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래자 思來者

‘양심의 가책’... 미해병장교가 전리품으로 챙겨간 문화재 65년만에 반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본부중대 병사들이 몸을 녹이려고 절 안팎 여기저기서 활활 불을 태우고 있었다…돌과 도끼, 삽으로 마구 빠개진 불경 목판더미가 타고 있지 않은가…나는 부연대장에게 달려가 ‘겨레의 문화재가 타고 있으니 즉시 불을 끄고 경판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고 리영희 교수가 1996년 법보신문에 기고한 컬럼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보병 제11사단 9연대 청년장교로 참전했던 리영희 교수가 설악산 신흥사에 주둔한 부대의 병사들이 문화재인 불경판들을 불에 태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쟁이 끝난 1954년 10월 강원 속초에 근무하던 미 해병대 소속 리차드 락웰 중위가 부대원들과 수색정찰임무를 수행하다가 신흥사에 들렀다. 


주한미군이 무단반출했다가 65년만에 기증형식으로 반환한 경판. 신흥사 제공

신흥사는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부대원들과 사찰을 둘러보던 락웰 중위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 하나 보였다. 파괴된 전각 주변에서 글씨가 새겨진 경판(불경을 새긴 판)이었다. 경판 중 대부분은 리영희 교수가 본대로 이미 전쟁 당시 불에 태워졌거나 주둔 군인들의 전리품으로 사라져버린 뒤였다. 설혹 리영희 교수의 제지 덕분에 남아있었던 경판들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락웰 중위도 똑같았다. 널브러져 있던 경판을 ‘뭔가 색다른 물건’이라고 여긴 락웰 중위는 그중 1점을 전리품 삼아 같은 해(1954년) 11월 귀국할 때 가지고 돌아갔다. 


하지만 락웰 중위의 가슴 한편은 늘 찜찜했다. 그저 호기심에 글씨가 새겨진 나무판을 들고 왔을 뿐이라지만 나중에 알아본 결과 한국에서는 꽤나 중요한 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려줄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락웰의 말로는 “20여년전 시애틀 한국영사관을 통해 기증의사를 밝혔지만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영문인지 알 수 없다. 


여하간 그러던 차에 방법이 생겼다. 속초시립박물관이 ‘그때를 아십니까’ 형식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사진자료를 전시하는 행사를 펼친다는 소식을 알음알음으로 듣게 된 것이다. 


리차드 락웰이 찍은 1954년 신흥사 모습. 폐허로 변해있다.


락웰은 지난해 1월 손자를 통해 미해병대 장교로 재직한 1952~54년 사이 자신이 직접 찍은 속초시 사진자료(컬러슬라이드 필름) 279점을 속초시립박물관에 기증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판 1장’의 소장사실도 알려주며 “이것도 기꺼이 돌려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속초시립박물관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락웰의 기증의사를 전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즉각 환수업무에 들어갔다. 우선 재단 소속 미국 사무로 직원을 시애틀에 살고 있는 락웰에게 보내 경판의 실물확인과 국외반출경위 등을 조사했다. 경판은 신흥사에서 반출된 것이 분명했다. 


재단은 락웰의 기증의사를 재차 확인했다. 이에 신흥사의 말사인 능인사 지상 주지스님과 안민석 의원(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등이 지난 18일 시애틀을 방문해서 조건없이 자진반환형식으로 경판을 돌려준 한 락웰(현재 92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올해 92세가 된 리차드 락웰은 손자를 통해 지난 1954년 일종의 전리품으로 가져간 경판을 65년만에 돌려준뒤 시애틀 자택에서 기념촬영을 했다,(왼쪽부터 능인사 주지 지상스님, 리차드 락웰,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이번에 반환된 경판은 제반문(諸般文) 경판이다. 사찰에서 수행한 일상의 천도의식과 상용의례를 기록한 것이다. 신흥사에 전해지던 제반문 경판은 앞뒤 2장씩 44점(전체 88장) 내외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전후로 대다수가 불타거나 사라져버려 현재 신흥사에는 14점만 남아있다. 그중 이번에 반환된 경판은 <제반문>의 앞·뒤면에 87~88장을 새긴 마지막 장이다. 경판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이 경판은 17세기 조선시대 인쇄술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당대 사찰의 경전 간행 사실과 승려들의 생활상, 불교의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특히 87장과 88장은 시주자의 이름이 ‘연옥(連玉)’, ‘김우상양주(金祐尙兩主)’로 확인되어 목판 조성과 관련된 새로운 정보도 추가로 파악할 수 있다.  


능인사의 지상 스님은 “무단 반출해간 경판을 뒤늦게나마 돌려준 락웰의 양심적 행동은 전쟁으로 인한 문화재 피해의 원상회복에 모범 사례가 될 것”이라면서 “전쟁 당시 무단유출해간 사찰 문화재들을 락웰처럼 돌려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신흥사는 돌아온 경판의 보존 상태를 점검한 뒤, 26일부터 설악산 국립공원 소공원 내에 위치한 신흥사 유물전시관 1층에 전시되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