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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8.6m 산수화에 그린 360명의 삶…200년전 조선의 ‘진경 풍속화’였다

요 몇년 사이 제가 본 국립중앙박물관의 대작 가운데 눈에 띈 작품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2020년 11월 공개된 ‘세한도’였는데요. 따지고보면 ‘세한도’(가로 70.4㎝×세로 23.9㎝)는 ‘작품이 뛰어나다’는 의미의 ‘대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규모가 크다’는 뜻의 ‘대작’은 아니죠. 그러나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사 20명이 달아놓은 감상평, 즉 시쳇말로 댓글 덕분에 작품도, 규모도 엄청난 대작이 되었습니다. 댓글까지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15m(가로 1469.5㎝×세로 33.5)에 달하거든요.

왼쪽 사진은 2020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전’에 출품된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당시 처음으로 8m가 넘는 대작을 펼쳐보였다. 오른쪽 사진은 ‘강산무진도’를 세 쪽으로 나눠 본 것이다. 8m 화폭에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광활한 산수의 표현과 정교한 세부묘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작이다.

■실감컨텐츠로 8m 대작 산수화를…
그러나 순수 작품의 크기만 친다면 역시 그 해(2020년 7월)에 전시된 ‘강산무진도’가 압도적이죠. 조선후기의 대표화가인 이인문(1745~?)의 작품인데요. 작품 길이가 8m가 넘는 산수화(가로 856㎝, 세로 43.8㎝)입니다. 
두 전시회 때 박물관측에서 ‘세한도’와 ‘강산무진도’를 펼쳐 놓았는데요. 한컷의 사진으로 담기 어려워서 애를 먹었구요. 더구나 한 눈에 보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서 왔다갔다 하면서 여러번 곱씹어 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스승인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를 모델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촉’은 지금의 쓰촨성에 해당되는 지역이죠.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촉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두 작품 중 ‘강산무진도’를 5월23일부터 디지컬 실감 영상관에서 특화된 실감컨텐츠(‘강산에 펼친 풍요로운 세상, 강산무진도’)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원 그림에 바탕을 두고 펼쳐지는 원경과 원작의 인물을 활용해 3D로 모델링하고 모션캡쳐로 구현한 인물들이 중경과 근경에 등장해 이야기를 4분 동안 전개해 나가는데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부터 중국에서 촉나라로 가는 길은 멀고 험준하기로 악명높았다. 옛 사람들은 깎아지른 벼랑에 사다리와 같은 길(잔도·棧道)을 만들어 겨우 통행했다.

아니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도, 단원 김홍도(1745~?)·혜원 신윤복(1758~?) 등의 풍속화도 아니지 않느냐, 조선시대 산수화라면 그냥 중국의 이상향을 그린 무미건조한 ‘산수화’가 아니냐, 뭐 이런 회의감이 드시겠죠.
그렇습니다. ‘강(江)과 산(山)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無盡)’는 뜻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겉으로 보기엔 전통적인 산수화 같습니다. 2m짜리 비단 5폭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는데요. 그렇게 마련한 화폭에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광활한 산수의 표현과 정교한 세부묘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작 산수화가 맞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앉아 중국을 그린 이른바 관념산수화라는 낙인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일본 덴리대(天理大) 소장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견이 1447년 4월 20일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꾼 무릉도원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 만에 완성한 그림이다. 무릉도원은 동진~남조 송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도연명(365~427)이 꾼 ‘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곳’이란 말로, 속세를 떠난 이상향을 뜻한다. 전통산수화는 보통 중국인의 이상향을 주제와 소재로 삼았다.

■중국의 이상향을 그렸나
아닌게 아니라 이인문은 이 ‘강산무진도’를 스승인 현재 심사정(1707~1769)의 ‘촉잔도’(1768년작)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촉’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에 해당되는 지역이죠.

예부터 험준한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촉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낭떠러지 사이에 아슬아슬한 ‘잔도(棧道·하늘사다리길)’를 놓고 힘겹게 왕래했죠. 당나라 천재시인 이백(701~762)은 “촉 가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蜀道之難難於靑天)”(‘촉도난·蜀道難)’고 읊었답니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구성은 ‘촉잔도’와 그 모티브가 흡사합니다. 두 그림 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색감과 치밀한 구성으로 표현했구요. 후반부 잔잔한 평원으로 연결되는 구성도 비슷합니다. 관념산수화가 그렇죠. 
도연명(365?~427?)이 꿈꿨던 이상향, 즉 무릉도원을 그리는게 보통이었죠. ‘무릉도원’은 전란을 피해 온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 철저히 분리된채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원숭이도 오르지 못할 정도’라는 험준한 잔도를 지나야 겨우 닿을 수 있는 촉 땅처럼…. 만약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역시 ‘촉땅으로 향하는 길’을 그렸다면 지금까지 본 관념산수화가 무엇이 다를 게 있습니까. 스승의 작품을 모델로 삼았다면 더구나 그렇죠.

‘강산무진도’에서 표현된 잔도는 매우 잘 닦여있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겉은 산수화지만 속은 풍속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연구자들이 속삭입니다. 강산무진도를 찬찬히 뜯어보라구요. 
그러면 겉으로는 관념산수화지만, 속으로는 김홍도와는 완전히 느낌이 다른 풍속화가 보인다는 겁니다. 우스갯소리로 겉은 산수화, 속은 풍속화라는 뜻에서 ‘겉산속풍’이라 해둘까요.
볼까요. 자세히 보면 ‘강산무진도’는 심사정의 ‘촉잔도’와 완전히 다르답니다. ‘촉잔도’에 표현되는 황량하고 험준한 산세가 ‘강산무진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건데요. 잔도를 표현했다지만 길이 매우 잘 닦여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거죠. 
그리고 그 길 위로 분주하게 사람이 이동합니다. 이 마을 저 고을에도 사람들과 말, 나귀들로 북적대구요. 어떤 인물은 집안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멍을 때리고’ 있구요. 무엇보다 짐을 부지런히 나르는 일꾼들도 이채롭습니다.

‘강산무진도’에 표현된 마을에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그려져 있다. 사람들과 나귀들로 북적댄다.

나무막대기의 양쪽에 짐을 매달아 어깨로 나르거나 당나귀 혹은 수레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짐을 잠시 두고 마을 주막에 걸터앉아 밥을 먹고 있어요. 
강에는 커다란 배들이 떠다닙니다. 그 배들이 마을 포구에 도착하자 짐꾼들이 도착한 짐을 부지런히 나르죠. 도드래를 볼까요. 도드래를 중심으로 절벽 위아래에 마을이 있죠. 도르래 아래 위에서 줄을 잡아당기고, 이용객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을은 당나귀로 열심히 물건을 나르고 있구요. 물자가 쌍방향으로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죠. 
‘강산무진도’에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현장’을 담고 있습니다. 산 중턱까지 집들이 있고, 멀리 산사가 보이며, 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여있고, 어촌마을이 있고 나루터에 사람이 모여있으며, 배가 자유로이 다니고, 물레방아까지 보이는…. 영락없는 풍속화의 모습이 아닐까요. 강산무진도에 등장하는 사람을 얼추 헤아리면 360명이 넘는다고 하는군요.

넓게 조성된 잔도도 행인들도 북적댄다. 길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보인다. 포구에 배가 도착하자 짐꾼들이 도착한 짐을 부지런히 나르고 있다. 짐을 싣고 가는 사람과 나귀, 말들이 보인다.

■조선의 이상향 그린 풍속화
풍속화라면 어느 시대의 풍속화라는 말일까요. 18~19세기 흥청대는 서울, 그것도 한강 모습을 그린 ‘풍속화’라는 겁니다. 
그때를 영·정조로 대표되는 조선의 중흥기라 하죠. 바야흐로 조선 뿐 아니라 전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16~18세기)에 따른 기상이변 때문에 야기된 대기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18세기 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쌀(혹은 베와 동전)로 통일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죠.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동미가 바닷길과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게 되면서 물류량이 급증합니다. 

‘강산무진도’ 속 도드래. 도드래를 중심으로 절벽 위아래에 마을이 있다. 도르래 아래 위에서 줄을 잡아당기고, 이용객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마을은 당나귀로 북적댄다. 물자가 쌍방향으로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다.

또 조정이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장이 발달했죠.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수공업도 활발해졌구요.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넘쳐났고, 저잣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정조 임금도 그런 서울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했나 봅니다. 
1794년 규장각 검교직각 남공철(1760~1840)과의 대화에서 “과인의 정치가 요순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초심을 잃지는 않은 것 같다”면서 “우리나라 사방 6000리에 산도, 바다도 있어 수레와 배로 요동이나 심양, 중국이나 왜국까지 갈 수 있다”고 은근슬쩍 자화자찬합니다. 

‘강산무진도’에 표현된 인물들. ‘강산무진도’는 배경은 산수지만 주인공은 산수가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뿐이 아니구요. 1792년(정조 16) 한양(서울)의 저잣거리 풍물을 그린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그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 기념으로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 한편씩 제출하라’는 명을 내리죠. 이때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놀고 먹는 백성 없이 집집마다 다 부자요, 저울 눈금 속이지 않아 풍속 모두 아름답다. 인(仁)의 성(城)과, 의(義)의 시장에 나라를 세워 번성함과 화려함만 믿지 않는다.”고 정조의 입맛에 꼭 맞는 시를 올렸는데요.
어떻습니까. 박제가의 ‘성시전도시’를 읽으니 이인문의 ‘강산무진도’가 떠오르지 않나요.
‘강산무진도’의 무대가 경제활성화 덕분에 성시를 이루던 한강포구 같죠? 그것이 약간 과장된 모습이라면 그 당시, 즉 18~19세기 정조가 추구했던 조선의 이상향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또 모르죠. 정조가 총애하던 화원 이인문에게 조선의 이상향을 담은 일종의 ‘진경 풍속화’를 그려보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시전도를 그리게 하고, 성시전도시를 짓게 했듯이 말입니다.    

18세기초(1708년) 공납제도를 쌀로 통일한 대동법의 시행에 따라 바닷길과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급증했다. 조정이 지방에서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시장이 발달했다.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수공업도 활발해졌다. ‘강산무진도’는 18~19세기 흥청대는 서울, 그것도 한강 모습을 그린 ‘풍속화’라는 해석이 있다.

■1745년생 동갑내기의 콜라보
괜한 억측 같다구요?

풍속도 하면 단원 김홍도(1745~?)가 있는데, 정조가 굳이 전문 산수화가였던 이인문에게 맡겼겠냐구요.
물론 단원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였죠. 조희룡(1789~1866)은 “그림 한 장을 낼 때마다 곧 임금(정조)의 눈에 들었다”(<호산외기>)고 증언했고, 문인·화가·평론가인 강세황(1713~1791)은 “속화를 그리면 사람들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쳤다”(<단원기>)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대 저명한 문인·서화가인 신위(1769~1845)는 “선왕(정조)을 모시던 묘수 화원 가운데 ‘단원’은 (죽어서) 보이지 않고 ‘도인’만 여전히 화실에 퍼질러 앉아있다”(<경수당전고>)고 했습니다.

1796년(정조 20년) 차비대령화원(국왕 직속으로 특채된 궁중화가)을 대상으로 두 차례 시험(녹취재)이 시행됐다.당시 채점을 맡은 규장각 관리들은 이인문의 성적을 7명 중 꼴찌, 9명 중 5등으로 각각 매겼다. 그러나 성적표를 본 정조는 두 번 다 이인문을 1등으로 올려놓았다. 이인문이 정조의 문체반정 정책에 알맞은 화가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신위가 꼽은 ‘묘수 화원’ 두 사람 중 ‘단원’은 김홍도인데요. 
그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고, 퍼질러 앉아 그림을 그린 ‘도인’은 바로 이인문을 가리킵니다.
김홍도와 이인문, 두 분은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이자 평생지기였답니다. 일찍이 두 분은 궁중의 도화서에 들어간 뒤 같은 모임에 참여하여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린 뒤 서로의 작품에 글을 쓰기도 했는데요. 
요즘 말로 ‘콜라보’라 할 수 있죠. 예컨대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는 ‘이인문이 증명하다’(李文郁證)는 글과 함께 시 한편이 실려있습니다. 또 두 분이 1791년(정조 15) 열린 시모임(‘송석원시사’)를 주제로 그린 그림 2점이 있습니다. 낮에 열린 시모임은 이인문(‘송석원시회도’)이, 밤에 열린 향연은 김홍도(‘송석원시사야연도’)가 각각 그린 ‘콜라보’ 작품이죠.
또 두 분이 글씨와 그림을 나눠 맡은 ‘송하한담도’(1805년)도 있습니다.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가 글(오언율시)을 쓴 합작품이죠. ‘노송 아래 폭포를 배경으로 담소를 나누는 두 인물’을 그린 이인문의 그림에 ‘…숲에서 우연히 노인을 만나(偶然値林수) 담소 나누느라 돌아갈 줄 모른다(談笑無還期)’는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붙어있습니다.

당대 인물들의 이인문 평가. 이인문은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인 김홍도와 함께 ‘신필(神筆)’로 일컬어졌다. 또 “어려서부터 산수에 능했고, 올곶게 소신을 지켰으며, 시정의 속된 무리를 소인배로 여기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인문이 18~19세기 조선 화단이 요구한 그림의 주제와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강산무진도’라는 대작에서 겉으로는 아닌척하며 속으로 녹여낸 것이다. 정조 임금이 꿈꾸는 그런 이상사회를 그런 식으로 그려낸 것이다.

■김홍도보다 홀대받은 이유
정조 임금도 김홍도 만큼이나 이인문을 끔찍하게 총애했습니다. 예컨대 이인문은 1796년(정조 20) 도화원 화가들을 대상으로 치른 시험(녹취재)에서 채점관리들로부터 연달아 낮은 점수(7명 중 꼴찌, 9명 중 5등)를 받았는데요. 
그런데 채점표를 확인힌 정조 임금이 굳이 재채점까지 해서 이인문의 등수를 거푸 1등으로 올렸습니다. 이인문의 성적표에 기재된 평가는 ‘격조(格調)’와 ‘사의(寫意·외형보다는 내재적인 정신을 표현)’, ‘초범(超凡·비범)’이었습니다. 당시 문체반정을 추구한 정조의 입맛에 꼭맞는 화가였다는 뜻입니다. 

김홍도와 이인문은 1745년 소띠 동갑내기이다. 두 사람은 도화서에 들어가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같은 모임에 참여하여 상당수의 ‘콜라보’ 작품을 남겼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에는 ‘이인문이 증명하다’(李文郁證)는 내용과 함께 이인문의 시 한편이 실려있다. 이인문의 ‘송하한담도’에는 김홍도의 오언율시가 붙어있다.

그런데도 김홍도에 비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인문과 관련된 인물평이 눈에 띄는데요. 
당대 시문과 서예에 능한 유재건(1793~1880)은 <이향견문록>에서 “이인문은 어려서부터 산수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한 폭의 조각 종이일망정 깊고 먼 천리의 기세가 있어 찬탄을 자아낸다”면서 “사람들이 그를 신필(神筆)이라 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서예가인 마성린(생몰년 미상)은 이인문의 ‘송석원시화도’에 “정선·심사정 이후 산수를 그리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고송유수관도인(이인문의 호)의 그 이름 헛되이 전해진 것이 아니다”라는 후기를 달았습니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고”(성해응·1760~1839의 <연경재전집>), “올곶게 자신을 지켜서 시정의 속된 무리를 소인배로 여기는 인물”(남공철·1760~1840의 <금릉집>)이라는 평도 있었습니다. 

이인문과 김홍도가 1791년(정조 15) 열린 시모임(‘송석원시사’)를 주제로 그린 그림 2점이 있다. 낮에 열린 시모임은 이인문(‘송석원시회도’)이, 밤에 열린 향연은 김홍도(‘송석원시사야연도’)가 각각 그린 콜라보 작품이다.

바로 이 대목이죠. 이것이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이인문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은 이유가 될 겁니다.
김홍도는 ‘보는 이들이 손뼉을 치며 열광할만큼’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그렸습니다. 반면 이인문은 정통 산수화 분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평가에서 보듯 이인문이 18~19세기 조선 화단이 요구한 그림의 주제와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다만 ‘강산무진도’라는 대작에서 겉으로는 아닌척하며 속으로 녹여낸 것입니다. 정조 임금이 꿈꾸는 그런 이상사회를 그런 식으로 그려낸 겁니다.
전 이런 얘기를 하고싶습니다. 지금까지는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빠져있었죠. 
그렇다면 이제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이인문의 ‘파노라마 산수풍속화’, 아니 뭐 ‘진경 풍속화’라 할까요, 새로운 장르의 산수풍속화에 눈을 돌려봄이 어떨까요.(이 기사와 유튜브 영상을 위해 장은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편집한 실감컨텐츠 영상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기사에는 김정임·고연희·김소영·강관식·김미숙·안대회 등 연구자들의 논문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정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2016
고연희, ‘강산무진(江山無盡), 조선이 그린 유토피아’, <한국문화연구> 24권,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2013
김소영,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연구’, 명지대 박사논문, 2015
안대회, ‘성시전도시와 18세기 서울의 풍경’, <고전연구> 제35권 35호, 한국고전문학회, 2009
강관식, ‘조선 후기 화원 회화의 변모와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 제도’, <미술사학> 17호, 미술사학연구회, 2002
김미숙, ‘18세기 조선시대 화원연구’, 공주대 석사논문,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