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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1967년 스탈린 딸 스베틀라나 망명

ㆍ끝내 얻지 못한 ‘자유’

1967년 3월9일,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딸이 인도 주재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보도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41살의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였다. 서방은 암울했던 스탈린 치하의 진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끓었다. 기구한 여인의 행적도 주목받았다.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이 낳은 딸. 어머니는 말년에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학대 속에 1932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스베틀라나는 16살에 영화제작자 알렉세이 카플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훗날 카플러는 이루어지지도 못한 이 사랑의 대가로 10년간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야 했다. 이후 3번의 결혼-이혼을 거친 스베틀라나는 53년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알릴루예바)을 따른다. 
 
하지만 아버지의 후광으로 ‘노멘클라투라(특권적 지배계층)’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폐기종을 앓던 인도 공산당원 브라제시 싱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당국은 정인(情人)과의 결혼을 불허한다. 66년 싱이 죽자 스베틀라나는 싱의 유해를 들고 인도로 떠난다. 그러고는 이듬해 3월 망명한다. 스베틀라나의 망명에는 미국 CIA가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와 소련정부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한술 더 떠 자서전까지 출간하겠다고 했다. 67년은 소비에트혁명 50주년을 맞이한 해. 소련은 축제에 찬물을 끼얹은 스베틀라나를 ‘병자’로 몰아붙였다. 스베틀라나는 이후 근대건축의 거장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애제자인 윌리엄 웨슬리 피터스와 결혼한다. 이름도 라나 피터스로 바꾼다. 하지만 딸 하나를 낳고 또 파경. 

자유를 찾기 위한 망명이었지만 ‘자유’를 얻지 못했다. 미국의 정치적 이용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82년 영국 케임브리지로 떠났고, 84년엔 그토록 원망하며 떠났던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나 떼어내려 했던 그 이름 아버지의 고향인 그루지야로…. 하지만 또 정처 없는 여정. 90년대 다시 영국행. 그리고 지금은? 행적을 찾기 어렵다. 그저 ‘지금은 북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불확실한 소식만 전해질 뿐. 이용가치가 사라져 아무도 관심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런 삶이야말로 그녀가 원했던 삶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