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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귀뚜라미 소리에 얽힌 가을 이야기

‘귀뚜라미가 울면 게으른 아낙이 놀란다’는 말이 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여름철에 부지런히 길쌈해야 할 아낙네가 실컷 게으름을 피우다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에 ‘아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촉직(促織)’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겨울나기용 베를 빨리 짜라(織)고 재촉하기 위해(促) 우는 벌레’라는 뜻이다.

귀뚜라미는 예부터 가을의 전령사이자 외로운 사람들의 벗으로 알려져 있었다.

<시경> ‘실솔편’은 “귀뚜라미가 마루에 있으니 한 해가 저물어간다”고 했고, <시경> ‘빈풍편’은 “가을(음력 8월) 귀뚜라미가 우리 집 상 밑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한서> ‘왕포전’은 “귀뚜라미는 가을을 기다려 울고, 하루살이는 어두운 때에 나온다”고 했다.

정조 임금은 “귀뚜라미가 집에 들어오는 계절이 되면 농사일은 그제야 휴식을 취한다.(실솔在堂 役車方休)”(<홍재전서>)라 했다.

구중심처에서 독수공방해야 했던 궁녀들이 “해마다 가을이면 조그만 금롱 속에 귀뚜라미를 잡아넣어 베개맡에 두고 그 소리를 들르며 외로움을 달랬다”는 <유사(遺事)>의 기록도 있다.

귀뚜라미 소리와 주변 온도의 상관관계를 수식으로 표현한 아모스 돌베어. 이것을 돌베어의 법칙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귀뚜라미를 지루한 여름철의 끝과 시원한 가을철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이며, 고독한 자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반가운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옛적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귀뚜라미 소리로 주변의 온도를 짐작했다. 그래서 귀뚜라미가 가난한 자의 온도계라는 미국 속담이 나왔다.

과학적인 근거도 제시됐다. 1897년 미국 과학자 아모스 돌베어(Amos Dolbear·1837∼1910)는 ‘긴꼬리 귀뚜라미’ 소리와 주변 온도의 상관관계를 수식으로 정리한 논문을 학술지 ‘아메리칸 내처럴리스트’에 발표했다. 이름하여 ‘돌베어의 법칙’이다.

긴꼬리 귀뚜라미가 15초 동안 우는 회수에 40을 더하면 그 주변의 화씨온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15초간 30번 울었다면 주변온도는 화씨 70도(섭씨 21도)라는 것이다. 물론 귀뚜라미 소리의 회수가 주변 온도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된다고는 볼 수 없다.

양쪽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내는 수컷은 짝짓기를 위해 암컷을 유인할 때 특히 큰 소리를 낸다. 수컷의 나이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러나 날개를 비비는 신체활동은 주변 온도에 따라 변하기는 한다. 따라서 보통 섭씨 24도 내외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폭염이 끝날줄 모르는 지금 이 순간 귀뚜라미 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그래도 언제나 가을이 오려나 하고 귀뚜라미 소리의 횟수를 세어보려 한다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1000종이 넘는 귀뚜라미 가운데 어찌 ‘긴꼬리 귀뚜라미’를 찾겠으며, 설혹 찾는다 해도 그 미묘한 소리의 횟수를 어찌 셀 수 있단 말인가. 외려 짜증만 일어날 것이다.

고요한 밤에 귀뚤귀뚤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돌아올 가을을 맞이하면 그 뿐이다.

서거정(1420~1488)의 시를 떠올린다.

“귀뚜라미가 집에 들어옴이여.(실솔在堂兮) 가을 절서를 재촉하누나.(秋序催)”(<사가집>)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