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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기마, 무용, 수렵…고구려 벽화를 빼닮은 '신라행렬도' 1500년만에 현현

말을 탄 인물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춤추는 듯한 모습이다. 활쏘는 사람들이 암수 사슴과 멧돼지, 호랑이, 개 등을 사냥하고 있고,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개(犬)와 함께 행렬하고 있다. 안악 3호분이나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와 흡사하다. 그러나 신라 특유의 선각문 기하학 문양들도 보인다.

5세기대 신라 귀족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쪽샘 44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빼닮았지만 신라 특유의 문화도 빼놓지않은 ‘신라 행렬도’를 새긴 토기가 발견됐다. 행렬이라는 큰 주제 아래 기마·무용·수렵의 내용을 파노라마처럼 펼친 복합 문양은 신라 회화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이다. 무덤제사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쪽샘 44호분 에서 확인한 ‘신라행렬도’ 토기. 굵은 선으로 된 부분이 찾아낸 토기편이다. 신라인들은 높이가 40㎝로 추정되는 토기의 목과 어깨, 몸통 부분에 다양한 문양을 새겨넣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기마·무용·수렵…‘신라판’ 고구려 벽화의 현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부터 진행 중인 쪽샘지구 조사에서 44호 고분(사적 제512호)을 발굴하다가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와 말 문양 토기, 그리고 제사와 관련된 유물 110여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중 ‘신라 행렬도’ 토기는 44호 무덤의 호석(무덤의 외부를 보호하려고 돌로 만든 시설물) 북편에서 파손된채 출토됐다. 1500년전 신라인들이 높이가 40㎝로 추정되는 토기의 목과 어깨, 몸통 부분에 다양한 문양을 새겨넣은 것이다. 위로부터 1단과 2단, 4단에는 ‘나무 목(木)’자 혹은 사람 모양(1·2단)과 물결 모양(4단)을 반복해서 새겼다. 3단에는 다양한 인물(기마·무용·수렵)과 동물(사슴·멧돼지·말·개) 등이 연속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문양의 전체구성으로 보아 행렬도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출토정황상 제사용 토기로 제작돼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런 추정의 근거가 있다.

행렬도가 새겨진 ‘목긴항아리’(장경호). 목부분에서 몸통까지 총 4단으로 문양이 구성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덤 주변을 빙둘러 박은 항아리의 정체

제44호 고분의 호석 외곽 자갈층에서 큰 항아리(大壺) 9점이 일정 간격으로 고분을 빙 둘러싼 형태로 확인됐다. 이 항아리들 주변에서 ‘신라행렬도’ 토기와 ‘말모양 그릇받침’ 등을 포함하여 굽다리 접시, 뚜껑접시, 토제 악기 및 방울 등 주로 제사에 쓰이는 유물 110여점이 발견됐다.

큰 항아리를 제외한 나머지 제사유물들은 제의행위를 펼친 뒤 일부러 깨뜨려 묻어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대 사회의 제사형식이다. 신라 고분 중에는 데이비드총(서봉총 남곽)과 금령총 등 중대형 돌무지덧널무덤에서만 확인된 바 있다. 정대홍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조사결과 이런 제사유물들을 시차를 두고 몇 회에 걸쳐 묻어두거나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호석 주변에서 제사 행위가 여러 번 이뤄졌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고분 주변을 빙둘러 제사용 토기를 박아놓았다. 그 사이에서 행렬도 문양의 토기와 말문양 토기가 확인됐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구려 문화의 세례를 받은 신라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무덤 주변에 이른바 ‘행렬도’를 그린 토기를 왜 박아 놓았을까. 자문위원들은 토기에 새겨진 이른바 ‘행렬도’의 모티브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왔다고 판단했다.

아닌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는 4세기 말인 392년(신라 내물마립간 37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 대서지의 아들 실성(훗날 실성왕 재위 402~417)을 인질로 보낼 정도로 친선(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400년(광개토대왕 2년·내물마립간 45년)에는 신라가 왜구의 침입을 받자 고구려가 5만 보·기병을 파견해 왜병을 쫓아내기도 했다. 이 무렵 고구려는 신라 임금을 ‘동이 매금(東夷 寐錦)’, 즉 ‘동쪽 오랑캐(동이)의 임금(매금)’이라 지칭하고, 영원토록 형제처럼 지내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고구려-신라’ 관계는 고구려 장수왕(재위 413~491)의 노골적인 남진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눌지마립간·재위 417~450)가 433~434년 사이 백제(비유왕·427~455)와 화친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고구려 문화는 5세기 내내 신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는 신라가 금관·금동관과 같은 화려한 부장품을 대규모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지하에 무덤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과 흙으로 덮은 신라 귀족무덤)에 넣는, 이른바 ‘마립간 시대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이번에 발굴한 쪽샘지구 44호분이 바로 그러한 시기의 무덤이다.

행렬도’ 토기 중 기마행렬. 말을 탄 인물과 말들이 행렬하는 장면이다. 상단에 말 탄 인물, 하단에 말 2마리로 구성되어 있다. 말의 갈기를 의도적으로 묶어 뿔처럼 묘사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라인의 장송의례 표현

따라서 44호분에서 확인된 ‘행렬도 토기’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받은 증거라는게 자문위원들 해석이다. 즉 4세기 중반에 조성된 고구려 안악 3호분과, 5세기 전반에 제작된 무용총 등의 행렬·수렵도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고분벽화는 3세기말~5세기초 고구려 영토가 크게 확장하던 시기에 유행했다.

벽화는 생전의 풍요로운 삶이 사후에도 재현되기를 바라는 영원불멸의 의미를 담았다. 망자를 사후세계로 고이 인도하는 추모행렬의 표현이기도 했다. 벽화에는 무덤주인이 남녀 시종의 시중을 받으며 춤과 노래, 놀이를 즐기거나 대규모 행렬에 둘러싸여 외출하고, 산야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등이 주로 등장한다.

이번에 확인된 ‘신라 행렬도’ 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강현숙 동국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말을 탄 주인공(망자)을 따르는 시종과, 천국으로 떠나는 무덤 주인공을 막아서는 사악한 동물들을 무찌르고, 망자를 위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의 모티브는 고구려 벽화를 빼닮았다”면서 “장송의례를 파노라마처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행렬도’ 중 무용, 즉 춤추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세부 그림. 고구려 벽화인 무용총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맨 위사람은 확인된 발부분 토기편으로 복원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뜬금없이 새겨진 목(木)자 산(山)자 기하무늬

전호태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는 “5세기 초중반 형제국으로 동맹관계를 맺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아 고구려 벽화와 비슷한 모티브의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했다. 전 교수는 그러면서도 “신라인들은 일부 문양에서는 신라 특유의 문화를 잊지않고 녹여 표현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토기에 새긴 그림은 고구려 벽화의 풍속화 요소를 담고 있지만 토기 3단과 4단에 선각으로 표현된 나무 목(木)자와 산(山)자 같은 ‘다소 뜬금없는’ 기호문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이런 기하학 문양은 신석기 문화인 중국 간쑤성(甘肅省) 지역의 채도문화와 동유럽 루마니아의 쿠쿠테니 문화에서도 보인다”면서 “신라인들이 바로 선사시대부터 유행한 선각 문양까지 표현했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전교수는 “이는 역사시대들어 ‘역사시대에 걸맞은 문화’를 받아들인 고구려·백제와는 다른 양상”이라면서 “한반도의 동남쪽 분지에 자리잡았던 신라문화의 독특성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행렬도’ 토기 중 수렵장면. 활을 든 인물들이 다양한 동물을 사냥하는 장면, 동물은 암수 사슴과 멧돼지, 호랑이, 개로 추정된다, 하단의 기하문은 산(山) 또는 나무(木)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고구려·백제와 달리 신라문화는 왠지 ‘고인 느낌’을 줘서 전 시대, 즉 선사시대의 특징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 확인된 ‘행렬도’ 기하문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은 같은 부여출신이지만 신라의 경우는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됐다는 방증이 기록에 남아있다.

“서라벌에는 오래전부터 조선의 유민들이 산 계곡에 나누어 살아 여섯마을을 형성하고 있었고, 기원전 20년 중국 진나라의 난리를 피해 동래한 무리들이 많았고 이들이 진한사람들과 섞여 살았다”(‘혁거세조’)와 “기원후 37년 고구려 무휼왕(대무신왕·재위 18~44)이 낙랑을 쳐 멸망시켰는데 유민 5000명이 신라에 투항해서 6부에 나눠살게 했다”(‘유리이사금조’)는 <삼국사기> 기사가 그것이다. 전 교수는 “이번에 확인된 ‘행렬도’ 토기에는 바로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전 시대에 들어왔던 다양한 문화를 표현한 신라만의 독자성이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강현숙 교수는 “나무 목(木)자와 뫼 산(山)자의 기하학 문양은 그야말로 나무와 숲, 산의 모습을 단순화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가장 크게 묘사된 인물. 행렬의 주인공으로 해석됐다. 주인공이 개(犬)와 함께 행렬하는 장면이 특이하다. 망자가 생전에 아꼈던 애견인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검은 개는 사당을 지키는 수묘의 동물로 표현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말 탄 인물을 따르는 인물들은 유가족이 아닐까 

이한상 대전대 교수(역사문화학과)는 “굳이 고구려 벽화와 연결지을 것도 없이 신라의 장송의례를 표현한 그림으로 봐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목(木)자와 산(山)자 문양은 1단과 2단에 반복적으로 표현된 기하문의 형태와 같은데, 이것은 신라 지역에서 출토되는 ‘목긴항아리’(장경호)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에서도 보이는 무늬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木자로 보이는 문양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목긴항아리’ 등에서는 마치 사람이 만세를 부르는 문양으로도 등장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한 “맨 밑바닥(4단)에서 반복된 물결(∞) 문양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우장식 목긴항아리(국보 제195호) 표면에 새겨진 무늬와 똑같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이번에 확인된 그림 중 말 탄 주인공을 따라가는 인물 3명 중 두 사람은 바지를, 한 사람은 치마를 입은 모습”이라면서 “춤을 추거나 시종하는 인물일 수도 있지만 망자를 추모하는 유가족의 몸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으냐”고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았다. 한편 강현숙 교수와 이한상 교수는 “사냥하는 듯한 두 사람은 망자를 편히 사후세계로 인도하려고 삿된 동물들을 죽이는 이른바 벽사의 의미로 그려넣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행렬도. 주인공을 가장 크게 표현했고 말갈퀴를 묶어 뿔처럼 묘사했으며 수레를 탄 주인공과 호위군사, 군악대 등 이번에 확인된 ‘신라 행렬도’ 토기문양을 쏙 빼닮았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생전에 망자를 따른 애견도?

그림 가운데 또 하나 흥미로운 포인트는 기마인물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바지 혹은 치마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소측은 “신라의 토우 중에서도 긴 두루마기를 입은 남성이 존재한다”면서 “짧고 길게 입은 패션이 남녀를 구분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또한 뒷부분의 말 탄 인물(주인공으로 추정)이 개(추정)와 함께 행렬하는 장면도 눈에 띈다. 그렇다면 이 개는 망자가 생전에 아꼈던 애견이 아닐까. 

고구려  무용총 벽화. 말을 탄 인물들이 사슴 호랑이 등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 춤을 추는 인물들도 다수 표현되어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연구소측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검은개는 수묘(守廟), 즉 사당을 지키는 동물을 표현했다”면서 이 개 역시 망자의 사당을 지키는 동물로 해석했다. 이밖에도 말의 갈기를 의도적으로 뿔처럼 묶은 점도 흥미롭다.

이종훈 연구소장은 “지금까지 찾아낸 토기 문양으로는 속시원한 해석을 할 수 없다”면서 “아직 발굴이 덜 끝났으므로 문양의 실체를 확인할 토기편을 더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제44호 고분의 큰항아리 6호와 7호 사이에서는 말 문양이 새겨진 발형기대(화로모양 그릇받침) 조각편이 2점 확인됐다. 다리부분만 확인됐지만 말 머리의 갈기, 다리 관절과 근육, 발굽까지 상세하게 표현됐다. 말의 목과 가슴, 몸통 전체에 격자문이 표현돼있다. 말 갑옷이 착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일한 문양의 말 여러마리를 그려넣은 연속문양으로 추정된다. 정대홍 학예사는 “토기에 새겨진 말 문양 중 회화적인 표현이 가장 우수한 사례”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