 분이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 일본을 다녀온 사절단의 명칭을 ‘계미통신사’라고 하는데요. 고구마 종자 도입은 바로 이 ‘계미통신사의 업적’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이 계미통신사의 여정이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죠. 일본이 외교 결례를 반복하고, 고질적인 역사왜곡을 자행하더니 결국 비극적인 사건이 터지고 말거든요. 방문 중인 조선 외교관이 피살된 사건인데요.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조선통신사래조도>. 1748년(영조 24년)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하네가와 도에이(羽川藤永)의 그림이다. 연도에 늘어선 구경꾼들이 조선통신사를 향한 환영열기를 알 수 있다. 가히 18세기 한류열풍이라 할 수 있다.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이릉의 송백을 결코 잊지마라”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4년간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요. 한번에 300~500명 정도 파견했는데, 5~10개월 걸린 긴 여정이었습니다. 조선국왕이 사실상 일본을 통치하고 있는 일본의 관백(關白·막부 쇼군)에게 보내는 외교사절을 ‘조선통신사’라 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깔고 258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1763년(영조 39) 8월3일 영조는 조엄을 정사(사절단장)로 한 사절단(계미통신사)을 접견합니다. 이때 영조는 사절단원들의 손을 잡고는 “‘이릉(二陵)의 송백(松柏)’을 절대 잊지말라”면서 울컥합니다. 
‘이릉의 송백’이 과연 무슨 뜻이기에 임금이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었다는 걸까요. 
‘이릉’은 선정릉, 즉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된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가리킵니다. 왜란 이후 윤안성(1542~1615)이 포로 귀환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지은 시가 바로 ‘이릉의 송백’입니다. 
즉 ‘(왜적이 훼손한) 선정릉에서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회한에 가득찬 시인데요. 영조는 조선을 대표해서 일본으로 떠나는 사절단에게 150여년 전 ‘이릉의 치욕’을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한 겁니다.(조엄의 <해사일기>)

1763년 8월 영조는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통신사 일행을 접견하면서 “‘이릉(二陵)의 송백(松柏·소나무와 잣나무)’를 결코 잊지마라”는 당부와 함께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호왕호래(好往好來) 네 글자를 써주었다.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조는 사신들에게 “내 그대들에게 시 짓는 능력이 있는지 먼저 시험해보고자 한다”면서 “글을 짓고 차례로 제출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아니 장도에 오르는 사절단에게 무슨 시험을 보겠다는 걸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사절단이 가면 반드시 일본의 문사들과 ‘시문 배틀’을 벌일 것인데, 그 배틀에서 조선의 우월성을 한껏 과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조는 “‘성리학을 모르는 오랑캐(일본인)들에게 충신독경(忠信篤敬)을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이에 사절단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1719~1790)는 “예의의 나라인 조선의 외교사절로서 관복을 단정하게 하고 행동과 위엄있는 법칙을 잃지 않겠다”면서 “성리학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경전이 아니면 인용하지 않겠다”(<승사록>)고 다짐합니다. 

서울 강남 삼성동에 자리잡고 있는 선정릉.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과 중종이 묻힌 정릉을 일컫는다. 임진왜란 때 왜병의 도굴로 크게 훼손됐다.


■결벽에 가까운 언행
과연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보여준 언행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경건했답니다.
통신사 일행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데요. 큰 고을에 도착하면 통신사절단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답니다. 시를 가지고 온 자, 필담을 나누려 온 자, 구경하러 온 자 등 수백명이 몰려들었답니다. 심지어 조선사신들의 글을 받기 위해 ‘새치기’하는 자들도 나왔답니다. 
그때마다 사신들은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타일렀답니다. 
“그대에게 부끄러운 낯이 있으니 이것은 덕으로 나가는 기본입니다.”
일본인들이 건네는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는데요. 어떤 일본인은 조선 사신들이 하도 선물을 받지 않자 벼루 두 개씩 건네면서 “이것은 손님을 위한 사람의 정이니 받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답니다. 
그러나 조선사신들은 그조차도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낀다. 우리가 돌아갈 때 짐이 깨끗하여 물건이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상쾌하지 않겠느냐”(<승사록>)고 외려 설득했답니다.

1763년 계미통신사를 이끈 정사(사절단장) 조엄. 조엄은 귀국길에 쓰시마(對馬島)에서 고구마 종자를 도입해왔다.


■일본이 한때 조선국왕을 “황제폐하”라 칭했던 이유
그러나 사신단의 교환은 엄연한 외교전쟁이죠. 예나 지금이나 밥이나 먹고 대접이나 받자고 오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한·일 양국의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졌답니다. 
즉 일본은 일왕을 청나라 황제와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고 막부의 장군(쇼군)을 ‘일본 국왕’이라 했습니다. 막부 장군(쇼군)을 조선 국왕과 맞먹는 관계로 만들려 한거죠. 
원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본이 공식문서에서 조선국왕을 ‘황제 폐하’로 칭했는데요. 사실 중국을 황제로 모시는 사대관계를 생각한다면 불경스러운 호칭임이 분명했죠. 그러나 조선 조정은 굳이 일본의 ‘황제 폐하’ 호칭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만약 조선이 황제가 아닌 국왕으로 스스로를 낮춘다면 일본이 국왕이라고 칭하는 ‘관백(關白)’, 즉 ‘막부의 최고지도자’와 대등한 관계로 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성일(1538~1593)의 <학봉집>에 저간의 사정이 나옵니다.
“일본이 주상(조선국왕)을 ‘황제폐하’로 한 것은 ‘거짓황제(일왕)’가 주상과 대등한 지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선이 스스로를 ‘조선국왕’이라 낮출 경우, 일본이 ‘일본국왕’이라 칭하는 ‘관백(關白·막부의 최고지도자인 쇼군)’과 대등한 관계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의 황제 칭호를 거부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일본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이미 1711년(숙종 37년)의 8차 방문에서 일본은 성명도, 도장도 찍지않은 ‘관백’의 답서를 전달하더니, 심지어는 조선 중종의 이름자까지 범하는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기휘(忌諱)’, 즉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관례를 깬 겁니다.

계미통신사 문사들이 1764년 3월29일 나고야성에서 일본 문사들과 ‘시문창화(배틀)’를 벌이는 모습을 그린 삽화. 일본 유학자인 마쓰다이라 군잔(松平君山)은 “이 시문창화 모임은 ‘무한한 영광’(不朽)이었다”는 글을 남겼다.


■“문신을 한 추장에게 무릎을 꿇다니…”
그런 전례가 있는데, 다시 52년이 흐른 ‘계미통신사’의 방문 때도 외교적인 무례가 반복된 겁니다. 
몇차례 조선측의 심사를 건드리더니 영조의 말씀을 전하는 공식행사인 ‘전명연(傳命宴)’에서 마침내 폭발하고 맙니다. 막부의 관백, 즉 쇼군에게 무릎을 꿇고 4번이나 절을 하도록 한 겁니다. 
일본의 각 태수들도 관백에게 두 번 절하는데, 조선 국왕이 파견한 외교사절에게 4번이나 절을 올리도록 하다뇨. 제술관 남옥(1722~1770)은 이때의 치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남옥의 <일관기>)
“이른바 위제(僞帝·가짜 황제·즉 일왕)라는 자가 있는 데도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한 추장(관백)에게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원통한지….” 
통신사들을 더욱 ‘열받게’ 만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본의 역사왜곡이었습니다.
즉 통신사를 방문한 시바노 리쓰잔(柴野邦彦·1736~1807)이 전한 시(詩)에 ‘지극히 놀랍고 망령된 내용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고대사와 임진왜란을 얼마나 왜곡했는지, 양국의 시문 교환행사와 필담이 전격 중단됩니다. 조선측은 항의 표시로 시바노의 시를 그대로 봉해서 되돌려주고 맙니다. 
일본은 당시 중국 진시황 때의 방사 서불(徐市)의 일본도래설과, 임나일본부설의 기초가 된 이른바 진구(신공) 황후의 삼한정벌 등을 역사적인 사실로 왜곡하고 있었거든요.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 국왕을 ‘황제 폐하’라 칭하는 국서를 보냈다. 중국을 사대했던 조선 임금들도 일본의 ‘황제’ 칭호를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만약 거부하고 스스로 ‘국왕’을 칭하면 일본의 ‘관백’(막부 쇼군)과 같은 반열로 치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일의 <학봉집>에 저간의 사정이 나와있다.


■한일 외교사의 비극
급기야 한일 외교사에 또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귀국길에 머문 오사카(大阪)에서 조선통신사의 일원(집사 및 도훈도)인 최천종이라는 인물이 일본인에게 피살된겁니다. 사건은 1764년 4월7일 새벽에 일어났는데요. 사행단의 숙소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들렸답니다. 사람들이 놀라 달려가보니 사절단의 일원인 최천종이 목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습니다. 
최천종은 희미한 목소리로 “분명히 왜인이 칼로 보고서를 쓰고 있던 내 목을 찌르고 도망갔다”고 밝혔습니다. 최천종의 주변에서 일본칼이 발견됐습니다. 최천종이 “나랏일로 죽거나 사신의 직무를 다하다가 죽는다면 한이 없겠지만 아무 이유없이 왜인에게 죽게되니 너무 원통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어떻습니까. 외교사절이 공식방문 중에 피살됐다면 어떻습니까. 심각한 외교분쟁이 벌어진거죠.
그러나 일본은 처음부터 사건 해결에 미온적이었습니다. 검시에 재검시까지 약속해놓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차일피일했습니다. 검시가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섣불리 장례를 치를 수도 없었습니다. 

1711년(숙종 37년) 조선통신사의 방문 때 일본측은 절대 써서는 안되는 역대 임금의 본명 한자를 사용하는 외교적 무례를 저질렀다. 일본측은 중종의 원 이름자인 ‘역(역)’자를 썼다.

사절단장인 조엄은 “움직일 수 없는 살인인데,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있으니 아무리 무식한 오랑캐라 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고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부사 이인배는 “너무 분해서 등창이 나려 한다”고 했고, 종사관 김상익은 “일본인들은 뱀처럼 악독한 족속”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측은 “우리가 해결할테니 일정대로 귀국하라”고 권유합니다. 일본측은 더욱이 사건현장에 조선측 인사들의 출입을 엄중히 막았습니다. 조엄 단장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절대 오사카를 떠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오사카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사절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무슨 변고가 생길 지 몰라 밤을 지세웠고, 바람소리에 장막이라도 움직이면 자객이 침입한 게 아니냐고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멤버 중에는 “너무 두려워 병풍으로 사방을 에워싸고 그 안에서 잠을 자면서, 밥 때가 돼서야 잠깐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성대중의 <청성잡기>)는 이도 있습니다.

외교관 최천종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조엄의 <해사일기>. 왜인의 흉기에 찔려 숨진 최천종은 “나랏일 하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죄 없이, 그것도 왜인에게 죽는다는게 너무 원통하다”는 유언을 남겼다. 최천종은 “약 기운을 돋우려면 술 좀 마시라”는 권유에도 “국법으로 금하는 술을 어찌 마시겠냐”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범인은 잡혔지만…
사건이 발생한지 열흘만인 4월17일, 쓰시마(對馬島)의 통역관인 스즈키 덴죠(鈴木傳藏)가 검거됐습니다.
덴죠는 곤장을 한 대 치기도 전에 범행일체를 자백했는데요. 최천종이 거울을 잃어버린 일로 스즈키와 말다툼을 벌였고, 그것이 살인으로까지 비화했다는 겁니다. 
일본 측은 스즈키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서둘러 종결하려 했습니다. 자백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더 이상의 조사도 벌이지 않았습니다. 스즈키는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는데요. 
그러나 아직 해결할 게 남아 있었습니다. 조선측은 사형집행 현장을 참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측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조선측은 즉각 외교서신을 보냈습니다. 

‘계미통신사’를 비롯해 조선통신사가 머물던 오사카 숙소의 전경. 최천종 피살사건 이후 계미통신사 일행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그림은 1748년(영조 24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참여한 화가 이성린(1718~1777)의 ‘사로승구도’중 한 작품이다.

“스즈키는 양국간 외교문제가 걸려있는 죄인입니다. 반드시 양국 관계자가 집행장면을 참관하는 게 맞습니다. 참관하지 못하면 우리(조선사절)가 어찌 귀국해서 보고할 수 있겠소.”     
결국 조선통신사의 주장대로 5월2일 집행된 ‘사형 집행’ 장면을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건의 진상은 확실치 않습니다. 일본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고구마 종자 도입’으로 유명한 1763~64년 계미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으로 점철된 또하나의 아픈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세월이 골백번 바뀐다 해도 일본은 변함이 없는 것 같아요. 어찌 그렇게 이웃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만 벌이는지요.
계미통신사의 일원이었던 제술관 남옥이 일본의 무례를 경험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한낱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절을 4번이나 하다니…. 얼마나 원통한지 곧장 머리카락이 갓을 뚫고 나오려 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