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광해군의 절규…나랏일이 한심하다

 “요즘 조선인들은 큰소리만 치고 있다. 반드시 그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1621년, 광해군이 장탄식한다. 국제정세는 급박했다. 명나라는 요동 전투에서 신흥강국 후금에 의해 줄줄이 패해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론은 후금을 오랑캐 나라로 폄훼하면서 다쓰러져 가는 명나라 편이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절묘한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온 광해군으로서는 이같은 공론이 한심했다.
 “명나라 장수들이 줄줄이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겼다고 한다. 중국의 형세가 이처럼 급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인심은 큰소리만 치고….” 

화가 김윤겸이 그린 청나라 병사 그림인 '호병도'.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맹목적으로 섬기던 조정의 의론을 안타까워 했다.|국립중앙박물관  

그러면서 광해군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이럴 때(명청교체기), 고려처럼 안으로 스스로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쓴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심하다. 무장들 모두 겉으로는 결전을 벌이자고 하면서 막상 서쪽 변경에 가라면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 한다. 이 또한 고려와 견주면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은 ‘고려처럼’만 하면 강대국끼리 충돌하는 격동기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해군은 ‘고려의 외교’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세치 혀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서희의 후예들이 고려 아니던가. 잠깐 광해군이 ‘제발 좀 닮으라’고 한 고려외교의 요체는 무엇인가.

 

 ■서희가 샇은 고려의 외교
 993년(고려 성종 12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자 조정은 멘붕에 빠진다.
 “항복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무조건 ‘항복파’와, “서경 이북(평양)을 거란에 떼주자”는 ‘할지파(割地派)’로 나뉘었다. 하지만 서희는 “고구려 옛 땅을 내줘서는 절대 안된다”고 나섰다.
 섣부른 항복이나 할지(割地) 대신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란의 소손녕과 협상에 나선 서희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했다. “너희가 대국의 사신에게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소손녕의 도발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두 나라 사신은 대등한 자리에서 회담에 임했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지금 고구려 땅은 거란이 소유하고 있다”면서 “빨리 땅을 떼어주고 조공을 바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희는 “고려는 옛 고구려를 계승했기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 했다”고 버텼다. 그러면서 “우리가 거란에 조공하고 싶어도 중간에 여진족이 있기 때문에 조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서희는 “우리가 거란에 조공을 바치려면 여진을 쫓아내고 그 땅을 고려에 돌려주면 된다”면서 “그 땅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어 거란과 직접 통하게 되면 자연스레 조공을 바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한다. 한마디로 궤변이었다. 하지만 거란의 소손녕은 서희의 외교술에 말려 거짓말처럼 강동 6주를 꼼짝없이 돌려주었다.   

 

 ■거란·몽골을 주무른 고려의 외교
 이렇듯 서희가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고려의 외교전략은 더욱 빛났다.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라는 망외의 소득을 올린 고려가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송나라였다.
 고려는 994년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송나라와 합동으로 거란을 정벌하자”고 제안한다. 물론 고도의 전략이었다. 고려는 쇠퇴한 송나라가 대국으로 성장한 거란을 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송나라는 고려와의 합동작전을 거절했고, 고려는 이것을 핑계로 삼아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했다. 과연 치밀한 외교가 아닌가.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관계 단절이라는 명분과 격식을 갖추면서 거란 사대에 따른 외교절차를 마무리한 것이다. 밀사를 파견해서 송나라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제안을 함으로써 국교단절의 책임을 송나라에 돌리는 외교술을 펼친 것이다. 고려의 외교는 훗날 세계최강 몽골제국의 애간장을 녹였다.
 1231~1259년까지 고려는 막강한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렸지만. 항쟁과 교섭이라는 앙면의 칼로 몽골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예컨대 몽골이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질책하자(1231년) 고려 고종은 이렇게 몽골군을 다독거렸다.
 “전쟁으로 국고가 텅텅 비었습니다. 남은 백성들이라도 강화도에 들어가 변변치 않은 토산물이나마 상국(몽골)에 바쳐야 하지 않겠습까.”
 항쟁 때문이 아니라 상국(몽골)을 더 잘 모시려고 강화도로 천도한 것이라 하는데 어쩌겠는가.
 그로부터 22년 뒤(1253년) “빨리 육지로 나오라”는 몽골군의 독촉에는 “동북방면에 있는 포달인(수달 사냥꾼)들이 많은데, 그들이 두렵다”고 변명한다. 아니 수달사냥꾼이 무서워 육지천도를 하지 못하겠다니…. 1256년(고종 43년) 9월, 고려 사신 김수강이 몽골 황제(헌종)에게 몽골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는 “개경에 환도해야 철수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김수강의 화술이 백미다.
 “짐승이 사냥꾼을 피해 굴 속으로 숨었는데, 그 구멍 앞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피곤한 짐승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몽골황제는 김수강의 세치 혀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군사를 철수시켰다.  

원 세조 쿠빌라이를 그린 삽화. 원 세조는 골치아프게 굴던 고려가 화의를 청하자 기쁜 나머지 "고려만큼은 그들의 풍속을 유지하게 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고려는 원나라가 고려의 흡수통합을 꾀할 때 '세조의 유훈'을 들춰내어 좌절시켰다.    

 ■‘세조의 유훈을 따르세요’
 결국 고려는 3년 뒤인 1259년 화의를 결정한다.
 그러자 몽골의 세조(쿠빌라이)는 기쁜 나머지 “고려 만큼은 의관을 본국(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마라”는 등의 조서를 발표한다.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한마디로 ‘세조(쿠발리아)의 유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원나라(몽골)의 내정간섭이 있을 때마다 이 ‘세조의 유훈’을 외교카드로 활용했다. 예컨대 1323년(층숙왕 10년) 원나라가 정동행성을 설립, 고려를 흡수통합하겠다는 야심을 노골화했다. 그러자 당시 원나라에 파견돼있던 토참의사사 이제현은 그 ‘세조의 유훈’을 인용하면서 ‘불가’를 외쳤다.
 “세조황제의 조서 덕택에 고려의 옛 풍속이 유지되고, 종묘사직이 보전됐습니다. 이제 고려에 행성을 설립한다고 합니다. 원나라는 세조의 조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영종(재위 1320~1323)은 “세조(쿠빌라이)의 정치를 본받고 회복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제현은 바로 이 점을 겨냥해서 원 조정을 협박한 것이다. ‘세조의 유훈을 따르라’고…. 원나라는 결국 정동행성의 설치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살얼음판 걷던 세자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바로 그 고려의 외교전략과 전술을 닮으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으로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사실 세자 시절부터 광해군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아버지(선조)는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세자(광해군)가 인심을 잃은 임금(선조)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더욱 골치아픈 것은 명나라의 반응이었다. 1593년(선조 26년) 명나라 사신은 선조에게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주제넘은 소리를 해댄다.
 “세자(광해군)를 보니 용안이 특이하였고, 온 백성이 추대한답니다.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이 안록산의 난을 맞아 아들인 숙종(756~762)에게 군권을 맡겼더니 숙종이 장안과 낙양을 수복했습니다. 세자의 현명함이 당 숙종보다 더하니 국왕은 반드시 전위하시는 편이….”(<선조실록>)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못난 임금이니 당 현종의 예에 따라 속히 현명한 세자(광해군)에게 물려주라는 소리가 아닌가.
 대신들은 물론, 상국인 명나라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쫓겨나는 임금이라면…. 당시 선조가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문제는 선조의 위기감이 고스란히 광해군에게 전달됐다는 것이었다. 세자 입장에서 광해군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추호라도 잘못된 언행을 했다가는 역린을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떠오르는 강국인 후금(청나라)과 썩어도 준치인 명나라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를 펼쳐야 했다.  

비운의 임금 광해군. 명청교체기에 살얼음판 등거리 외교를 펴다가 그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이 쫓겨난 지 불과 4년만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형제의 맹약을 맺는 굴욕을 당한다.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먹여주냐
 앞서 인용한대로 당시 조정의 의론은 한심했다. 우물앞 개구리처럼 명나라에 대한 짝사랑이 조정의 공론이었다.
 “난 고질병인 화병 때문에 요즘 겨우 버티고 있다. 이럴 땐 급하지 않은 업무는 좀 보류해도 좋으련만…. 너무도 일의 경중을 모르고 있구나.”(<광해군일기> 1620년 10월 18일)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맹목으로 섬기려는 대신들의 ‘몽니’는 광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예컨대 1619년(광해군 11년),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요동을 차지한 후금이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우리(후금)와 맹약을 맺자”는 편지였다. 광해군은 ‘지는’ 명나라와 ‘뜨는’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달랐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웠다. 이들은 3개월이나 ‘몽니’를 부리며 차일피일 미뤘다.
 “호서(胡書·후금의 편지)를 처리하라고 했거늘…. 명색이 국방을 담당하는 비변사가 미적미적 대고 있으니…. 1~2일 안에 처리하도록 하라.”(<광해군일기> 1619년 7월 16일)
 그러나 대신들은 “명나라의 문책이 두렵다”며 선뜻 나서지 않았다. 광해군은 ‘명나라와의 의리가 밥 먹여주냐’며 호통친다.
 “이번 호서의 처리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다. 그런데도 경들이 명분론만 내세우고 있다. 종묘와 사직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2일)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대신들이 미적거리자 우의정 조정(1551~1629)에게 “당신이 한번 처리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조정은 “제가 왜 책임지냐”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회피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일을 혼자 담당한다는 말입니까. 성상께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여 처리하소서.”(<광해군일기> 1619년 7월 27일)
 그러자 광해군이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신도 ‘맡지 않겠다’며 이토록 번거롭게 하는데…. 어느 대신이 맡겠는가. 나 혼자 고민하다가 병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나랏일이 한심하구나.”

 

 ■전쟁이 재발되면 가슴이 섬뜩하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광해군은 깊은 병에 걸려 있었다. 후금의 편지에 답하는 기한(8월5일)이 훌쩍 지났지만 어느 누구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군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대신들에게 애원조로 호소한다.
 “내가 병이 심하고 졍신이 혼미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데도 종묘사직이 위태로운 꼴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왔다. 이미 답서의 기한(8월 5일)이 지났지만 8월 안으로 보낸다면 혹시 목전에 닥친 전란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경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광해군일기> 1619년 8월 14일)
 광해군은 “만약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뜩하다.(思之膽寒)”고 걱정했다.
 그랬다. 홀로 노심초사하던 광해군은 전쟁의 재발을 걱정한 지 4년 만에, 제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호소한지 2년 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1623년) 그런 다음 불과 4년 뒤 정묘호란(1627년)이 일어나 오랑캐와 ‘형제의 맹약’을 맺었고, 다시 9년 뒤 병자호란(1636년)으로 ‘군신의 맹약’을 맺는 신세가 된다. 그 사이 죄없는 백성들만 도탄에 빠진다. 지금도 광해군의 절규가 귓전을 때린다.
 “큰소리만 치는구나 나랏일이 한심하다. 제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닮아라.”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