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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

ㆍ미국의 치욕

코흘리개 시절, 청운동 바로 눈 앞에서 1·21사태를 바라보면서도 빅 머로 주연의 유명한 TV드라마 를 떠올렸으니 뭘 알았겠냐만 1968년 1월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1·21 사태 이후 이틀도 지나지 않은 23일 낮. 원산 앞바다에서 정찰활동 중이던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에 의해 납치된다. 미 공군의 요청을 받은 한국 공군기 3대가 즉각 출격했지만, 푸에블로호는 북한의 방공망에 진입한 뒤였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원산만 근처로 급파하고 핵폭탄 사용까지 불사한다는 복안을 세웠지만, 미국의 대응은 거기까지였다. 베트남전에서도 고전 중이었는데 한반도까지 확전된다면 미국으로서는 너무 큰 부담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1개월간의 협상 끝에 영해 침범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승무원 석방문서에 서명했다. 12월23일 82명의 승무원들은 석방됐다. 하지만 이것은 미해군 106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운위된다.

오죽했으면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가 훗날 미해군 4성장군을 만나 푸에블로호 이야기를 꺼내자 그 장군이 “그 빌어먹을 배 이야기는 하지 마라”고 화를 벌컥 냈을까. 반면 북한은 납치한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 두고 ‘반미승전’의 교재로 삼았으며, 90년대부터는 배를 대동강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이곳은 바로 188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시민들에 의해 불태워진 자리라고 한다. 

푸에블로호는 북한으로서는 뜻밖의 기화(奇貨)이며, 미국으로서는 반드시 돌려받아 청산해야 할 치욕의 상징이다. 미 하원(2002년)과 상원(2005년)은 북한에 푸에블로호의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북한도 이것을 협상카드로 활용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비록 제2차 북핵위기로 불발됐지만, 북한은 2005년 대미 접근의 제스처로 푸에블로호를 반환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레그는 2008년 9월, “대선이 끝난 뒤 다시 푸에블로호 반환문제가 재검토되기를 희망한다”고 불을 지폈다. 지금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섰으므로 푸에블로호 반환문제는 ‘북·미관계의 가늠자’로 초미의 관심을 끌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