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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이순신은요, 원균은요”…선비가 쓴 ‘난중일기’가 전한 밑바닥 여론

임진왜란을 기록한 공식사료는 당연히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겠죠.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 어떤 이들보다 기록에 진심인 사람들이죠. 진중일기인 이순신(1545~1598)의 <난중일기>, 관리로서 임진왜란을 치른 류성룡(1542~1607)의 <징비록>이 대표적이죠.     
선조(1569~1608)의 피란길을 수행한 김용(1557~1620)의 <호종일기>, 의병장 김해(1555~1593)와 정경운(1556~?)의 <향병일기>(김해)와 <고대일록>(정경운), 전쟁포로로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노인(1566~1622)의 <금계일기>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민간인의 신분에서 전쟁 상황을 기록한 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오희문(1539~1613)의 <쇄미록>입니다.
<쇄미록>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 오희문이 임진왜란 전후로 1591년 11월27일부터 1601년 2월27일까지, 9년 3개월(3368일)간 쓴 피란일기입니다. 총 7책 1670쪽에 51만9973자를 담았습니다. 

■자잘하고 보잘것 없는 이의 피란일기
오희문은 임진왜란 개전 5개월 전인 1591년(선조 24) 11월27일 서울을 출발해서 남행길에 올랐는데요. 
남부지방에 사는 노비들로부터 신공(身貢·노비가 주인 집에 노동력을 대주는 것 대신 내야 했던 현물)을 거둬들이고, 겸사겸사 외가(충청 영동)와 처남(전라 장수), 매부·누이(전라 영암) 등을 만나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여행 도중 전라 장수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죠. 이후 장수~홍주~임천(부여)~평강(아들의 부임지) 등지를 떠돌다가 1601년 2월 26일 서울로 돌아옴으로써 9년3개월의 기나긴 피란일기를 끝내죠.

‘쇄미(쇄尾)’는 ‘자잘하고 보잘 것없이 떠도는 사람이로구나!(쇄兮尾兮 流離之子)’라고 한 <시경> ‘패풍·모구’에서 따왔습니다.  한마디로 ‘피란일기’라는 뜻이죠. <쇄미록>은 전쟁 당시 입수한 국왕의 교서와 각종 공문서, 편지 등을 수록했습니다.
또 작자 본인의 피란 생활은 물론이고, 전쟁 중 고통받은 민중의 삶을 생생한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전쟁과 맞딱드린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도 알게 됩니다. 이는 실록이나 다른 문헌에는 보이지 않은 자료입니다. 무엇보다 당대 백성들 사이에 흘렀던 밑바닥 여론의 동향을 살필 수 있답니다. 

■쇄미록이 평가한 원균
요즘 영화(‘한산:용의 출현’)에서 재조명된 한산대첩을 <쇄미록>은 어떻게 다뤘을까요.
“우수사는 이달초(7월8일)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또 적선을 만나 80여 척을 사로잡았다…”(1592년 7월26일)
한산대첩 하면 이순신 장군의 업적으로 알고 있지만 <쇄미록>의 기사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깁니다. 
전투를 주도한 것 같은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1540~1597)을 가리킵니다. 원균의 주도 아래 전장에 나서 대승을 도운 것으로 묘사된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바로 이순신(1545~1598·전라 좌수사)과 이억기(1561~1597·전라 우수사)입니다.

<쇄미록>이 기록한 이순신의 전공. 1592년 5월 7일의 옥포해전을 다루면서 “이순신이 전라 수군절도사와 함께 적선 42척을 불태웠다”는 등의 기록을 남겼다

아닌게 아니라 한산대첩 이전에도 <쇄미록>에는 원균 관련 기사가 제법 보입니다.
“들으니 영남 우수사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척을 불태웠다.”(1592년 4월)
“수군절도사 원균이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만나니 근심이 풀렸다.”(1592년 5월30일)
‘~들으니’로 시작되고, ‘원균의 승전보에 근심이 풀렸다’는 내용은 당대 민간의 여론을 가감없이 전했다 할 수 있습니다.

오희문은 또 1597년(선조 30) 4월5일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왜선 2척을 포획하고 왜적 65명의 수급을 베었다”면서 ‘참으로 기쁜 소식’을 일기에 적었습니다. 또 그 해 7월29일 원균의 칠천량 전투 대패를 전하면서 “흉적(왜군)이 불의에 야습해서 함락됐으며, 통제사 원균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면서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고 했습니다.
“적이 오래 (전라도에) 침범하지 못한 것은 한산도에서 막았기 때문이다. 이제 빼앗겼다…남해 제해권을 왜적에 내줬다.”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은 민간에서도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쇄미록>은 1595년 6월20일자에서 “원균과 이순신의 사이가 벌어져 서로 저촉되는 일이 많다보니 형세상 서로 용납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순신이 죽었으니 누가 바다를 지키겠는가”
그럼 이순신과 관련해서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쇄미록>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적선 42척을 불태웠다”는 옥포해전(1592년 5월)과 ‘경상 우수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7월8일)의 전과를 소개한 뒤 “10일에도 적선 80여척 등을 나포했다”는 등의 기록했습니다.  오희문은 1598년(선조 31) 12월 3일자에서 왜군의 철병 소식을 전하면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탄환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면서 “나라의 불행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느냐”고 슬퍼했습니다.

13일 뒤인 16일자는 다시 이순신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장군의 삶을 조명합니다.
“전사한 이순신은 난리 초부터 전라도의 보루가 되었는데 지금 왜적의 탄환에 죽었으니 애석하다. 지금 조정에서 전쟁에 끝났다며 호들갑 떨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이 죽었으니 누가 조선의 바다를 지키겠는가.”(12월 16일자) 
민간인 오희문이 이순신에게도, 원균에게도 어떤 선입견을 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간의 평가 역시 그랬을 겁니다. 다만 <쇄미록> 1595년(선조 28) 6월20일자에 심상치않은 내용을 전합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 원균은 난리 초기에 경상우수사로서 많은 공로를 세워서 2품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전라 좌수사 이순신과 사이가 벌어져 서로 저촉되는 일이 많다보니 형세상 서로 용납되지 못해 충청 병마사로 관직을 옮긴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은 불구대천의 원수
안타깝게도 이 소문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순신·원균 갈등은 옥포해전(1592년 5월) 이후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원균의 불만에서 시작됐습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천천히 하자’고 말해놓고는 밤에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했다. 원균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유감스러워 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
<선조수정실록>은 “이때 두 사람이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다투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그로부터 생겼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전공을 둘러싼 두 사람의 반목은 극심해졌습니다. 얼마나 대단했던지 1594년(선조 27년) 11월12일 선조가 참석한 조정회의에서 두 사람의 갈등을 두고 심도있는 논의가 벌어집니다. 
이때 선조는 “이순신이 왜적을 포획한 공은 가장 많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지병(습증)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 해상에서 죽기를 각오한 원균에게 전공과 관련된 불만이 있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원균의 처지도 이해했습니다. 
결국 이 자리에서는 “원균도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만한 장수요, 이순신도 비상한 장수인데 둘이 다투면 큰일”이라면서 “두 사람에게 ‘그만 하라’는 글을 내려 질책하는게 좋다”는 정탁(1526~1605)의 상언이 채택됩니다. 섣불리 두사람 중 한사람이라도 경질한다면 수군이 동요할 것이라는 염려가 통한거죠. 

오희문은 <쇄미록>에서 먼저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 임금을 원망하는 글을 여러차례 썼다. 오희문은 “주상께서 도성을 지키고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면 왜군의 침입이 어려워졌을 것이며, 군대도 흩어지지 않고 제대로 모였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난중일기의 ‘원균’ 뒷담화
따지고보면 이순신·원균의 알력에서 원균을 더욱 불리하게 만든 것이 있죠. 바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입니다.
생각해보면 일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죠. 자신의 심중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순신의 일기에 지휘권과 전공, 관할구역 등을 두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원균을 곱게 볼리 만무하죠.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원균을 80~120번 정도 언급했는데요. 절대 다수가 원색적인 비난입니다.
“원균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1593년 5월 14일) “원균이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해괴했다.”(1593년 8월 26일)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덤비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아있다.”(1597년 5월 8일)

오희문은 선조의 의주 몽진길을 수행하다가 사초책를 불구덩이에 던져넣고 도망쳐버린 사관 4명(임취정·박정현·조존세·김선여)을 두고 “이런 개돼지 같은 무리를…”(1592년 8월21일)라고 욕했다.

이 인용문들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다른 생각도 듭니다. 이순신 장군이 그날그날의 심경을 담아 쓴 일기가 400여년 후 이렇게 공개적으로 탈탈 털리게 될 줄 몰랐겠죠. 이순신 장군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자신의 속마음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털린 것에 몸둘바를 몰랐겠죠. 
어떻든 원든, 원치 않았든 이순신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원균은 모함꾼, 비겁자, 술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원균의 치명적인 약점은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 외에는 변명의 수단이 없죠.
하지만 훗날 이순신의 경질(1597년 1월) 후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선 수군을 궤멸상태로 빠뜨린 칠천량 패전의 책임자인 것은 분명하잖아요. 장수로서 패전의 책임은 져야 하는 건 맞겠죠. 
그렇지만 원균은 전쟁 후 이순신·권율(1537~1599)등과 함께 나란히 ‘선무1등공신’으로 책록됐습니다.

<쇄미록>이 전하는 전쟁의 참화는 끔찍했다. 오희문은 “길에서 굶어죽은 사체 곁에서…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 어미라 하는데, 뼈를 묻으려 해도 힘이 없다”(1594년 2월14일)고 전했다.

■“주상께서 도성을 굳게 지켰다면…”
비단 이순신·원균 이야기 뿐이 아닙니다.

<쇄미록>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라도 장수를 여행하던 오희문이 임진왜란의 개전(4월13일)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 후인 16일이었습니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오희문은 백성들을 팽개치고 줄행랑친 선조 임금을 원망하는 글을 남깁니다.
“만일 주상께서 도성을 굳게 지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미리 준비하여 막고…필사의 각오로 길을 끊었다면 적이 어찌 침범하겠느냐. 그런데 먼저 도망가니 몹시 애석한 일이다.”(1592년 4월)
오희문은 선조의 몽진길을 수행하다가 사초책를 불구덩이에 던져넣고 도망친 사관 4명(임취정·박정현·조존세·김선여 등)을 두고 “이런 개돼지 같은 무리를…”(1592년 8월21일)라고 욕했습니다. 
이 4명 때문에 선조 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 개전(1592년 4월)까지 25년의 기록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으니 험한 말을 들어도 싸죠. 요즘으로 치면 기막힌 ‘드립성’ 표현도 나왔습니다.
“경상도 관찰사가 백성들을 동원해서 농사철까지 ‘지키지도 못할’ 성을 쌓는 바람에 원망이 하늘을 덮었다. 그래서 ‘성을 높이 쌓은들 누가 지키며 싸우랴. 성은 성(城)이 아니라 백성(百姓)이 바로 성이라네’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1592년 4월)

오희문은 “굶주림 때문에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 씹어먹는다고 한다”면서 “사람의 씨가 말라갈 지경”(1594년 4월3일)이라고 고발한다.

■끔찍한 전쟁통의 삶
<쇄미록>이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끔찍합니다.
“길에서 굶어죽은 사체 곁에서…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 어미라 하는데, 뼈를 묻으려 해도 힘이 없어….”(1594년 2월14일)라는 내용은 새발의 피였습니다. “굶주림 때문에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 씹어먹는다고 한다”(1594년 4월3일)고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요즘 혼자 가는 사람을 죽여 잡아먹는다”면서 “사람의 씨가 다 말라 갈 지경”이라고까지 전합니다. 
배고픔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 “성주를 점령한 왜군이 관청의 곡식을 나눠주자 백성들이 “새로운 상전(왜군)이 나를 살렸다”고 칭송했다는 얘기까지 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긴 나무에 사람의 머리를 베어 무수히 걸었는데 부패해서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걸려 있거나 망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한다. 분한 마음을 이기기 어렵다.”(1592년 9월24일)
여성들은 또 어떤 고초를 겪었습니까. <쇄미록>에는 “왜적은 영남 양반가 여성 중에 얼굴이 고운 자를 뽑아 먼저 간음한 다음 일본으로 가는 배편에 보냈다”는 참혹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더 기막힌 사례도 있습니다.
“왜적의 포로가 된 여인이 적들에게 돌아가며 강간 당해 자결하려다가...치마를 들춰보니….”(1592년 5월)
필자가 더이상 옮길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내용입니다. 

왜군의 만행은 필설로 헤아릴 수 없었다. <쇄미록>은 “나무에 사람의 머리를 베어 무수히 걸었는데 부패해서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걸려 있거나 망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한다. 분한 마음을 이기기 어렵다.”(1592년 9월24일)고 기록했다.

■“괘씸하고 얄미운 노비들”
<쇄미록> 곳곳에는 부모와 아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통에 헤어진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통곡하고…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진다”(1592년 4월)고 조바심을 냈습니다. 또 “새벽에 꿈을 꾸니 아내가 집에 있는데 옛날과 같다. 막내 딸 단아는 분을 바르고 깨끗이 단장했는데 내가 무릎 위에 안고 그 볼을 만졌다.”(1592년 7월3일)는 내용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한 막내딸 단아가 1597년(선조 30) 2월1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희문은 “내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단아가 나와 기다렸다가 띠를 풀어주고 옷을 벗겨주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애통한들 어쩌겠느냐”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쇄미록>에는 당대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요. 노비들이 말을 훔쳐 도망가자 “상전을 사지에 몰아넣다니 분통이 터진다”는 내용(1593년 2월20일)이 있구요. 어떤 노비가 사온 물건 중 일부를 착복했다면서 “괘씸하고 얄밉다”(1593년 10월30일)고 앙앙불락하는 대목도 있어요.
<쇄미록>에 요즘이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아버지상이 있어서 하나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아내와 두 딸, 네 계집종이 모두 학질을 앓고 누워서 저녁밥 지을 사람이 없다. 그들이 덜 아프기를 기다려 짓는다면 반드시 밤이 깊을 것이다.”(1593년 9월7일)
집안 여자들이 모두 학질을 앓고 있는데, 고작 ‘밥을 얻어벅지 못할까봐’ 걱정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요즘 같으면 큰 일 날이죠. 그러나 당시는 어쩔 수 없는 가부장 사회였으니 뭐 어쩌겠습니까.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 여성들이 당한 고난을 생생한 필치로 전했다. 여성들은 차마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왜군에 의해 능욕을 당한채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을 택했다. 더러는 일본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불멸의 역사가가 된 선비
사실 오희문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냈죠. 
그러나 그 어떤 장원급제자도 부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죠. 그러나 그 분은 꼬박꼬박 그 참혹한 역사(임진왜란)를 기록해 나갔죠. 그 복은 후손들에게 미쳤답니다. 
<쇄미록> 1597년 3월19일자는 “맏이(오윤겸·1559~1636)가 선조 5대조 이하에서 처음 급제했다”면서 “가문의 경사를 어찌 표현할 수 있냐”고 기뻐했습니다. 오윤겸은 인조(1623~1649) 연간에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둘째 오윤해(1562~1629)의 아들인 오달제(1609~1637)는 병자호란 때 충절의 상징인 삼학사(홍익한·1586~1637, 윤집·1606~1637, 오달제) 중 한 분이죠. 그러고보면 오희문은 세상 부러울게 없는 삶을 사신 분이죠. 벼슬없이도 이름 석자를 청사에 길이 남겼으니까요. 국립진주박물관이 2020년 개최한 특별전의 이름이 ‘오희문의 난중일기’였습니다. 
 (이 기사를 위해 서윤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와 박선숙 국립진주박물관 연구원이 박물관을 대표해서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해주 오씨 문중도 자료제공을 허락해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서윤희,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그래도 삶은 계속된다>(특별전 기념도록), 국립진주박물관, 2020
전형윤·조광·전경목·이성임·문용식·김학수·김현영, <쇄미록 번역서 발간기념 학술심포지엄 발표 자료집>, 국립진주박물관, 2018
신병주, ‘16세기 일기자료 <쇄미록> 연구-저자 오희문의 피란기 생활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60, 조선시대사학회, 2012
김태형, ‘이순신과 원균의 포폄시비 일고’, <한국인물사연구> 22, 한국인물사학회, 2014
방기철, ‘임진왜란기 오희문의 전쟁체험과 일본인식’. <아시아문화연구> 24, 가천대아시아문화연구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