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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국왕은 절대 출입금지 지역”···‘화장실 고고학’의 은밀한 세계

혹시 ‘화장실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습니까. 1970년대초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개념인데요. 
옛 사람들의 배설물(기생충알 혹은 씨앗)로 당대의 식생활 및 건강상태 등을 복원하는 고고학의 한 방법론이죠. 1980년대부터 일본에서도 각지에서 확인되는 화장실유적과 기생충알을 활발하게 연구해왔죠.
얼마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서도 대형 화장실 유구가 확인됐는데요. 1991년 경복궁의 복원 정비가 시작된 이후 꼭 30년 만에 처음으로 화장실터가 나왔다는 게 좀 재미있습니다.

2003년 익산 왕궁리에서 노출된 화장실유구의 유기물 분석(기생충알, 씨앗 등)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이른바 ‘화장실 고고학’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그저 ‘변소유구’로 치부되고, 별다른 분석없이 조사가 마무리되곤 했다.


■경복궁에서 확인된 첫번째 화장실
그럼 화장실이 왜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복원 정비한 곳은 아무래도 궁궐의 중심축, 즉 왕과 왕비가 정사를 돌보고 생활했던 공간이었거든요. 생각해보면 왕과 왕비는 화장실을 쓰지 않았고, 매화틀(매우틀)이라는 해결도구를 썼잖아요. 그러니 화장실이 발견될 리 없었죠.
이번 화장실 유구는 동궁 권역에서 하급 관리들과 군인들이 머물렀던 건물 공터에서 확인된건데요. 화장실의 깊이 1.8m, 전체 길이 10.4m, 너비 1.4m인데요. 
조사단 분석으로는 현대식 정화조와 비슷한 화장실 구조라 합니다. 서양에서는 19세기까지 물이 흘러 분변을 모조리 쓸어 담아서 하천으로 내보냈는데요. 이번에 발견된 경복궁 화장실은 물로 정화된 분변을 따로 거둬서 비료로 쓸 수 있게 만든 거랍니다. 그래서 서양에도 없었던 정화조 스타일의 화장실이라 한거죠.
그리고 전체 길이가 10m가 넘었으니 공중화장실로 쓰인 것이 분명했는데요. 4~5칸 규모의 대형 화장실이니까 한 번에 최대 10명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구요. 1인당 1일 분뇨량 대비 정화시설의 전체 용적량(16.22㎥)으로 계산해보면 하루 150여 명이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확실한 방법이 있죠. 화장실 바닥 흙을 채취해서 분석해보니 기생충 알이 g당 1만8000건이 검출됐답니다. 사람들의 분변에서 검출된 기생충알이 분명했던거죠.

경복궁 복원은 1991년부터 시작됐다. 지금까지는 광화문과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 임금과 왕비의 공간을 중심으로 복원 정비가 이뤄졌기 때문에 화장실 유구가 확인되기는 어려웠다. 최근 경복궁에서 복원정비가 시작된 이후 30년만에 처음으로 화장실 유구가 나왔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악취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두에 말씀드린 ‘화장실 고고학’이 국내에서 시작된 것은 20년도 채 안된다는 겁니다.
예전에 신라 왕경 내의 가옥터에서, 혹은 경산 임당동 등에서 화장실 유구와 유물(변기용 항아리) 등이 확인되었는데요. 그냥 ‘변소 유구’라고 이름짓고 조사를 끝냈거든요.
그런데 2003년이었습니다.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을 발굴하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길이가 10.8m나 되고 폭 1.7~1.8m에, 잔존깊이가 3.1m나 되는 대형 지하구덩이를 발굴했습니다. 
구덩이 안에서는 기와와 토기, 짚신, 나무막대를 비롯해 밤껍질이나 콩류, 참외씨 등이 나왔습니다. 
구덩이 안에는 수분이 가득 포함된 유기물이 두껍게 쌓여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과일이나 곡물, 물을 저장하는 지하창고로 판단했습니다.
한데 좀 이상했습니다. 흙을 걷어내자 엄청난 악취가 풍겼습니다. 조사단은 코를 쥐고 조사를 마쳤는데 끝까지 그 악취의 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경복궁 화장실의 개념도. 입수구를 1곳, 출수구를 2곳 두되, 입수구의 높이를 출구수보다 낮게 했다. 물이 유입되면 화장실 분변과 섞이면서 분변 발효를 빠르게 하고 부피를 줄여 바닥에 가라앉혔다. 분변에서 분리된 오수는 정화수와 함께 출수구를 통해 궁궐 밖으로 배출됐다. 현대의 정화조와 비슷한 구조였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구덩이 안에서 윗부분을 약간 둥글게 만든 나무막대 6개가 출토됐습니다. 조사단은 글씨가 새겨진 명문 목간이 아닐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글자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발굴을 끝내고 그해(2003년)의 조사성과를 정리하는 자문위원회가 11월에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자문위원인 이홍종 고려대 교수가 “화장실 유구가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과연 맞았습니다. 악취를 풍겼던 유기물 토양을 분석해보니, 편충과 간흡충, 회충은 물론 종 감별이 어려운 장내 기생 흡충류의 충란이 다량 확인됐습니다. 그동안 몇군데서 발굴됐지만 후속조사(기생충알 검사 등) 없이 덮어버린 ‘변소유구’가 아니라 제대로 조사된 명실상부한 ‘화장실 유구’가 확인된거죠.

신라 왕경 제13가옥(왼쪽)과 경산 임당동 마을 유적(오른쪽) 등에서도 화장실 유구가 확인됐다. 항아리를 파묻어 놓은 형태의 화장실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는 화장실 유구가 나와도 그냥 ‘변소유구’라 지칭하고는 별다른 분석없이 발굴을 마무리했다.전용호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제공


■화장실 고고학의 시작  
한국의 ‘화장실 고고학’이 바로 익산 왕궁리에서 시작된겁니다. 
추가 조사해보니 2칸, 3칸, 5칸짜리 공동화장실이 차례로 확인됐습니다. 2칸짜리가 가장 위쪽에 있었고, 그 아래로 3칸~5칸짜리 순으로 배치됐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구분했을까요. 공동화장실도 신분에 따라, 혹은 성별에 따라 구분된 것일까요. 수수께끼 같던 나무막대의 용도도 파악됐습니다. 
짐작하시는대로 이 나무막대는 지금의 화장지, 즉 뒤처리용이었던 겁니다. 뭐 그때는 종이가 엄청 귀하던 시절이었을테니 뒤처리용 막대가 필수였을겁니다. 흥미로운 유물이 또 있습니다. 
인근 배수로에서 확인된 토기 2개체분인데요. 조사단에서는 이것을 ‘휴대용 변기’, 즉 요강으로 추정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충남 부여 군수리절터에서 출토된 ‘변기형 토기’와 함께 단 3점 확인된 건데요. 
뭐 왕조시대 국왕 및 왕비 전용 변기인 ‘매화틀’ 밑에 둔 ‘휴대용 변기’일 가능성도 있겠네요. 

2003년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 화장실 유구. 길이 10.8m, 폭 1.7~1.8m, 잔존깊이 3.1m 되는 대형 화장실이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즐거운 상상 한번 해볼까요. 익산 왕궁리는 백제 무왕(600~641)과 관련된 유적인데요. 그러면 이곳에서 확인된 ‘휴대용 변기’ 2개체분은 혹 무왕과 왕비의 매화틀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익산 왕궁리에서 시작된 한국의 ‘화장실 고고학’은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유적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전까지는 별다른 조사없이 그냥 ‘변소 유구’로 치부되던 유구들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된거죠.
‘화장실 유구’에서 수습한 유기물 분석을 통해 기생충알과 씨앗, 꽃가루 등을 정밀 분석하게 된겁니다. 경주 동궁과 월지 등에서, 부여 쌍북리에서, 그리고 양주 회암사터에서 잇달아 화장실 유구가 정밀조사되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2006년 양주 회암사의 서쪽 부속건물터에서 깊이 4m, 폭 10m 이상의 돌 구조물이 발굴됐는데요. 역시 처음엔 음식저장고이거나 창고인줄 알았습니다. 

2003년 익산 왕궁리 화장실 유구에서 출토된 기와와 토기, 짚신, 목재와 나무막대, 각종 씨앗류. 구덩이에는 수분이 가득 포함된 유기물이 두껍게 쌓여있었는데, 심한 악취를 풍겼다. 처음에는 악취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러나 바닥에 깔린 흙덩이를 분석해보았더니 기생충알이 대거 확인되었습니다, 흙 1g당 흡층과 회충알이 30개 이상 나왔는데, 이것은 흙이라기보다는 대변성분에 가까웠습니다. 해우소였던 거죠. 
제대로 발굴해보니 해우소의 규모는 길이 14m, 폭 2.8m, 깊이 3.8m였습니다. 구덩이 둘레에는 12개의 기둥자리가 발견됐습니다. 구덩이 내부는 발굴 당시 무너진 기와더미로 덮여있었는데요. 아마도 대형 구덩이 위에 마루 널판을 깔고 기둥과 기와 지붕을 올려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했던 것 같아요. 화장실 유구 북쪽으로는 수조가 설치되었는데, 뒤처리용이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왕궁리에서 출토된 나무막대는 뒤처리용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중국 둔황에서 출토된 기원전후의 뒤처리용 나무막대.전용호 학예연구실장 제공


■부처님도 하나님도 골치를 앓았던 화장실 문제 
이렇게 ‘화장실 고고학’이 갑가지 각광을 받고 있지만 사실 화장실은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곧 화장실의 역사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말인데요. 
틀리지 않죠, 왜냐면 사람이 혼자 살면 화장실이 필요없잖아요. 아무데서나 해결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사람은 곧 인간이잖아요. 인간(人間)은 문자 그대로 ‘사람(人)사이(間)’잖습니까.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게 될 때 비로소 화장실이 필요하죠. 그래서 위고의 말처럼 ‘인간의 역사=화장실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부처님과 하나님까지 발벗고 나섰답니다. 
예컨대 부처님이 활약한 기원전 6세기 무렵 불교사원 주변이 온통 똥·오줌밭으로 변했답니다. 그러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장실을 만든 다음 반드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일러주었다네요.

1400년 전 백제시대 화장실로 판명된 유구를 추가 조사해보니 2칸, 3칸, 5칸짜리 공동화장실이 확인됐다. 한국의 화장실고고학은 왕궁리에서 시작됐다. 그림은 백제 화장실을 복원한 모습이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문을 세번 두드릴 것, 땅에 독을 묻을 것, 냄새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닫을 것, 벽이나 널에 문질러 바르지 말 것, 돌이나 숯덩이, 나뭇잎으로 닦지 말고 반드시 나무막대를 쓸 것….”
여호와 하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대요. <구약성서> ‘신명기’ 23장 12~14장에 나옵니다.
“너의 부대 밖에 변소를 마련하고 그리로 나가되 네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볼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려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부대 안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부대를 거룩히 하라.”
한마디로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뒤처리 잘하라’고 신신당부하신거죠. 아무데서나 배설하지 말고 군대의 진 밖에 제대로 된 화장실을 만들어 깔끔하게 처리하라, 뭐 이런 말씀이었던겁니다. 

왕궁리 화장실 유구의 인근배수로에서 확인된 변기형 토기. 조선시대 국왕이 사용했던 매화틀 밑에 둔 휴대용 변기(요강)와 비슷한 모양이다.


■서울만 똥천지가 아니었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고민했던 뒷처리는 역사를 통틀어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서울에서는 오줌을 마구 내다버리므로 우물물이 짜고, 냇다리의 석축가에 똥이 더덕더덕 말라붙어 있다”(<북학의>)고 ‘디스’했는데요. 
18~19세기 서울을 ‘똥덩어리’ ‘똥천지’로 표현한 겁니다. 
그러나 세상 천지에 서울만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서양의 거리가 더했으면 더했지 서울보다 낫지 않았답니다. 단적인 예로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65~128)는 “밤마다 남의 집 창 밑을 어슬렁 거리고 싶으면 유언장을 먼저 써놓는 편이 낫다”고 했습니다. 시민들이 분뇨와 쓰레기를 창밖으로 마구 던져버렸기 때문이죠.
뭐 하이힐이 인간의 분뇨가 낳은 산물이라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얘기죠. 중세 유럽에서 비오는 날 길 위에 퍼진 동물과 인간의 분뇨가 뒤섞여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굽이 높은 나무 신을 신었는데, 이것이 훗날 패션의 상징인 ‘하이힐’로 발전했다, 뭐 이런 이야기 말입니다.

①경주 동궁 및 월지에서 확인된 석조 화장실 ②부여 쌍북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화장실 유구 ③양주 회암사터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사찰의 해우소(화장실) 유구. 왕궁리 화장실 유구 이후 기생충 조사 등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은 또 어떻습니까. 성 전체에 수세식 시설을 한 화장실은 한 곳도 없었다죠. 그런데 국왕의 접견이 몇시간에 걸쳐 이뤄졌다죠. 
그래서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여성은 선 채로 풍성한 스커트를 보호막 삼아 생리욕구를 해결했고, 남성들은 기둥, 벽감, 커튼, 테피스트리 뒤에서 소변을 봤다고 하죠. 
오죽하면 프랑스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여름철이면 어디에 앉아도 소변냄새가 났다. 사방에 대변이 깔려 있었다”고 한탄했답니다. 영국은 나았을까요. 오십보백보였습니다.
1855년 7월 영국 템스강 유람객의 목격담이 ‘타임스’에 실렸는데요.
“강물 전체가 뿌옇고 희미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더러운 강물에서 나는 악취는 끔찍했다. 이제 템스강 전체가 악취를 풍기는 배설물 그 자체였다.”

유럽에서는 예부터 집안에는 화장실을 만들지 않았다. 길 밖으로 통하는 변기를 설치해놓고는 그곳에서 용변을 보았다.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유럽 각 도시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화장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오른쪽 삽화는 옷도 입지않은채 길 위로 소변을 버리는 장면.이장훈 한국생활악취연구소장 제공

어떻습니까. 이런 여러 사례를 보면 1400년 전의 백제인부터 19세기말 조선인까지 그래도 제법 선진적인 화장실을 갖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특히 지금 이 순간의 ‘화장실 문화’는 어떻습니까. 대한민국 화장실보다 깨끗하고 쾌적한 곳은 없을 것 같아요. 비록 ‘화장실 고고학’의 역사는 20년도 안됐지만요. 
지금도 화장실을 지저분한 곳으로 여기십니까.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가 희곡(‘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곳은 분명 혼자서도 첫날밤을 치른 사람처럼 행복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곳, ~당신이 그 어느 것도 몸에 지니지 않는 한갓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겸손의 장소~ 그곳은 인간이 휴식을 취하는 곳, 하지만 부드럽게,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감행하는, 그런 장소.”
사족을 달아볼까요. 용변 조차 매화틀(매우틀)에서 해결해야 했던 왕조 시대 임금의 신세가 더 기구했던 것도 같아요. 정사를 펼치느라 눈코 뜰새 없었고, 용변을 볼 때조차 화장실에 앉아 잠깐의 여유도 즐길 수 없었던 그런 자리였으니 말입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