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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3000년 전 청동기 마을의 비밀

 

춘천 중도에서 확인된 고인돌 군. 이런 고인돌들은 흔히 알려진 거대한 탁자식이나 바둑판식 고인돌이 아닌 개석식 고인돌이다. 소박한 형식의 고인돌이다. |서성일 기자  

  100년 전에도 심상치 않은 곳이었나 보다.
 일본의 고고·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역시 그 냄새를 맡았다. 하기야 강(江)은 선사시대의 고속도로(강)이자, 문명의 젖줄이니까…. 
 게다가 땅이 가라앉으며 이뤄진 침강분지인 춘천 일대는 북한강과 소양강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이뤄진 비옥한 충적대지였다.
 그러니 농사를 짓게 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1915년 식민지 경영을 위해 조선의 구석구석을 답사하던 도리이는 소양강변 춘천 천전리(泉田里·샘밭)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과 돌무지 무덤(적석총)을 확인했다. 이후에도 소양강댐 건설공사(1971년)로 수몰된 춘성군 북산면 배평리·추전리·대곡리 등에서도 고인돌의 자취가 보였다.

 

 ■선사인들의 고향
 그러던 1977년 어느 날, 국립박물관 학예사인 이건무와 이백규가 중도(中島)를 찾았다.
 중도는 금강산~통천~회양~양구를 돌아온 북한강과, 설악산~인제~현리를 통해 흘러 들어온 소양강이 만나는 곳이다. 원래 섬이 아니었다. 의암댐 건설(1967년)로 수몰되고 남은 땅이 섬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댐 때문에 호수의 수위변동이 심해 강변 쪽은 물줄기가 급격히 변하는 바람에 급속도로 깎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석관으로 무덤방을 만들고 주변에 돌을 쌓아 묘역을 표시하는 형태로 조성됐다. 이 고인돌은 어린아이의 유골을 묻은 고인돌이다.  

 “중도에 들어갔을 때 급격한 수위 변화 때문에 강변 쪽이 3m 가량이나 급격히 깎여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곳에 무문토기편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습니다.”(이건무 전 문화재청장)
 이 때 확인된 경질무문토기는 ‘중도식 토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도에서 ‘안정적으로’ 확인된 원삼국시대(기원 전 후~3세기 사이의 고고학 시대구분)의 표지유물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때부터 중도 뿐 아니라 춘천의 북한강 유역 역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원삼국(초기 삼국)시대 흔적들이 쏟아지는 유적의 보고가 된

다.
 “지금까지 140여 차례 조사된 춘천에서 확인된 유적만 1400만㎡(425만평)이나 됩니다. 발굴되지 않은 지역을 합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지요.”(정연우 예맥문화재연구원장)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깊은 강원도의 경우 북한강(혹은 남한강)을 따라 생긴 그다지 넓지 않은 충적대지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좁은 강 유역에 사람들이 밀집해 살아왔을 겁니다.”(최종래 한강문화재연구원 부장)
 그것이 북한강 유역에서 그나마 넓은 충적대지라 할 수 있는 춘천이 선사인들의 고향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합수부에 있는 중도. 의암댐 건설(1967년) 이후 섬이 됐다. 이곳은 3400~3200년 전부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았던 청동기인의 마을이다.|한강문화재연구원 제공

 ■유적의 지뢰밭  
 그 중에서도 중도는 핵심지역으로 각광을 받았다. 중도는 국립박물관의 집자리 발굴(1980년) 이후 건드리면 터질 수 있는 ‘유적의 화약고’ 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급기야 지난해(2013년) 11월, 중도 내의 레고랜드 조성부지에서 그 화약고가 터졌다.
 무려 1400여 기의 청동기 시대 유구가 쏟아진 것이다. 고인돌 101기. 집터 917기, 구덩이 355기, 바닥 높은 집터 9기와, 마을을 지키는 긴 도랑 등….
 고고학적인 의미는 대단했다. 우선 강원도 지역에서 고인돌이 이처럼 무더기로 발굴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집자리에서 ‘둥근 바닥 바리 모양토기’(원저심발형토기)와 ‘덧띠새김무늬토기’(각목돌대문토기)가 확인됐다. 이것들은 유적의 최고(最古) 연대가 조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4~12세기)임을 알려주는 지표유물들이다.
 게다가 고조선 시대의 대표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 등도 출토됐다. 남한지역 집터에서 처음 확인되는 유물들이다. 또 짐승이나 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둘레 404m의 도랑(환호·環濠)도 확인됐다. 이밖에 농사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경작 유구까지….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이 완벽한 세트의 청동기 마을 유적을 보고는 “마치 역사 시대의 궁성 같은 세계적인 유적”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3200년전 쯤 화재 때문에 천장이 고스란히 무너진 모습으로 나타난 처옹기 시대 집자리. 약 8미터 가량의 나무가  겹으로 주저앉은 채 확인됐다.  |서싱일 기자

 ■고인돌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기자 역시 설렘을 안고 중도 현장으로 달려갔다. 청동기 시대로 향하는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한 여정이었다.
 과연 고인돌이 열지어 조성돼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풀어야 할 오해 하나. 고인돌이라 하면 엄청난 규모의 탁자식(북방식) 혹은 바둑판식(남방식)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덤의 주인공은 그 지역을 다스린 수장급일 가능성이 짙다고 해석해왔다. 크게는 100t이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돌을 옮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계급을 지닌….
 그러나 중도의 고인돌은 그런 엄청난 규모의 고인돌이 아니다. 많은 돌을 이용해서 원형 혹은 장방형의 묘역을 조성하고는 그 중심에 시신을 안치한 돌널무덤을 설치하고 그 위에 상석을 올린, ‘소박한’ 형태의 고인돌이다. 지하의 무덤방 위를 바로 뚜껑으로 덮는다 해서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라 한다.
 고인돌 전문가인 이영문 동북아지석묘연구소장이 풀어주는 고인돌의 오해와 진실….
 “한반도에만 고인돌이 4만기 정도됩니다. 그만큼 고인돌의 천국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고인돌의 90% 가까이가 탁자식이나 바둑판식이 아니라 중도에서 발견된 것 같은 고인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엄청난 규모의 탁자식·바둑판식 고인돌은 시신 매장용이라기보다는 제사용이나 ‘랜드마크’ 같은 마을의 상징물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

 

 ■어느 청동기인의 선산
 중도의 ‘소박한’ 고인돌은 실제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른 실용의 무덤이었다는 게 이영문 소장의 해석이다. 그렇더라도 돌무더기로 묘역을 조성할 정도라면 상당한 신분의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이곳 고인돌들의 배열이 3열로 40여 기가 길게 조성돼있고, 마을 공간 안에도 다수 분포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5~6세의 어린아이가 구부린 자세로 석관에 묻힌 아주 작은 고인돌도 보였다. 청동기 마을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을까. 물론 다른 해석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돌무덤을 쓸 정도의 신분, 즉 수장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시골 마을의 제사와 회의를 주관하는 마을 어른의 대대로 내려오는 무덤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마을 이장 정도 되는 가문의 선산(先山) 같은 개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고인돌이 아닌 옹기종기 모여있는 질박한 고인돌이라서 그런가.
 기자는 둥글게 혹은 사각형 등의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고인돌들을 보고 3000년 전 청동기인들의 소박한 생활상을 상상해보았다. 

필자가 현장에 갔을 때 청도익 시대 집자리에서 이제 막 발굴되고 있는 청동기 시대 토기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3200년 전 화재로 붕괴된 천장
 “저 집자리는 한번 봐야 합니다.”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이 기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기 청동기 시대, 즉 기원전 14~12세기의 집자리로 인도했다.
 집자리의 규모는 요즘 아파트의 평수와도 뒤질게 없는 26평(86.5㎡) 쯤 됐다. 집자리를 살피던 기자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집안을 따뜻하게 해줬을 화덕자리가 한가운데 조성돼있었고, 4줄로 연결된 통나무가 불에 탄 그 형태 그대로 무너져 있는게 아닌가.
 벽체 혹은 천장이 불에 타면서 그대로 무너져 버린채 3400~3200년 동안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기자는 화재가 난 집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을 청동기인들을 떠올렸다.
 불에 탄 집자리 가운데는 집안에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유구들도 있었다. 무슨 일일까.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이삿짐을 다 옮긴 뒤 옛집을 불에 태우는 이벤트를 벌인 것은 아닐까. 한가지 부가할 것이 있다. 청동기 시대 주택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화재 때문에 전소된 기원전 14~12세기의 26평짜리 주택도 작은 편은 아니다. 

중도 인근 소양강변인 천전리에서 확인되는 전통적 의미의 탁자식 고인돌. 이번에 발견된 중도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의 집자리 가운데는 154㎡(47평)과 126㎡(38평)짜리도 있다. 그러고보니 25~26평(86㎡)와, 47~48평형과 38평형은 요즘 주택시장에서도 기준으로 삼는 아파트의 평형이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집의 기준은 변함이 없는 것인가. 신기한 일이다.
 그렇다면 중도 청동기 마을의 중심연대는 어떨까.
 김아관 고려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조기청동기 시대의 유구와 유물도 있지만, 청동기 중기(기원전 9~6세기)의 집터가 다수 확인된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청동기 조기 이후, 즉 기원전 11~9세기 사이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중도의 건너편인 현암리와 천전리·신매리에서는 그런 공백기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200~300년의 공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중도에는 과연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중도 주민들은 기원전 11세기 무렵, 왜 보따리를 싸서 남부여대로 주변 마을로 이사했다는 뜻일까.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기자가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었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