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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4㎜의 반전매력’…1500년간 ‘흠결’ 숨긴 78호 반가사유상

“세상사가 힘들 때 찾아와 영혼까지 치유받고 간다”는 문화유산이 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반가사유’는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채 생각에 잠긴 자세를 가리킨다. 출가 전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고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부처의 출가전 이름) 태자를 조각한 상에서 유래했다. 6~7세기에 유행한 반가사유상은 30여 구 남아있는데, 그중 국보 78호와 83호가 으뜸이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고대불교조각대전’에 나란히 출품된 국보 78호(왼쪽)와 83호(오른쪽) 금동반가사유상. 출가 전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고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부처의 출가전 이름) 태자를 조각한 상이다. 동시에 전시된 적은 딱 두 번(2004 ·2015년) 밖에 없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78호보다 83호?
물론 문화재, 그것도 국보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그래도 피어나오는 객쩍은 질문 하나가 있다. 78호와 83호 중 딱 한 점을 꼽으라면 어떨까. 대체로는 78호보다는 83호를 선호할 것 같다.
무엇보다 83호가 일본의 국보 1호(조각부문)인 일본 고류지(광륭사·廣隆寺)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쌍둥이’라 할만큼 흡사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유명세를 탔다. 그 덕분일까. 83호가 1960년 이후 7번에 걸쳐 2255일의 ‘외유’를 기록한데 비해 78호는 단 2회(366일)의 해외전시만 경험했다. 
무엇보다 83호(키 93.5㎝, 무게 112.2㎏)는 현존하는 금동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크고 무겁다. 78호(키 80㎝, 무게 37.6㎏)에 비해 13.5㎝(키), 74.6㎏(몸무게)이나 크고 무겁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왼쪽)은 일본 국보 1호(조각부문)인 고류지 소장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쌍둥이라 할만큼 흡사하다는 점에서 유명세를 탔다. 석굴암 불상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쌍두마차라는 극찬을 받는다.

83호는 그렇게 크고 무거우면서도 신체 각 부분의 정연한 비례와 힘이 응축된 생동감, 앉음새의 전체적인 안정감 등 세 가지가 일치되어 빈틈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석굴암 불상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쌍두마차라는 극찬을 받는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78호가 다소 저평가 되기도 한다.
물론 78호 제작시기(6세기 중후반)가 83호(7세기 전반)보다 50년 정도 빨라서 그렇다는 전제가 깔기는 한다. 그러나 얼굴이 사각형이고, 허리와 팔을 비현실적으로 가늘게 표현하는 등 신체 각 부분의 유기적인 관계가 매끄럽지 않다느니, 그래서 78호의 미흡한 측면을 해소한 상이 바로 83호라느니 하는 평가가 나왔다. 결국 78호도 삼국시대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뛰어난 예술품이지만, 83호는 78호의 단점을 극복한 절정의 완성미를 보여준다는 측면이 강조된 것이다.

78호와 83호는 밀랍주조법으로 만들었다. 먼저 쇠틀(철심)을 만들어 점토(내형토)로 정교하게 형상을 빚은 뒤 그 위에 밀랍을 발라 다시 세밀하게 조각한 다음 점토(외형토)를 바른 뒤 열을 가하여 내형토와 외형토 사이의 밀랍을 녹인 다음 그 공간에 청동쇳물을 부워 조각상을 만드는 방식이다.민병찬의 논문에서


■첨단장비로 78호를 들여다보니 
그런데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78·83호 반가사유상을 두고 비파괴성분분석과 감마선 필름을 통한 불상내부 판독, 3D스캔 등의 첨단과학을 동원해 분석해보니 몇가지 중요한 착안점을 밝혀냈다. 1500년 가까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래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78호의 놀라운 반전매력’을 찾아낸 것이다.
‘놀라운 반전매력’이란 그동안 육안으로는 물론이고, X선 촬영 등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 흠결’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얘기냐고 할 것이다. 아니 ‘여러가지 흠결’이 어떻게 ‘놀라운 매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 분석에 참여한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논문 등을 통해 찬찬히 뜯어보자. 

78호를 첨단장비로 들여다봤더니 머리와 몸체, 연화좌(불상이 앉는 자리) 등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두께가 너무 얇아(4㎜ 정도) 주조 때 청동쇳물이 머리끝, 발끝까지 제대로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감마선 촬영 결과 78호의 경우 등 부위, 즉 목걸이와 늘어진 U자형 천의(보살 등이 입는 얇은 옷) 사이에 반타원형 동판을 따로 붙인 흔적을 확인했다. 주조할 때 생긴 구멍을 동판으로 붙여 수리한 흔적이었다. 지금까지 육안으로 관찰되지 않았던 수리흔적이 첨단과학을 동원하고 나서야 겨우 드러난 것이다. 
또 78호는 83호와 함께 밀랍주조법으로 제작한 불상이다. 밀랍주조법이 무엇인가. 철심틀에 점토(내형토)로 불상의 원형을 정교하게 빚고 그 위에 밀랍을 입혀 원형대로 조각한 다음 재차 점토(외형토)를 바른 후 청동쇳물을 부어 주조하는 기법이다. 내형토와 외형토 사이의 공간을 메운 밀랍부분을 열로 녹인 후 그 사이에 청동쇳물을 붓는 것이다.

78호 반가사유상은 두께가 너무 얇아 주조 때 청동쇳물이 몸 끝, 머리 끝, 발끝까지 흘러들어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따로 만들어 붙였거나 수리한 흔적이 보인다. 몸체의 합금(구리+주석) 성분과 다른 합금(구리+납) 성분이 이곳저곳(왼쪽 사진 붉은 원)에서 보인다. 또 78호에서는 등 부분에서 반타원형 동판을 따로 붙인 흔적이 보인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78호 분석에서 발견되는 여러 흠결들
그런데 78호를 감마선으로 분석해봤더니 철심틀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것은 점토(내형토)로 맨처음 형상을 만들 때 몸체와 머리 부분을 각각 따로 만들어 붙였다는 뜻이다. 왼발의 연화좌(불상이 앉는 자리) 역시 따로 제작해서 붙였다. 
이렇게 별도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고, 그 사이에 청동 쇳물이 흘러들어가 거스러미(까칠까칠한 부분)이 생겼다. 하지만 이 또한 육안이나 X선 촬영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흠결이었다. 
또 비파괴방법 등으로 성분을 분석해보니 78호의 본체는 주석이 5% 정도 들어간 ‘구리-주석’ 합금이었다. 그런데 뒷면에 덧댄 동판과 수리흔적이 보이는 양 옆구리 부분에서는 주석 대신 납이 3% 정도 들어있는 구리-납 합금 성분이 보였다. 또 본체와 떨어져 있는 천의 자락과 보관 장식 중 일부도 구리-납의 합금이었다. 무슨 뜻일까. 주조가 한번이 아니라 몇번에 걸쳐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78호(왼쪽)의 경우 머리와 몸체 부분을 따로 만들었기 때문에 수직의 중심 철심은 복 부위까지 올라가고(파란색), 머리 부분에는 별도의 수직철심(노란색)이 내려온다. 83호(오른쪽)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직으로 내려오는 하나의 굵은 사각 철심이 보인다. 머리 따로, 몸 따로 만들지 않고 한번에 빚었다는 뜻이다. 83호는 78호의 단점을 보완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즉 처음 주조(구리-주석 합금) 때 쇳물이 제대로 흘러 들어가지 않아서 결함이 발생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본체와는 떨어져있는 천의 부분은 처음부터 쇳물이 흘러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을 ‘구리-납’의 합금 쇳물로 다시 주조했거나 혹은 별도의 납땜질 수리로 감쪽같이 마무리 한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육안 또는 X선 촬영으로는 볼 수 없었던 흠결이었다.
정리하자면 78호 제작 때 등의 한가운데와 허리, 의자 뒤쪽의 윗부분, 몸체의 정수리 부분, 그리고 몸체와 떨어져있는 천의와 보발, 보관의 끝부분 등은 쇳물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아 결함이 생겼다는 뜻이다. 당시 분석에 참여한 민병찬 관장은 “78호의 이런 결함들을 구리 순도가 높은 구리-납 합금의 쇳물로 수리했다”면서 “일부는 결함 부분에 직접 쇳물을 부어 처리했거나 일부는 별도로 주조해서 붙였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78호는 형상을 빚을 때 고운 입자의 점토를 썼다(왼쪽). 그러나 83호는 굵은 입자의 모래토와 나뭇가지 사질점토에 식물줄기를 3㎝ 내외로 잘게 썰어 넣은 점토로 빚었다(오른쪽). 83호는 고운 진흙만을 사용한 78호의 단점을 극복했다. 입자 굵은 사질점토와 잘게 썬 식물줄기를 섞음으로써 쇳물이 흘러들어갈 때 내부의 공기가 바깥으로 원활하게 배출된 것이다.민병찬의 논문에서


■두께 4㎜의 명과 암
그렇다면 78호의 이와 같은 결함은 왜 생겼을까.
민병찬 관장은 “78호 반가사유상의 두께가 너무 얇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그랬다. 분석결과 78호의 몸체 두께는 평균 4㎜에 불과했다(83호는 평균 10㎜). 6세기 중후반 78호를 제작한 장인은 내형토와 외형토의 사이를 메운 밀납 공간을 최대한 얇게 둠으로써 흘러들어가는 쇳물의 두께를 최소화 했다. 
밀납의 두께가 얇으니 청동 쇳물이 제대로 흘러 들어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몸체와 떨어질수록 쇳물의 흐름 또한 원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몸체와 멀리 떨어진 천의 부분은 별도로 주조해서 붙였을 수도 있다.
얇은 밀납을 사용해서 적은 양의 쇳물로 주조하다보니 78호가 다소 평면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다.  
78호의 장인은 왜 이렇게 제작 과정의 어려움을 자초했을까. 적은 청동 쇳물로 그렇게 큰 불상을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그 당시 그렇게 날씬한 불상을 선호했기 때문일까.
바로 이것이 78호의 반전매력이라는 것이다. 민병찬 관장은 “78호 장인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함부분을 금속 고유의 성질과 고도의 접합 기술로 완벽하게 수리했다”면서 “이로써 육안은 물론 X선 등으로도 구별할 수 없는 절정의 완성도를 자랑했다”고 감탄했다. 민병찬 관장은 “78호에는 고도의 주조기술과 더불어 종교적인 염원을 바탕으로 한 1500년 전 숭고한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평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분석결과 78호 반가사유상은 이곳저곳에서 흠결이 나타났다. 그러나 6세기 중후반의 장인은 이와같은 흠결을 완벽하게 가린 78호를 제작했다. 1500년이 지난 지금와서야 첨단장비를 동원하여 겨우 78호의 흠결을 발견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78호의 단점을 극복한 83호
그 덕분일까. 7세기 초의 장인은 50여 년 전 78호 제작자가 겪은 고초를 완벽하게 극복한 조각상을 창조했다. 그것이 83호 반가사유상이다. 우선 4㎜에 불과했던 78호의 몸체 두께보다 2배 반 정도인 평균 10㎜ 정도로 만들었다. 밀납을 그만큼 두껍게 바른 것이다. 붓는 쇳물의 양은 많아졌지만 통로가 넓으니 흐름은 원활했다. 또 몸체의 원형을 처음 빚은 점토(내형토)를 분석해보니 78호와 확연히 달랐다. 
즉 83호는 굵은 모래입자가 섞인 사질점토에 식물줄기를 3㎝ 내외로 잘게 썰어 넣은 내형토로 빚었다. 이로써 고운 진흙만을 사용한 78호의 단점을 극복했다. 입자 굵은 사질점토와 잘게 썬 식물줄기를 섞음으로써 쇳물이 흘러들어갈 때 내부의 공기가 바깥으로 원활하게 배출된 것이다.
또한 비파괴 분석 결과 바닥 두 곳과 왼발을 빼면 수리한 곳이 거의 없었다. 머리 따로, 본체 따로, 연화좌 따로가 아니라 한번에 완성했다. 그렇게 두꺼운 밀납을 사용해서 많은 양의 쇳물을 주입하니 양감이 풍부하고 입체감과 사실감이 뛰어난 걸작품을 창조한 것이다. 
78호보다 50년 정도 늦게 활약한 83호의 제작자는 청동 합금을 마음껏 사용해가며 자신의 실력을 원없이 발휘한 행운아였던 것이다. 힘든 여건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며 예술혼을 불어넣은 선배를 ‘롤모델’로 삼아….

왼쪽 사진은 백제 부소산성 출토 납석제 반가상. 78호의 대좌에서 늘어지는 반복적인 둥근 U자형 옷주름 양식과 통한다는 점에서 ‘78호 제작국=백제설’을 제기하는 연구자들이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78호의 제작국인 백제가 유력?
그렇다면 78호와 83호는 삼국 중 어디서 제작됐을까. 78호는 1912년 조선총독부가 사업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였던 후치가미 데이스게(淵上貞助)에게서 당싯돈 4000원을 주고 구입한 작품이다. 조선총독부가 신설된 총독부박물관에 기증(1916년)했다. 그러나 기증 과정에서 출토지 관련 자료를 잃어버렸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제작국을 특정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초창기에는 경상도 출토설(안동·영주 등)이 등장했는데, 이곳이 신라에서 가장 먼저 불교가 전래된 곳이어서 ‘신라제작설’이 유력했다. 78호에 표현된 천의의 힘찬 기상이 중국 동위(534~550) 양식이며, 이런 양식이 고구려 6세기 불상에서 유행한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설이 등장하기도 했다. 
또 78호의 대좌에서 늘어지는 반복적인 둥근 U자형 옷주름 양식이 백제 부소산성 출토 납석제 반가상과 통한다는 점에서 백제설을 제기하는 연구자들이 생겼다. 민병찬 관장은 “78호가 제작된 6세기 중후반(추정)에 이와같은 고난도의 불상제작 기술을 구현하는 국가는 그 무렵 가장 화려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백제였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고 밝혔다. 물론 ‘78호 제작지=백제’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떤 경우든 78호가 일본의 고대 불상인 아스카(飛鳥) 시대 도리(止利)양식 불상과 직접 연결된다는 데는 학계 의견이 모인다.

83호 반가사유상의 보관(밑)은 세 개의 반원을 이어붙였지만 어떤 장식도 없이 단순하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같은 양식의 옛 신라지역에서 주로 보인다. 경주 성건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위의 왼쪽 사진)과 황룡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머리편(위의 오른쪽 사진) 등이 그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83호 제작국인 신라가 확실”
그렇다면 83호는 어떤가.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서울에서 활동한 일본인 고미술상 가지야마 요시히데(楣山義英)로부터 2600원을 주고 산 작품이다. 그러나 이 또한 출토지 불명이다. 
경주 오릉설과 경주 남산 서쪽 선방사지 근처 절터설, 충청도 벽촌설 등이 여러 설이 제기됐다. 역시 83호의 뛰어난 조각기술로 보아 당대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예술을 꽃피운 백제와의 관련성을 제기하는 설도 있다. 하지만 세 개의 반원을 이어붙였지만 어떤 장식도 없이 단순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보관은 옛 신라지역에서 주로 보인다. 경주 단석산 신선암 마애반가사유상, 황룡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머리편, 경주 성건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등이다. 
또 83호와 비교 대상인 조각상은 경북 봉화 북지리 출토 석조반가사유상(보물 997호)과, 앞서 인용한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일본 조각부문 국보 1호)이 있다. 특히 고류지가 신라계 도래인인 진하승이 창건한(603년) 사찰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보관의 양식이나 불신의 조각양식, 대좌에 늘어진 옷주름의 표현 등을 비교하면 두 불상이 마치 쌍둥이 같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83호=신라제작’설이 가장 유력하다. 
물론 이 자리에서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의 국적을 100%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78호와 83호의 장인들은 50여년의 격차를 두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절정의 예술품을 창조해냈음을 알 수 있다. 78호와 83호 중 무엇이 더 빼어난지 꼽아보려던 필자의 정신 상태가 왠지 부끄럽기만 하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브랜드인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람객들. 국립중앙박물관도 올 10월부터 78·83호 반가사유상을 동반 상설전시할 방침이다.로이터·연합뉴스


■78·83호 반가사유상을 모나리자처럼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올해 주요업무계획을 발표하면서 국보 78·83호 반가사유상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처럼 박물관의 대표브랜드로 삼겠다고 밝혔다. 민병찬 관장은 “2층 기증관 입구에 전용공간을 마련해서 올 10월부터 78·83호를 나란히 상설전시하겠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루브르의 모나리자 전시실처럼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누구라도 반드시 들러야 하는 상징적인 장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두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불교조각실의 단독전시방에서 6개월 단위로 1구씩 전시해왔다. 두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는 단 2차례(2004·2015년)에 그쳤단다. 
가만 생각해보면 종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는 10월이면 누구라도 오묘한 미소와 사유의 철학을 일깨워주는 78·83호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며 온갖 근심 걱정, 털어내면 어떨까(이 기사를 쓰는 데는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허형욱 학예연구관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민병찬,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방법 연구-국보 78·83호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89, 국립중앙박물관, 2016
민병찬·권강미·박학수·후지오카 유타카 외, <한일금동반가사유상-과학적 조사 연구 보고>, 국립중앙박물관, 2017
정은우, ‘일본의 국보 1호인 광륭사(廣隆寺)의 목조반가상은 한반도에서 건너 간 것인가’, <미술사논단> (2), 한국미술연구소, 1995
김리나, ‘미륵반가사유상, <한국사 시민강좌> 23, 일조각,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