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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6) 인천 계양산성

ㆍ1600년전 백제인의 논어책을 엿보다

2005년 5월11일.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인천 계양산성 내부의 집수정을 발굴하고 있었다. 계양산성은 풍납토성 발견(1997년)과 함께 이 교수가 눈여겨봤던 곳.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엔 바다와 강(江)이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것이 아닌가. 이 교수는 한성백제시대(BC 18~AD 475년) 중국과의 교역 관문일 것 같은 한강 하구의 계양산성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체육시설이 있었던 이곳(집수정)은 골짜기였기 때문에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그러니 집수정이 있었던 게지. 겉으로 보기에 지름이 13m 정도 돼보였는데….”

조심스레 층위별로 흙과 돌을 걷어내며 바닥까지 발굴하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한성백제시대 ‘논어’ ”


인천 계양산성에서 발굴된 집수정 밑바닥 모습. 목간과 목제, 원저단경호 등 4~5세기 한성백제시대 유물이 나왔다. <선문대 고고연구소 제공>

“아 글쎄, 맨 밑바닥에서 이른바 연질에 가까운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밑이 둥글고 목이 짧은 항아리)가 보이지 않겠어요? 그걸 조심스레 다루고 있는데, 같은 바닥에서 목제(木製) 유물이 노출됐습니다.”

“집수정 맨 밑바닥에서 목제가 나왔으니 (이 교수가) 떨리기도 했겠네요.”(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럼요. 직감적으로 아! 묵서(墨書) 같은 것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과연 그랬다. 물을 적셔가며 붓질로 목제를 부드럽게 다듬으니 과연 희미한 글씨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목제와 함께 또 하나 흥미로운 유물이 보였는데, 그것은 예부터 발해문명권에서 점복(占卜)에 쓰였던 거북이 등, 즉 귀갑(龜甲)이었다. 이 교수는 조심스럽지만 신속하게 움직였다. 우선 사진을 찍고 실측을 한 다음 목제와 그 인근 흙층을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잘라 진공플라스틱에 밀폐시켰다. 그런 뒤 바로 당시 윤근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소장, 긴급 보존처리가 필요해. 가지고 내려갈 테니 좀 기다려요.”(이 교수)

막 발굴한 묵서가 새겨진 계양산성 목간과 귀갑을 태운 승용차는 그날 밤 자정을 넘어 새벽 2시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닿았다. 윤근일 소장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교수와 윤 소장은 고교 선후배 사이(중동고).

“아이고! 선배님. 아무리 급해도 공문은 띄우셔야죠.”(윤근일)

“응급상황인데 무슨 절차야. 사람으로 치면 죽을 수도 있는데….”(이 교수)

하기야 그렇다. 

“목간의 경우엔 발굴 때 시간이 지체되거나 초기대응을 잘못하면 묵서가 지워질 우려가 있어요.”(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얼마 후, 이 교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부터 “적외선 촬영결과 묵서가 확실하게 보인다”는 결과를 통보받고 급히 경주로 내려갔다. 목간은 잔존 길이 13.8㎝, 지름 1.87㎝ 정도였다. 

“첫눈에 ‘자왈(子曰)’이라는 대목이 보였고, 논어의 유명한 글귀인 ‘오사지미능신(吾斯之未能信·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이 보였습니다. 아! 이 묵서는 바로 ‘논어(論語)’ 제5장 공야장(公冶長)’의 내용이었습니다.”

목제를 5면으로 깎아 만든 목주(木柱)에는 면마다 ‘논어·공야장’의 내용을 실었다.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면서 공자의 사위였던 인물이다. 공자는 전과(前科)가 있던 공야장을 두고 “그에게는 죄가 없다”면서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정도였다. 계양산성 출토 목간 1면에는 ‘(子謂子)賤君子(哉若)人(魯無君者斯焉取斯)’, 즉 공자가 자천(子賤)이라는 사람을 두고 “그 같은 사람은 참으로 군자다.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으면 어떻게 그런 학덕을 터득했겠는가?” 하고 되묻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2면은 ‘(子使漆雕開仕對日)吾斯之未能信子說’, 즉 공자가 칠조개(제자)에게 벼슬을 주고자 하자 칠조개가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3면은 ‘(孟武伯問~求也~)也不知其仁也赤也(何如)’, 즉 “맹무백(노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구(求·공자의 제자인 염유)에 대해 묻자 ‘그가 인자한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고, 맹무백은 ‘그렇다면 적(赤·공자의 문하생)은 어떠냐’고 물었다”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4면과 5면에도 공야장의 문구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계양산성 출토 목간은 왜 중요한가. 우선 목간이 나온 문화층의 연대를 보자.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목간 옆에서 함께 출토된 이른바 원저단경호의 연대는 아무리 늦춰잡아도 4세기 말~5세기 초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더욱 결정적인 자료는 AMS(가속기질량분석기) 연대측정 결과. 조사단은 목간과 함께 노출된 목제를 시료로 서울대 기초과학공동기기원에 AMS 연대측정을 의뢰했는데, 400년과 480년이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즉 이 유적은 4~5세기 때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자(子)’의 경우, 계양산성 출토 글자(1-1)는 AD 256년의 서진 비유경(1-2)과, 408년 고구려 덕흥리고분 묵서(1-3)와 흡사하다. 가로획법을 보면 셋다 처음에 뾰족하게 시작해서 굵게 마무리지었다. 이 가로획법은 계양산성 목간의 ‘오(吾·4-1)’와, 서진(西晉) 둔황 장경동 문서의 ‘길(吉·4-2)’에서도 비슷하게 나온다. ‘지(之)’자의 경우 계양산성 목간(2-1)은 오른쪽 삐침이 꺾이지 않고 그대로 흐른다는 점에서 AD 325~334년 글씨인 우파색계경(2-2)의 ‘之’와 같다. ‘능(能)’ 역시 마찬가지다. 계양산성 목간(3-1)과 동진(東晉)시대 대반열경(3-2)이 비슷한데, 글자 가운데 달 月자의 왼쪽 끝 삐침이 꺾여 있다. 계양산성 목간의 ‘인(仁·5-1)’자와 서진시대 둔황문서에 나오는 ‘하(何·5-2)’자도 마찬가지다. 두 글자의 변의 모습이 비슷한데 이는 이른바 팔분법의 잔영이 남아있는 과도기적인 필법이다.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 제공>


1 - 1, 1 - 2, 1 - 3(위 왼쪽부터). 2 - 1, 2 - 2, 3 - 1(두번째 왼쪽부터). 3 - 2, 4 - 1, 4 - 2(세번째 왼쪽부터). 5 - 1, 5 - 2(왼쪽부터).


“목간의 제작연대는 4~5세기” 

목간을 직접 보고 분석한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의 해석은 더욱 명쾌하다.

“3~4세기 위진(魏晉) 시기에는 불경을 많이 필사(寫經)했는데요. 이 목간의 서체는 ‘둔황문서(敦煌文書)’나 ‘러우란(樓蘭)잔지(殘紙)’에서 사용된 4~5세기 사경체(寫經體)와 관련이 깊어요. 이런 사경체는 해서(楷書)가 정착되기 이전의 필획법입니다. 즉, 이른바 팔분(八分)의 필법과 서진(西晉·265~316년)과 동진(東晉·316~420년) 사경의 해서필법입니다.”

즉, 글씨체는 해서(楷書)지만 아직 완전하게 해서의 필법을 갖추지 못한 과도기의 서체라는 것이다.(서체 설명 참조)

“계양산성 출토 목간의 자(子)자를 보면 아직 팔분법이 남아 있어서 왼쪽갈고리법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필법은 아직 해서가 정립되지 못한 ‘서진(西晉) 비유경(臂喩經·256년)’과 ‘고구려 안악 3호분 묵서명(357년)’,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408년)’ 등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뿐인가. 자(子)자의 가로획법을 보면 처음에 뾰족하게 시작해서 굵게 마무리하는 필법을 보여주는데 이것 역시 계양산성 묵서와 앞에 예를 든 묵서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之)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양산성 목간을 보면 아직 오른쪽 삐침이 해서법을 갖추지 못했는데, 이것은 325~334년으로 편년되는 ‘우파색계경(優婆塞戒經·중국역사박물관 소장)’의 예와 같습니다.”

“그리고 인(仁)자의 경우에도 ‘ 변의 필법에서 팔분법의 잔영이 남아 있는데요. 이것은 ‘서진의 둔황문서(마하반야바라밀타경권 제14)’의 경우도 같습니다.”(손환일 교수)

가장 특징적인 유사점을 찾자면 계양산성 묵서의 가로획법이 중국 4~5세기 때 사경체는 물론 고구려의 벽화명문에 나타난 필법과 같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계양산성 출토목간의 제작연대는 늦어도 4세기 중반~5세기 초라는 뜻입니다.”

“목간 들고 다니며 논어공부한 한성백제인”

결국 400~480년대 계양산성 논어 목간은 우리나라 유교사와 한문학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라는 게 손환일 교수의 해석이다. 한자도입과 유교 수용을 입증해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실물자료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경우 이미 372년 태학(太學)을 세웠는데, 이때부터 유교경전으로 가르쳤습니다. 백제는 이미 6세기 때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일본에 보냈잖아요.”

양(梁)나라(502~587년) 소자현(蕭子顯)이 편찬한 <남제서·동남이전·고구려전>을 보면 “고려는~오경을 읽을 줄 안다”는 내용이 있다. 오경은 알다시피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 등 유가의 경전이다. 백제는 어떤가. <삼국사기·백제본기·근구수왕조>를 보면 그 유명한 고구려와의 평양전투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근구수왕 원년(375년), 태자(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가 계속 진군하려 하자, 막고해(莫古解) 장군이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만류한다.”

이미 백제가 4세기 후반 전쟁을 벌이면서 노자의 <도덕경>까지 인용하며 전략에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원년)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됐는데, 유교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전래되었을 것이다.

“풍납토성에서는 이미 각종 중국제 시유도기와 청자류가 몇 트럭 분이 출토됐는데, 중국과의 인적·물자교류만 하고, 인류가 가장 중요시하는 사상·철학·역사·문화자료 등 지적 성과물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거지요.”(이형구 교수)

목간을 통해 당대 한성백제인들의 삶을 추정해보자.

“요즘 기독교인들이 작은 성경책을 손에 들고 다니잖아요. 조선시대엔 이런 용도의 서책을 수진본(袖珍本)이라 해서 늘 도포의 소맷자락에 넣고 다니며 암송했고…. 당대 백제인들도 이 논어목간을 들고 다니며 암송하면서 인생의 좌표로 삼았겠지요. 한마디로 ‘수진본 목간’이라 할 수 있어요.”(이 교수) 

조유전 관장은 기자에게 또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계양산성이 백제가 쌓은 석성(石城)이라면 굉장한 고고학적인 성과예요. 사료를 보면 백제가 돌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없어서 그동안 논란이 계속됐거든. 즉 백제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처럼 토성만 쌓았지, 석성을 쌓을 줄은 몰랐다는 주장이 강력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져왔어요.”

“백제는 석성을 쌓았다”

백제는 과연 석성을 쌓지 못했을까.

“충주 장미산성의 경우, 4세기 말~5세기 초 백제유물이 보이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성백제 석성입니다. 신라도성인 경주 월성과 고려 도성인 개경도 풍납·몽촌토성 같은 토성입니다. 조선시대 도성인 한양도성의 경우도 토축이 전체의 68%를 차지해요. 결국 축조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축성재료를 찾았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축성 담당자가 석재를 구하려고 선대의 능묘와 고총(古塚)의 돌을 파냈다가 귀양 간 일도 있었어요.”(심정보 한밭대 교수)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도 “풍납토성의 경우도 토성이지만 성벽의 내벽을 마감할 때 1.5m의 두께로 석축으로 마감했고, 외벽의 토루 가장 윗부분도 돌을 깔아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했다”고 밝힌다. 백제가 기술이 없어 석성을 쌓지 않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동안 ‘백제=석성축조설’을 부인했던 권오영 한신대교수도 “최근 발굴된 화성 소근산성과 청명산성, 의왕 모락산성, 파주 월롱산성 등에서는 신라유물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이는 한성백제 석성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쏟아져 나오는 고고학 발굴자료에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백제산성과 관련된 논쟁은 남아 있는데, 이번 기회에 끝장 토론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하나, 목간과 관련해서도 연구자들이 목간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또는 발굴보고서의 내용과 AMS 연대측정값도 믿지 않고 자기주장만 펼친다는데 이 또한 옳은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조유전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