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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7) 2000년전의 무역항 해남 군곡리

ㆍ해남은 고대 동북아의 ‘물류허브’ 였다

1983년 3월 어느 날.

황도훈이라는 해남의 향토사학자가 있었다. 해남문화원장을 지내면서 고향 땅을 답사하는 것을 여생의 일로 삼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군곡리 마을을 지나던 황씨의 눈길이 멈췄다. 무슨 옹관 같은 유물이 눈에 띈 것이었다. 게다가 불에 탄 흔적도 있었다. 

■ 2300년 전 음식물 쓰레기장

‘이건 야철지 아닌가.’

해남 군곡리에서 확인된 뼈로 만든 연모.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우던 그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서울로 올라가 서울신문사를 찾았다. 

“회사 논설위원 중에 해남 사람이 있었는데, 황도훈씨와 친구였지. 그 인연으로 우리 신문을 찾아온 거지요.”(황규호 전 서울신문 기자)

황 기자는 즉시 황도훈과 함께 해남으로 내려갔다. 최성락 목포대 교수와도 연락이 닿아 함께 군곡리 현장으로 달려갔다.

“야트막한 구릉이 온통 마늘밭이었어요. 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일제시대 때 간척사업으로 땅이 됐다더군요.”(황 기자) 

“야철지라든가 가마터라는 것은 제가 고증할 수는 없었고, 다만 패총이라는 것은 확실했어요.”(최성락 교수)

서울신문은 목포대 연구팀과 최성락 교수의 이름을 달아 군곡리 유적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날 아침, 학교에 간 최 교수는 급히 오라는 오창환 당시 학장의 ‘부름’을 받는다. 

“최 교수, 최 교수. 우리 학교 경사났어! 중앙지 1면에 이렇게 우리 대학(목포대) 기사가 나오다니….”

그럴 만했다. 목포대가 사범학교~초급대를 거쳐 1979년 4년제 국립대로 승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장님이 그러더군요. ‘뭐 해줄까.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말해봐’하고.”

최 교수는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원금으로 받아 이름뿐이었던 (목포대)박물관을 키우는 데 썼다. 

■ 준왕의 망명과 해상교역로의 탄생 

흔히 조개무지라 하는 패총(貝塚)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굴 등의 껍데기가 쌓여 마치 무덤 같다 하여 명명됐다. 


“한마디로 선사시대 음식물 쓰레기장이죠. 쓰레기장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요? 조개껍데기가 지닌 석회질(石灰質) 때문에 그 안에 버려진 토기(土器)와 석기, 그리고 사람과 짐승의 뼈가 잘 보존돼요.”(조 관장)

한반도 남부의 패총 유적은 1907년 일본 학자들이 김해패총을 조사한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일본학자들은 김해패총에서 석기와 철기가 함께 출토되는 것을 중시하여 이른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한마디로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석기와 철기가 공존한 금석병용기가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참으로 헛된 식민학자들의 주장이었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잇달아 발굴되면서 이 금석병용기라는 정체불명의 개념은 사라지고 말지.’(조 관장)

어쨌든 최 교수가 이끄는 목포대 박물관의 3차례 조사 결과 군곡리 패총은 BC 2세기~AD 3세기 사이, 즉 약 400~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사용된 음식물 쓰레기장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현장에서는 철편과 철도자(칼), 철부(철도끼) 등 철기류와, 석촉·숫돌 등 석기류와 각종 동물뼈 등이 쏟아졌다. 특히 점을 친 흔적인 복골(卜骨)과 중국화폐인 화천(貨泉)은 문화교류와 공유의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다. 군곡리 패총은 철기문화의 유입과, BC 2세기부터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넘나드는 해상을 통한 동방교역의 루트를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당초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는 낙랑(BC 108년 설치) 이후 평양-한강-낙동강 등 강의 수로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한반도 남부의 철기문화가 연안항로를 통해 유입된 시기를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년)인 BC 2세기 무렵으로 보고 있어요.”(최성락 교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 기사를 유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조 관장)

“예. 삼국지를 보면 (BC 194년) 위만에게 패한 조선왕 준(準)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 유입이 최소한 위만조선 때부터라는 것을 시사해줍니다.”(최 교수)

■ 동방교역로의 중심지 

준왕이 망명한 종착지와 관련해서는 온갖 설이 난무한다. 하지만 망명지로 추정되는 충청도와 전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BC 2세기 무렵(위만조선 시기)의 철기유물들이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던진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유적들이 대부분 서해안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해로를 통한 철기문화의 유입설을 뒷받침한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군곡리에서 확인된 중국화폐인 화천은 기원 전 후 동방교역로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다. 

중국화폐 ‘화천’


“연대가 확실하고 단기간에 주조·통용된 화천은 고고학 자료에서 굉장히 중요한 유물이에요. 왕망(王莽)의 신나라(新·AD 8~AD 23년) 때 주조된 경화인데, AD 12~40년까지 통용된 화폐였어요. 28년간 주조된 화폐였기에 고고학 연대를 추정하기에 안성맞춤이지.”(조 관장)

화천과 함께 진(秦)·한(漢)대에 통용된 반량전(半兩錢), BC 118년부터 주조된 오수전(五銖錢) 등도 교류의 증거다.

우선 사천 늑도에서 확인된 유물들은 군곡리 것과 거의 같다. 또한 고흥 거문도에서는 오수전, 제주도 산지항 유적에서는 오수전·화천, 창원 성산패총에서는 오수전, 김해패총에서는 화천이 각각 확인되었다.

물론 발해연안에서 출발, 은(상)~부여~한반도~왜 등 발해문명권에서 널리 확인되는 복골(卜骨)의 존재 역시 문화교류와 공유의 흔적이기도 하다. 근거를 대라고? 

“(왜로 가는 길은) 한반도 서해안에 연한 물길로 한국을 경유하여 혹은 남으로, 혹은 동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에 있는 김해(구야한국·狗邪韓國)에 닿는다. 여기까지가 7000리이다.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다. ~ 또 남으로 한해(澣海)를 건너면 큰 나라가 있는데(이키시마·壹岐島)~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로국(末盧國·규슈)이 있다.”(삼국지 위지 왜인조)

삼국지에 이토록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신기롭기만 하다. 고고학적인 자료와 삼국지 기록을 토대로 한반도 중부~서해안~남해안~왜로 이어지는 항로를 그릴 수 있다. 

“한반도 서해안~군곡리~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壹岐島)~규슈를 잇는 동방교역로가 기원 전부터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최 교수)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이키시마의 하라노스지 유적에서 선착장 유구와 함께 하역장 시설이 확인된 바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동방교역로에서 군곡리의 위치는?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연결되는 관문유적의 기능도 있었을 겁니다. 영산강 유역에 존재하는 나주 수문패총과 낭동 패총, 광주 신창동 등이 이를 증명하지요.”(조현종 관장)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었던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겠죠. 서해안의 긴 항로가 남해안으로 꺾어지는 길목이니까…. 군곡리에서 사람들은 다시 늑도~김해~대마도~이키시마~규슈 등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준비했겠죠.”(최 교수)

“그러니까 동방교역로의 중간기착지이면서 영산강을 따라 한반도 내륙으로 물품을 수출입하는 국제무역항 기능을 담당했다는 얘기지.”(조유전 관장)

기자는 2000년 전 선진문물의 도입창구로 번성했던 국제무역항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 동북아를 강타한 한랭기후 

그런데 최성락 교수는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조개무지와 함께 발견된 토기류.



“한반도 ‘내륙’에서는 청동기 시대(BC 3세기까지)와 AD 4세기 무렵부터의 유적이 선후관계를 이루는 예가 많은데, 이상하게도 BC 2~AD 2세기까지의 유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최성락)

“그렇다면 내륙에서는 BC 2~AD 2세기가 공백기라는 얘기인데….”(조유전 관장)

“예. 그 공백기 사람들이 내륙에서 농사를 지은 게 아니라 해안가에서 어업이나 무역업에 종사했다고 보는 겁니다.”(최성락)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청동기시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된다. BC 5세기 무렵 중국대륙에 약육강식의 시대인 전국시대가 개막되면서 성행하는 철기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된다. 준왕의 해로를 통한 망명(BC 194년)에서 보듯 철기문화는 서해안을 따라 급속도로 파급된다. 군곡리와 늑도 등 주요 해상거점에 사람이 모여들고 무역거점이 건설된다. 서해안 해상루트를 통한 동방교역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다 AD 100~AD 250년 사이에 동북아시아는 한랭기에 접어듭니다. 냉해가 극심해지고, 곡물생산량이 급감하게 됩니다. 내륙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해안으로 터전을 옮기며 식량문제로 약탈과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최 교수)

최 교수는 그 근거로 삼국사기와 삼국지 등 역사서를 들춘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오른쪽)과 최성락 교수가 호박밭으로 변한 군곡리 현장에서 토기편을 수습하고 있다.
 
“고기후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AD 100~250년 사이가 한랭기였음을 보여준다. 184년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191~194년 사이 ‘원소와 원술의 기병’에는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등의 극심한 기아가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70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다. ~192년 4월 서울에 눈이 3척이나 내렸다. 193년 왜인 천여명이 큰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어 우리에게 구하니~. 194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어 백성들이 굶주리니~.”(삼국사기)

음력 4월과 7월인데도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는 등 이상 한랭기후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해안 지역 집자리 유적을 살펴보면 불에 탄 곳들이 많아요. 또 패총도 해발 100m 이상 되는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극심한 기근 상태에서 식량자원 확보를 위한 부족간 전쟁이 일어났고, 패총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고지로 올라간 거죠.”

■ 호박밭으로 방치된… 

무더위가 막 시작되었던 6월 말. 조유전 관장과 최성락 교수, 그리고 기자가 해남 군곡리를 찾았다. 

명색이 사적(2003년·449호)으로 지정된 곳이다. 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그저 호박밭일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무수히 박힌 하얀 조개무지가 널려 있었다. 굴, 꼬막, 바지락, 홍합, 피조개, 새조개, 가리비 등 2000년 전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아닌가.

“이곳이 명색이 사적이라는 곳인가요?”

발길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조개무지의 흔적. 후손들은 2000년 전 동방교역로의 기착지이자 번성했던 국제무역항을 풍미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그저 ‘사적’이라는 간판 하나로 기릴 뿐이다. 정말 대단한 후손들이다. 

“보존대책을 빨리 마련해야 할 텐데….”

노 고고학자는 끝내 말끝을 잇지 못했다.

<해남 군곡리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