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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가야연맹의 '큰형님'이 따로 있었나…1인자 꿈꾸는 아라가야

2019년 함안 말이산 고분군 45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복원 모습. 보존처리 과정에서 금동관의 부품임을 확인했다.백제·신라처럼 관테와 세움장식 등을 따로 제작하지 않았다. 하나의 동판에 그림을 그린 뒤 장식 모양에 따라 뚫어서 조각하는 기법(투조)을 썼다. 금공품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교수가 출토된 금동관편을 토대로 복원했다. 봉황 두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아라가야 특유의 독창적인 디자인이다.

“마치 쌍둥이 같네요.” 얼마전 가야연맹체 중에서도 아라가야의 중심지인 경남 함안 말이산 75호분에서 발견된 중국제 청자에 필자의 눈길을 확 잡아 끌었다. 5세기 중국 남조에서 제작된 완형의 연꽃무늬 청자그릇이었다. 
발굴단(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은 5세기 중국 유송(420~479) 연간에 제작된 청자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내 유사 사례로 소개한 천안 용원리 출토품을 제시했다. 그러나 곰곰이 살펴보면 용원리 뿐이 아니다.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미래마을)에서 출토된 대옹(큰 항아리) 속에서 확인된 중국제 청자그릇과도 흡사하다. 4개(+중국제)의 청자 사진을 비교해보면 약간 초를 쳐서 ‘쌍둥이’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라도에서도 비슷한 청자가 출토된 적이 있다는 연구자들의 증언(?)이 줄을 이었다. 새삼 5세기대 청자를 매개로 한 동북아시아의 활발한 네트워크를 상상해보았다.

■독창적 디자인의 아라가야 금동관
지난 7월에도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2019년 발굴된 함안 말이산 45호분의 보고서 출간을 위해 유물을 보존처리 하던중 금동관 조각들을 확인한 것이다. 이 조각들은 무덤 주인공을 안치한 공간에서 말갑옷과 말안장 등과 함께 흩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말과 관련된 유물로 인식됐다. 화살통 부속구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금공품 연구자인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조각들의 크기나 굴곡 등을 보면 유기질 관의 전면에 부착한 금동제 관의 부품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5세기초 조성된 왕릉급 무덤인 말이산 45호분에서 금동관(길이 16.4㎝·높이 8.2㎝)이 확인된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금동관이 백제나 신라로부터 받은 사여 혹은 수입품이 아니라 자체 제작품일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이한상 교수에 따르면 이번에 확인된 아라가야산 금동관은 다소 거칠게 제작됐다. 백제·신라처럼 관테와 세움장식 등을 따로 제작하지 않았다. 하나의 동판에 그림을 그린 뒤 장식 모양에 따라 뚫어서 조각하는 기법(투조)을 썼다. 보통 금동관이나 금관의 세움장식은 관테와 별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다. 그래야 찰랑찰랑 거리는 맛이 있다. 
그러나 아라가야 금동관은 관테와 세움장식이 한 몸이기 때문에 고정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제작을 위해 구사된 뚫음(투조)기법도 문양의 크기와 모양도 일정하지 않다. 
그렇다고 아라가야 금동관을 낮춰볼 수 없다. 디자인을 보면 두 마리의 봉황(추정)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표현되어 있다.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디자인이다. 출(出)자나 사슴뿔 모양인 신라, 풀 혹은 꽃 형태 장식인 대가야 금동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약간 거칠지만 독창적인 이 금동관을 만든 이는 아마도 아가라야 최고의 금공기술자였을 것이다. 
특히 제작시기(5세기 초 추정)가 의미심장하다. 이미 금공제품이 화려했던 백제에 비해서는 늦다. 하지만 신라 금동관(황남대총 남분 출토 고식 금동관)과는 비슷하고, 대가야(5세기 중반)보다는 앞선 시기에 금동관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다. 이한상 교수는 “당대의 백제 명품을 접한 아라가야인들도 ‘우리도 한번 만들어보자’고 자체 제작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설명했다.

■“임나일본부는 찾을 수 없었다”
아라가야의 중심부인 함안은 일제강점기부터 주목을 끌었던 곳이다. 
아라가야의 왕과 왕·귀족들이 묻힌 말이산 고분군(1.9㎞의 구릉)엔 127기의 대형고분(지름 10~35m)이 조성되어 있다. 변·진한 시기인 기원전 1세기부터, 아라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까지 700년간 이어진 공동묘지다.   
일제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예(함안)서 찾는다며 눈독을 들였다. 예컨대 일본학자인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는 김해·함안 지역 조사에 나서며 ‘내 손으로 임나일본부를 찾겠다’고 장담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의 직할지가 된 임나일본부는 김해·함안에 있었다. 한국병합은 곧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다. 나는 그 일본부가 어디에 있었는지 철저히 연구했다.”(<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 등)
그러나 1910~17년 사이 4차례의 조사결과 구로이타의 장담은 헛소리로 판명됐다.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함안·김해는 모두 일본부 소재지라고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구로이타의 구구절절한 고백인데, 까놓고 말하면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신문배달소년이 찾아낸 말갑옷의 위용
이후 1990년대초까지 이곳은 특별히 주목받을만한 이슈를 낳지 못했다. 
혐의를 벗었다고 하지만 일제가 뒤집어쒸운 ‘임나일본부’의 악령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아라가야, 즉 안라국의 기사가 <삼국사기> 등 한국측 역사서에 거의 기록되지 않고 대부분 <일본서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여전히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러던 중 1992년 6월6일 아침 신문 배달 소년이 함안 도항리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발견한 철조각이 홀대받던 아라가야의 면목을 세워주었다. 배달소년이 굴착기로 파헤쳐지기 일보 직전 가까스로 발견·신고한 철조각은 다름아닌 말갑옷의 조각편이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은 한쪽은 굴착기의 삽날에 반쯤 날라갔지만 한쪽은 완벽하게 남아있던 말갑옷 1개체를 수습했다. 말의 얼굴을 가리는 마면주도 보였다. 
동수묘·삼실총·쌍영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묘사된 것과 거의 흡사한 말갑옷이었다. 노출된 무덤에서는 그외에도 금판을 장식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1점(길이 83㎝)과 토기류가 수습됐다.
4세기 후반에 조성된 무덤의 주인공은 아라가야의 수장급으로 추정됐다. 고구려 벽화와의 친연관계를 볼 때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과 관련있는 유물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무덤에 새긴 남두육성 별자리
요 몇년 사이에 아라가야와 관련된 고고학적인 발굴성과가 다시 눈길을 끌고 있다.
2018년 말에는 함안의 아라가야 왕궁터인 가야리 발굴조사에서 높이 8.3m에 달하는 토성벽이 확인됐다. 잔존 성벽의 길이는 2㎞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터에서는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군부대 시설을 확인했다. 망루와 무기고, 고상건물(강당), 수혈건물(내무반), 집수지 등 특수목적 건물터 14개동이 노출됐다. 지난 6월에는 성 내부에서 국내 최대규모의 부엌시설이 확인되기도 했다. 
또 아라가야 왕릉급 무덤인 말이산 13호분에서는 전갈자리와 궁수(사수)자리 등 125개의 별자리가 새겨진 무덤 덮개돌이 확인됐다. 이중 특히 눈길을 끄는 별자리는 궁수(사수자리)이다. 동양에서는 궁수자리에 속한 6개의 별이 북두칠성을 닮았다고 해서 ‘남두육성’이라 일컬었다. 북두칠성이 하늘과 죽음을 의미한다면, 남두육성은 땅과 생명을 뜻한다. 동진(4세기 무렵)의 역사가 간보가 편찬한 <수신기>는 “남두육성은 탄생을 관장하며(南斗注生), 북두칠성은 죽음을 주관한다(北斗注死)”라 했다. 
아라가야인들은 생명이 만발하는 봄철 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별자리를 그린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무덤 안에 별자리를 새겨넣은 것은 고구려의 전통이기도 하다. 고구려 무덤 중 22기에서 북두칠성과 남두칠성을 새겨넣었다. 
이밖에도 13호분에서는 중국제 모방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제 허리띠장식과 일본 최고위무덤에서만 확인되는 녹각제 칼손잡이, 직호문(직선과 곡선이 연속으로 이어진 무늬)이 새겨진 뼈장신구 등도 출토됐다.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안라는 가야제국의 형
이쯤에서 근본적인 궁금증 하나를 던져보겠다. 대체 아라가야가 어떤 나라인가. 
가야연맹의 역사는 ‘김해 금관가야(가락국·혹은 구야국)’를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2~4세기말)와 ‘고령 대가야’를 맹주로 한 후기가야(5세기 전반~6세기 중후반)로 나눌 수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아라가야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100기 이상의 중대형 고분이 즐비한 말이산 고분의 존재와, ‘화염형 투창 고배(불꽃 모양의 구멍을 뚫은 토기)’로 대표되는 독창적인 유물, 1993년 마갑총의 발견 등은 ‘전기=금관가야’ ‘후기=대가야’라는 이분법을 의심하게 했다. 
그 때문일까. 아라가야가 4세기 말까지는 금관가야와 함께 전기 가야연맹의 양대세력으로, 5세기 후반 대가야를 중심으로 재편된 후기 가야연맹체에서는 남서부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았다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됐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기기야에서도, 후기가야에서도 줄곧 2인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도 그렇지만 누가 2인자를 기억해주겠는가.

그런데 최근 함안에서 축적되는 고고학적 성과는 예사롭지 않다.

왕궁터가 발굴되고, 금동관이 확인됐으며, 외교와 교역의 상징물인 중국제 청자그릇까지 나왔다. 그에 따라 ‘아라가야=가야연맹체의 1인자’로 위상을 올리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단적인 예로 중국제 청자그릇이 출토되자 발굴단은 중국 자료인 <남제서> ‘동남이열전·가라’ 479년조를 인용했다. 
“(479년) 가라왕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보국장군본국왕’에 제수했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이때 남제의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대가야왕’이라는 해석이 통설로 여겨졌다. 후기가야연맹체의 맹주가 대가야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479년, 바로 그 무렵에 중국에서 제작된 청자가 함안에서 출토되자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바로 <남제서>의 ‘가라왕 하지’는 대가야왕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라가야 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왕궁터, 금동관, 별자리 덮개석, 중국제 청자 등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인용하기를 주저했던 <일본서기>의 아라가야(안라국) 관련 기록도 부각됐다.    
“임나는 안라를 형(兄) 혹은 아버지(父)로 여겨 오로지 안라의 뜻을 따른다”(<일본서기> ‘흠명기(544년)’는 것이다. 가야의 여러 나라가 안라(아라가야)를 형님으로 모신다는 얘기가 아닌가. 
<일본서기>를 보면 529년 남부의 여러 세력이 안라(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이에 안라가 백제·신라·왜의 사신을 초빙하여 새롭게 조성한 고당(高堂)에서 국제회의를 주도한다.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고, 신라가 탁기탄(경남 밀양)을 멸망시키는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이 국제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안라(아라가야)가 당대의 국제정세를 주도한 유력한 나라였음을 암시해준다. 

■고구려의 적 혹은 동지?
<삼국사기>에 거의 유일하게 보이는 아라가야(아라국) 기사도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른바 ‘포상8국의 전쟁’ 기사이다. <삼국사기> 본기는 “209년(나해 이사금 14년) 포상 8국의 공격을 받은 가라국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삼국사기> ‘물계자 열전’은 “포상 8국의 침입을 받은 나라는 (가라가 아니라) 아라”라고 특기했다. <본기>는 ‘가라’, <열전>은 ‘아라’라고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를 두고 지금까지는 포상8국의 전쟁은 안라(아라가야)의 배후지원 아래 골포(마산)·칠포(칠원)·고사포(고성)·사물국(사천) 등 8국이 가라(금관가야)를 공격한 사건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안라, 즉 아라가야가 포상8국의 공격을 받은 사건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또하나 주목을 받는 기록이 바로 <광개토대왕 비문>의 고구려 남정(400년) 기사 중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문구이다. 
‘고구려 남정기사’는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를 쫓아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중 ‘안라인수병’의 문구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등장했다. 그 중에는 ‘안(安)’을 술어로 해석해서 ‘신라(羅) 병사를 안치(安)했다(배치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혹은 ‘라(羅)’를 순라 혹은 순찰을 의미하는 ‘라(邏)’자의 동의어로 보아 ‘고구려의 순라병을 배치한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안라’를 고유명사로 보아 그냥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 혹은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지금까지 고구려의 남정은 ‘고구려-신라’ 대 ‘백제-왜-가야연맹’의 전쟁으로 이해됐다. 이 경우 ‘안라인수병’을 ‘안라국(아라가야) 별동대’가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뜻으로 쓰였을 수 있다. 마갑총에서 출토된 말갑옷이 바로 안라국 별동대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거꾸로 ‘안라인수병’을 친신라, 친고구려적인 활동을 벌인 ‘안라국 수비대’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백제-왜와 연합한 가야는 임나가라(금관가야)이지 안라국(아가라야)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마갑총 갑옷은 고구려와의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협력의 증표일 수 있다.

■김부식의 원죄?
어떤가. 필자는 아라가야 관련 공부를 하면서 정리되지 않은 갖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음을 깨닫고 당혹감을 느꼈다. 아니 학계에서 정리되지 않은 아이템을 기자가 무슨 재주로 깔끔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해국과 피해국을 두고 상반된 주장이 제기된 포상8국의 전쟁서부터 제동이 걸렸다. 그뿐인가.
<광개토대왕 비문>의 ‘안라인수병’ 문구 해석 역시 연구자마다 설왕설래하고 있으니 안갯속을 헤맬 수밖에 없다. 이 기사를 쓰게한 중국제 청자그릇은 어떤가. 발굴단과 아라가야 연구자들은 ‘479년 남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가라왕 하지=아라가야 임금’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100% 맞을까. 중국에서 고급 청자그릇을 수입한 백제가 아라가야에 선물로 준 것일 수도 있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 대목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가야사를 쏙 빼먹은 김부식(1075~1151)의 원죄를 탓할 수밖에 없다. 원 자료가 부족하니 가야사 연구가 지지부진했고, 지금과 같은 혼란을 교통정리 해줄 권위자가 별로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 심지어 전라도 지역까지 ‘가야! 가야!’를 외치는 판국인데…. 
그래도 아라가야의 심장부인 함안에서 잇달아 출토되는 유구와 유물은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을 1500년전 아라가야인들의 삶이 녹아있는 자취가 아닌가. 제대로 기록되었다면 역사의 한페이지를 담당했을 아라가야인들의 숨결을 전해주고자 한다. 깔끔한 정리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기고….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이 기사를 쓰는데 조신규 함안군청 학예연구사, 이한상 대전대·김낙중 전북대·이정호 동신대·박현숙 고려대 교수가 도움말과 함께 각종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참고자료>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2002
이한상, ‘함안 말이산 45호분 금동관’, <함안 말이산고분군 정비사업부지 내 유적>(학술보고서 50책), 두류문화재연구원, 2021
남재우,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의 안라인수병과 안라국’, <성대사림> 12~13집, 성균관대사학회, 1997 
위가야, ‘6세기 전반 안라국 주도의 가야제국 관계 이해를 위한 기초직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94권, 한국고대사학회, 2019
이영식, ‘6세기 안라국사 연구’, <국사관논총> 62집, 국사편찬위원회, 1995
백승옥, ‘안라고당회의의 성격과 안라국의 위상’, <지역과 역사> 제14호, 부경역사연구소, 2004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아라가야 추정 왕궁지 유적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1
동아세아문화재연구소, <함안 말이산고분군 13호분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0
두류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정비사업부지내 유적>(학술조사보고서 50책), 2021
경상문화재연구원, <함안 말이산 고분군 57·128호, 석1호묘>(발굴조사보고서 89책),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