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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1979년 팔레비 이란 국왕 망명

ㆍ민중 혁명의 승리

1979년 1월16일 낮.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눈물 속에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망명 소식에 이란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2월1일 귀국한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란은 알라의 뜻과 지시만 따르는 이슬람 공화국이 돼야 한다”고 선언했다. 팔레비는 53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에 힘입어 권좌에 오른 뒤 미국의 후원 아래 야심찬 근대화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팔레비는 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을 근대화의 걸림돌로 치부하면서 극심한 반발을 샀다. 더구나 그의 근대화는 다국적 기업과 절대왕권에 기생하는 세력을 길러놓았다. 신흥 부유층의 무절제와 극빈층의 신음 사이에서 축적된 모순은 결국 혁명으로 표출됐다. 78년 1월9일 종교도시 콤에서 일어난 반정부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했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팔레비의 망명은 바로 1년여에 걸친 민중혁명의 승리였던 것이다.

한국과 이란의 관계는 77년 서울과 테헤란에 테헤란로와 서울로를 둘 정도였다. 하지만 혁명 이후 미국과 이란의 관계 악화로 한국에 이란은 쉅게 다가갈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이란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도 또한 0점에 가깝다. 경향신문 취재진이 지난해 2월 이란 출장 때 겨울용 파커를 챙겨가자 주변에서는 “열사(熱砂)의 나라에 무슨 파커냐?”며 의아해했다. 이란이 해발 460m 이상의 고원지대이며 겨울철 추위가 매섭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이란의 수면 아래 관계는 매우 도탑다. 이란에서 드라마 ‘대장금’의 시청률이 85~90%에 이를 정도였다. 2007년 현재 두 나라의 교역 규모는 100억달러나 된다. 이란의 4~5번째 경제 파트너인 것이다. 무엇보다 석유와 가스매장량이 세계 2위다. 이 같은 측면에서도 이란은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나라인 셈이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고별기자회견에서까지 “이란은 위험한 존재”라고 말했다. 반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외교적 노력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분명한 것은 테헤란의 코흘리개 학생들까지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 즉, ‘I love you’를 외친다는 점이다. 세상은 이렇게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