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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4) 고려말 출신 이양소선생

-不事二君 절개 ‘위대한 은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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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민통선 이북(연천 중면 적거리 신포동). 해발 100m쯤 돼보이는 야산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말 충신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명인 이양소 묘를 찾는 여정은 험난했다. 키만큼이나 자란 수풀과 나무를 헤치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한 후손(이희풍씨)의 낯엔 찾아온 손님들에게 송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겨우 찾아낸 이양소(1367~?)의 묘.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풀이 점령한 탓인지 무덤의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세히 보니 무덤은 15m 둘레의 봉분에 화강암 재질의 묘비와 상석. 그리고 문관석(157㎝) 2기가 마주 대하고 있다. 문인석은 얼굴이 길쭉한 돌하루방을 연상케 한다. 또렷한 턱수염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자랑하고 있다. 카랑카랑한 선비의 모습 그대로다. 무자비한 잡초의 공세에다 풍화작용으로 인한 극심한 마모까지…. 얼핏 보아도 오래 전에 쇠락한 가문의 묘소 같다.

# 120년간 벼슬 생각마라

이희풍씨가 무덤전면에 펼쳐진 12굽이 산등성이를 가리킨다.

“저기 있는 산등성이가 보이시죠. 할아버지가 그러셨대요. 앞으로 12대까지 (조선의) 녹을 먹지 말라고….”

그리곤 “허허” 미소짓는다.

“너무 꼿꼿한 할아버지를 만나 후손들이 고생하셨네요.”

“그러게요. 너무나 청렴하게만 사신 것 같아요.”

후손은 농처럼 말을 이어간다.

“저희 가문(순천 이씨)은 이상하게 자손이 번창하지 않았어요. 자손이 귀해서 겨우겨우 대를 이었죠.”

순천 이씨는 전국적으로 3000명 정도밖에 안된단다. 죽음에 이르러 이양소 선생은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록)에 ‘고려진사 이양소’라 썼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얼마나 ‘요령없이’ 사신 분인지…. 그는 조선을 개국한 이방원(태종)의 동갑내기 친구였다. 두 사람은 1382년(우왕 3년) 나란히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시쳇말로 ‘불알친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개국으로 두 사람은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친 이양소 선생은 조선이 건국되자 그 길로 연천땅 도당곡(陶唐谷)에 은거했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청구야담’에 나온 얘기를 풀어보자.

# 태종 이방원의 절친한 벗

태종은 은둔생활에 들어간 옛 동무 이양소를 찾아간다. 청구야담엔 ‘물색(物色)’으로 찾았다 했다. 물색이란 입은 옷이나 생긴 모양으로 더듬더듬 찾아간다는 뜻이다. 선생을 찾아낸 태종은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한때의 우정을 회상한다. 그러면서 운치있는 시를 나눈다. 먼저 태종의 차례.

“가을비 반만 개이매 사람이 반만 취함이라(秋雨半晴人半醉).”

그러자 선생이 화답한다.

“저문 구름이 처음 걷으매 달이 처음 남이라(暮雲初捲月初生).”

이 대목에서 태종은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양소 선생의 시구 말미에 읊은 ‘월초생(月初生)’은 태종의 첫사랑 여인이었던 것이다. 옛 동무가 태종의 가슴에 ‘희미한 첫사랑’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태종은 깜짝 놀라 술상을 걷고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준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월초생이라. 과연 자네는 내 옛 친구일세.”

태종은 가만 있지 않았다.

“여봐라. 이 친구를 당장 후차(後車)에 모셔라. (함께 가야겠다.)”

선생으로서는 자신과 가문의 운명을 결정짓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중차대한 시점에서 선생은 ‘노’를 선택한다.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선생과 이방원(태종)은 어릴 적에 곡산(황해도) 청룡사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다. 당시 소년 이양소는 곡산의 산수에 흠뻑 빠져 있었다.

“난 나중에 이곳에서 태수 노릇을 하고 싶어.”

태종은 혼잣말처럼 내뱉은 친구의 말을 기억해 두었고, 임금이 된 후 이양소를 곡산군수로 임명해 버렸다. 이것은 옛 친구를 어떻게든 출사하도록 하기 위해 임금이 낸 꾀였다. 하지만 선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태종은 대신 이양소가 매일같이 고려의 서울 송도를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산에 청화산(淸華山)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는 은나라 처사 백이의 청풍(淸風)과, 송나라 때의 충신 희이(希夷)가 숨어 살았던 화산(華山)에서 한자씩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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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독한 절개

태종은 그 뒤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옛 친구를 등용하려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태종은 이양소 선생이 살던 곳을 으리으리하게 꾸며 이화정(李華亭)이라는 현판까지 내렸지만 그조차 싫어했다. 대신 선생은 심심유곡에 초가집을 짓고 안분당(安分堂)이라 이름하면서 거기서 살았다. 뜰에는 살구나무를 심고 거문고를 타면서 독서로 남은 생을 보냈다. 선생이 죽자 태종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살아서 그 마음을 굽히지 않았고, 죽어서는 그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此人生不可屈其心 死不可汚其身也).”

태종은 벗에게 청화공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무학대사를 보냈다.

“대사는 (친구의) 산소를 점지해주시오.”

임금의 명을 받은 무학대사는 철원 땅에 선생이 묻힐 길지를 선택했으나 이 또한 좌절됐다. “장지는 연천땅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선생의 유언 때문이었다.

태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할 수 없지. 그러면 철원땅 십리를 베어 연천에 붙이거라.”

정말 지독한 절개가 아닐 수 없다. 선생과 함께 두문동 72현이었던 저 유명한 야은 길재마저도 아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너는 마땅히 고려를 향한 마음을 본받아 너의 조선왕을 섬기어라.”

# 이양소 선생을 떠올리는 이유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양소 선생의 절개는 너무 융통성 없는 행동이라 폄훼될 수 있다. 그야말로 밑천까지 다 보여준 동기동창 친구가 국왕이 되었고, 그 친구가 그토록 출사하기를 원했는데 그걸 끝내 박차버렸으니…. 거기에 자손들에게까지 앞으로 12대까지는 벼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니….

선생에 대한 평가는 상반될 것이다. 천하의 공자도 “사람이란 인간사회를 피해 짐승들과 무리할 수 없다”면서 맹목적인 은거를 꼬집었다.

그리고 ‘위대한 은둔은 (세상을 피하는 게 아니라) 도시에서 은둔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열마디 다 제쳐두자.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옛 주인을 섬긴 이양소 선생에 대한 평가는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너무도 ‘대쪽 같은’ 그러나 ‘바보 같은 삶’을 산 것이다.

하지만 유력 대선후보에게 달려들어 줄을 서려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오늘이다. 지도자가 무릎을 꿇고 필요한 인재를 모신다는 소식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나라의 대권을 꿈꾸는 자들이 오만해지지 않겠는가. 새삼 이양소 선생, 그리고 태종과 같은 인물이 생각나는 이유다.

〈이기환 선임기자|연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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