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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7일의 왕비' 단경왕후가 남편(중종)의 자결을 말리고 쫓겨난 사연

드라마 <7일의 왕비>로 알려진 비운의 단경왕후를 모신 경기 양주 온릉(사적 제210호)이 14일부터 일반에 전면공개된다. 나명하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장은 “그동안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있어 비공개로 관리해오던 온릉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온릉은 조선의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첫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1487~1557)의 능이다. 문신 신수근(1450~1506)의 딸인 신씨는 1499년(연산군 5) 성종의 둘째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과 혼인했다. <국조기사>에 따르면 둘 사이는 애정이 매우 도타웠다. 반정이 일어났을 때도 신씨의 현명함이 돋보였다. 

‘7일간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가 묻힌 온릉. 단경왕후는 중종의 진성대군 시절 부인으로 중종반정 후 왕후에 올랐지만 단 7일만에 폐위됐다. 아버지가 반정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즉 1506년 9월2일 반정군이 먼저 진성대군을 호위하려고 집을 에워싸자 자신을 죽일 것이라 지레 짐작한 진성대군이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는 “군사의 말머리가 이궁(진성대군의 자택)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는 죽어야 하지만 만일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다면 반드시 공자(진성대군)를 호위하려는 뜻일 것”이라며 남편의 소매자락을 붙들고 말렸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과연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었다. 만일 신씨의 만류가 없었던들 진성대군은 지레 자결하고 말았을 것이다.

신씨는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자연스레 왕후가 되었다. 하지만 왕후의 운명은 단 7일간으로 끝났다. 아버지(신수근)가 반정에 반대해서 반정군에게 피살된 것이 문제가 됐다. 

즉 거사 전 반정세력이 비밀리에 당시 좌의정이던 신수근의 생각을 떠보았지만 신수근은 “매부(연산군)를 폐하고 사위(중종)를 세우는 것이니 나는 말할 수가 없다”고 반대했다. 

신수근으로서는 난처했을 것이다. 왜냐면 연산군의 부인이 신수근의 누이동생인 신씨(1476~1537)였기 때문이다. 신수근으로서는 차마 매부(연산군)를 페하고 사위(중종)를 새 임금으로 두는 반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정세력은 결국 신수근을 죽이고 거사를 일으켰다.

7일만에 왕후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를 소재로 만든 사극 <7일의 왕비>의 포스터. 2017년 방송된 드라마에서는 배우 박민영이 단경왕후, 연우진이 중종, 이동건이 연산군 역을 맡았다. |KBS 제공

반정 성공 후 반정세력의 시선은 단경왕후 신씨에게 쏠렸다. 중종이 즉위(2일)한 다음날부터 영의정 유순(1441~1517)과 우의정 김수동(1457~1512)이 여러 공신과 6조참판 이상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단경왕후를 당장 폐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의거 때 죽인 신수근의 딸(단경왕후)이 궁중에 들어와 있는데, 만일 왕비로 정한다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할 것이며,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하면 종묘 사직에 관계되니, 은정을 끊고 내보내소서.” 

반정세력 덕분에 창졸간에 임금이 된 중종은 어쩔 줄 몰라했다. 중종은 “아뢴 일이 매우 당연하나 조강지처를 어찌하겠느냐”고 호소했다. 하지만 공신들은 “종묘사직의 큰 일인데 어쩔 수 없다”면서 “빨리 결단하고 지체하지 말라”고 재촉했다. 힘이 없었던 중종은 할 수 없이 “종묘사직이 지중한데 어찌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겠느냐. 마땅히 중의(衆議)를 따르겠다”고 했다. 그날 밤(3일) 단경왕후 신씨는 세조의 딸(의숙공주)의 남편인 하성위 정현조(1440~1504)의 집으로 나가 머물렀다가 9일 사제로 쫓겨나갔다. 중종반정이 성공(2일)하고 9일 쫓겨났으니 ‘7일간의 왕비’라 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9년 뒤인 1515년(중종 10) 중종의 두번째 부인인 장경왕후 윤씨(1491~1515)의 승하를 계기로 복위운동이 벌어졌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단경왕후는 1557년(명종 12년) 세상을 떠나자 친정인 거창 신씨 선산에 모셔졌는데, 1739년(영조 15년)에 왕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온릉이라고 정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