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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1957년 막사이사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

ㆍ‘정직’으로 민심을 사다

“각하, 이렇게 깊은 밤에 떠나려 하시면….”(오스메나 세부시장) “아닐세. 난 너무 할 일이 많아서….”(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 

1957년 3월17일 일요일 새벽 1시. 세부를 방문했던 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을 태운 마닐라행 비행기가 칠흑의 어둠을 뚫고 이륙했다. 약 17분 뒤인 1시17분쯤 필리핀 역사상 가장 비통한 사고가 일어났다. 비행기가 카발라산(해발 988m) 봉우리에 부딪혔고, 사망자 명단엔 대통령이 포함돼 있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국민을 사랑한 지도자’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때 게릴라 지도자로 활약했다.

필리핀 독립(1946년)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국방장관(1950년)-대통령(1953년)이 되자 골칫거리였던 공산주의 게릴라 단체인 후크단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무력이 아니라 ‘물고기(게릴라)가 헤엄치는 물(민중의 지지)을 없앤 것’이다. 민간인이 갖고 있던 무기들을 사들임으로써 게릴라들의 발호를 원천봉쇄했고, 게릴라가 항복하면 생계를 보장해주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과 한국의 인연은 사후에도 이어졌다. 장준하·장기려·이태영 선생 등 수많은 이들이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탔으니 말이다.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가난한 한국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한국전쟁 때는 7000명이 넘는 파병군을 보냈다. 베니그노 아카노 전 상원의원(종군기자), 카를로스 로물로 전 외무장관(파병 주도),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북한군에 피격) 등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최초의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과 지금의 세종로 미국대사관, 문화체육관광부 건물 등은 모두 필리핀의 자금으로 건설된 것이다. 

막사이사이 사후에 필리핀은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의 치하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고학으로 어렵게 학업을 마친 막사이사이와 달리 마르코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법고시에 수석합격한 수재였다. 하지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정직’을 앞세운 막사이사이와 달리 마르코스 정권은 독재와 부정부패를 일삼아 부국이었던 필리핀을 빈국으로 전락시켰다. 학과 공부는 잘했을지언정 민심(民心)을 가슴 속에 담는 ‘사람의 공부’는 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