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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3) 성산성(下)

-김화대첩 이끈 ‘유림·홍명구’ 의 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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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12월8일. 청나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자 조정은 사색이 되었다. 수도권 방위를 위해 각 도의 감사, 병사, 수사에게 긴급명령을 하달한다.

“급히 근왕병을 이끌고 수도권에 집결하라.”

당시 평안도 감사(도지사)는 홍명구였다. 그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에게 격문을 보내 평양에 집결하도록 했다. 근왕군 대열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평양에는 홍명구군 2000명과 유림군 3000명 등 5000명의 근왕군이 집결했다.

# 엇갈린 운명

12월18일 평양을 떠난 홍명구·유림의 근왕군은 도중에 노략질을 일삼던 적군 수백명을 죽인 뒤 이듬해 1월26일 김화 읍내에 도착한다. 김화는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쪽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인후(목구멍)와 같은 곳이다.

그러니 건곤일척의 싸움이 예비돼 있었던 것이다. 김화 읍내는 텅 비어 있었다. 청나라군이 대회전을 위해 속속 집결하고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전략 구상 및 작전 수행과 관련해 홍명구와 유림 간에 설전이 끝없이 이어진 것이다.

“이곳(지금 주둔지)과도 가깝고 아군에 지형적으로 유리한 고성(성산성)에 들어갑시다.”(유림)

“평안도에서도 산성 전술이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난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일전을 펴겠습니다.”(홍명구)

“적군의 수가 많고 아군이 적으니 양군을 합칩시다.”(유림)

“안됩니다.”(홍명구)

홍명구군은 결국 김화 관아 남쪽 3리 지점인 개활지(김화읍 생창리 탑동)에 진을 쳤다. 하지만 홍명구는 문신이었고, 유림은 무신이었다. 전쟁에 관한 한 유림의 경험이 풍부했다. 유림은 홍명구군의 진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퇴로가 불안정한 탑골의 지형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지형이 평탄하고 낮아 적의 공격을 받기 쉽습니다. 높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홍명구는 ‘노(No)’ 했다. 거절당한 유림은 휘하 3000명을 이끌고 홍명구군과 인접한 백수봉 정상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그런 다음 백전능선에 진과 목책을 구축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유림의 방어 진지인 백수봉(240m)과 백전능선엔 수령 300년 내외의 잣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더욱이 삼면이 가파른 경사면이었다.

# 김화전투의 시말

다음날(1월28일) 새벽. 적군 6000명이 3개 부대로 나뉘어 접근하기 시작했다. 유림은 다시 “지금 감사께서 포진한 지세는 공격받기 쉬우니 높은 곳으로 옮기라”고 설득했으나 홍명구는 사생결단을 택했다.

“나의 뜻은 이미 죽음을 결정했다.”

청군은 삼면으로 평지에 홍명구군을 쳤다. 3시간가량의 치열한 접전 끝에 홍명구군이 와해되었다. 홍명구는 직접 활과 장검을 들고 백병전에 나섰다. 하지만 중과부적. 홍명구는 7발의 화살이 몸에 박힌 채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지옥 같은 순간에도 능선 위 유림군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홍명구군 일부는 바로 눈앞 능선에 주둔했음에도 구원병을 내려보내지 않은 유림군을 원망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은 당시 김화의 관노였던 유계홍의 전투 목격담이다. 생생한 전쟁의 기록이다.

이 일은 훗날 유림 탄핵의 빌미가 된다.

하지만 도움을 주려고 섣불리 능선에서 내려왔다가는 유림군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승리를 거둔 청군은 유림군을 향해 총공격한다. 하지만 유림은 “동요하지 말라”고 군사들을 독려한다.

“화살과 탄환이 많지 않다. 낭비하지 마라. 적이 10보 앞에 접근했을 때 내가 깃발을 올리면 쏘아라!”

잣나무 숲과 굵은 목책, 그리고 추상 같은 통제 명령…. 청군은 4차례나 능선을 오르려 파상공세를 폈으나 모두 실패했다. 청군의 지휘관은 야빈대(청태종의 매부)였다. 그는 백마를 타고 혼란에 빠진 청군을 수습하여 4번째 공세를 지휘한다. 그러나 그의 백마를 유심히 본 유림은 저격병 10명에게 “저 백마 탄 장수를 쏘아라”하고 명한다. 적장은 저격수들에게 사살당한다.

날이 어두워지자 전체 병력의 90%를 잃은 청군은 후퇴한다. 이것이 김화대첩의 전말이다. 청태종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증원군을 보낸다. 이때 유림은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싸움은 이겼지만 화살과 탄환이 다 떨어져 더는 싸울 수 없다. 철수하자. 샛길로 남한산성(임금이 있는)으로 가자.”

그리고는 파손된 총포를 거두고 화승(火繩·도화선)의 길이를 각각 다르게 하여 잣나무에 걸어둔다. 맨 마지막에 철수한 병사들에게 화승에 불을 붙이도록 했다. 그랬으니 밤새도록 총포 소리가 울릴 수밖에. 청군은 유림의 기만 작전에 놀아나 감히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두 번이나 농락당한 것이다.

하지만 남한산성으로 향해 가던 유림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린다. 2월3일 가평에 이르렀을 때였다. 벌써 1월30일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세상에…. 누란의 위기 속에서 목숨을 바치고(홍명구), 대첩을 이끈(유림) 기특한 장수와 병사들이 있었는데…. 임금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홀랑 항복해버린 것이다.

# 엇갈린 평가

또 하나. 물론 홍명구의 죽음도 가상하기 이를 데 없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기를 각오했다”면서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가며 꿈쩍하지 않고 싸웠으니까.

“전투는 이기기 위한 것”이라는 유림과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이 우선이며 승패와 목숨은 그 다음”이라는 홍명구의 생각이 달랐을 뿐이다.

확실히 홍명구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므로 청나라군은 전력 손실을 입었고 지쳤다. 홍명구의 희생이 김화대첩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인조는 “나라가 이토록 결딴난 때에 단지 이 사람(홍명구)이 있을 뿐”이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김화대첩의 주역인 유림에 대한 평가는 유난히 각박했다.

“~김화싸움에서 비록 공로가 있었으나 형세가 좋은 곳을 먼저 점거한 채~감사의 진지가 먼저 공격 당했는 데도~구원하지 않았으니~유림을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전쟁이 끝난 뒤 3개월이 지난 상황에서 사헌부가 유림 탄핵상소를 올린 것이다. 유림이 죽은 지(1643년) 50년이 지나도록 묘도문(공적을 기리는 비문)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다 남구만(1629~1711년)이 안주와 김화 등 현지를 답사하고 남겨진 기록과 주민들의 구전을 살핀 뒤 신도문을 완성했다. 드디어 유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 것이다.

그후 또 100여년이 지난 정조 20년(1796년)이 되어서야 유림에게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반면 순절한 홍명구에게 충렬공이란 시호가 내려진 것은 효종 9년(1658년)이었다. 무려 138년의 차이다. 똑같이 나라를 위해 싸웠던 두 사람인데, 이토록 다른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균형 잃은 역사의 저울추를 되돌리는 일이 이렇게 힘든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김화 성산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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