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제의 오늘

1971년 중·미간 핑퐁외교 시작

ㆍ적의 적은 ‘친구’

1971년 3월 말,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던 일본 나고야. 장발과 꽃무늬 의상으로 ‘히피’라는 별명을 얻은 19살 미국선수 글렌 호완이 돌연 중국 선수단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5분간 동안 중국선수 좡쩌둥(莊則棟)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 만남이 불과 며칠 뒤 세계사의 물꼬를 바꿔놓는 실마리가 되었다. 좡쩌둥은 61·63·65년 세계대회 단식우승을 차지한 중국선수단의 선수 겸 부단장. 그는 마오쩌둥·저우언라이의 명(命)을 받아 미국선수와 접촉한 것이다. 

중국은 즉시 미국선수단을 초청했다. 4월10일 미국선수단은 열렬한 환호 속에 베이징에 도착, 국빈대접을 받는다. 호완은 수만명의 인파 속에서 “나야말로 마오 주석의 말마따나 요원의 불길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며 으쓱댔다. 유명한 ‘핑퐁 외교’의 개막이다. 

중국으로서는 그해 1월 취임한 닉슨 대통령의 잇단 화해 제스처에 대한 화답이었다. 닉슨은 2월 외교교서에서 중공(中共)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호칭했으며, 3월25일에는 미국 시민의 중국 여행을 허락했다. 한 번 물꼬가 터진 중국과 미국의 사이는 79년 국교 수립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런데 중국은 왜 불구대천의 원수인 미제국주의자와 손을 잡았을까. 그것은 ‘적(소련)의 적(미국)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사회주의 동지였지만, 53년 흐루시초프 체제가 등장하면서 중국과 결별의 서곡을 연다. 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중국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맹비난했다. 급기야 69년 중·소 국경인 우수리강에서 2차례에 걸쳐 무력충돌이 벌어진다. 이제 중국의 주적(主敵)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된 것이다. 

탁구는 중국의 자존심이었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59년. 중국 탁구선수 정권투안이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에서 단식우승을 차지한다. 도탄에 빠진 인민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중국은 61년 세계대회를 유치했고, 좡쩌둥과 취청휘가 남녀 단식우승을 차지했다. 자연 탁구는 국기가 되었다. 탁구는 그 모든 기존질서가 파괴됐던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중국은 바로 2.5g에 불과한 탁구공으로 미국과의 국교 수립을 성사시켰고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러니 탁구는 중국 인민들에게는 기화(奇貨)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